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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버지 (롬 8:12-17)

종교개혁 505주년인데요. 마틴 루터가 95개 조의 토론 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교회 문 앞에 붙인 것이 도화선이 되어, 종교 개혁이 일어난 지 벌써 505주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틴 루터가 95개 조의 토론 주제를 교회 앞에 붙인 것은 오늘날 대자보를 붙이는 거하고는 같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뭔가 항의하고 싶은 것, 오늘은 뭔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대자보를 붙여서 자기주장을 하곤 하는데요. 마틴 루터는 그런 식으로 대자보를 붙인 것이 아니라, 늘 세미나가 있었어요. 신학적인 토론이 있었어요. 매주 혹은 매달 학문적인 토론, 콜로키움(colloquium)이라고 하죠. 그런 대화를 하는 그런 자리가 있었는데, 마침 마틴 루터의 순서가 되어서, 자기가 발표할 주제를 토론 주제를 미리 적어서, 교회 문 앞에 붙여놓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그 마틴 루터가 써놓았던 글들이 당시에 교회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보고, 그리고 성경적인 대답을 주고 있어서, 그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보면서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이루게 되는 그런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중세 천주교회는 굉장히 타락한 교회였는데요. 그렇게 타락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중세 교회가 타락하게끔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들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이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살펴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느냐? 아버지가 아닌 주인으로 보느냐?”와의 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당시 천주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보다는, 마치 주인이나 재판관 혹은 장사꾼 정도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잘못 가르친 것이죠. 마치 장사꾼에게 가면, 우리가 돈을 내고 물건을 사듯이, 하나님에게 갈 때에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얻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죠. 연옥에 있는 부모님들이 천국에 가게 만들려고 한다면, 돈을 바치면, 헌금을 바치면, 그 헌금 소리와 함께 부모님의 영원히 천국으로 가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가르침을 가르쳤는데, 그러한 가르침은 마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의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장사꾼과 같은 하나님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주인처럼 가르친 겁니다. 우리는 종이고 하나님은 주인인데, 종이 주인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다해서 일을 해야,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열정을 다해서 일하지 아니한다면,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에 따라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 식으로 가르쳐서, 그래서 이 천주교회는 그러한 타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는 늘 타락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렇지만, 굿을 해야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함으로써 결국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굽니까? 무당이 이득을 보는 것이죠. “부적을 잘 붙여야만 액댐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그 말을 통해서, 그 부적을 쓰게 만드는 걸 통해서, 누가 이득을 보는 겁니까? 점쟁이가 이득을 보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그래야 우리가 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에게 무엇을 해야만, 우리가 축복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시스템은 결국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 종교인들이 타락의 길을 가도록 만들어버린 아주 결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8장 14절에서부터 15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인이라는 얘깁니까? 아버지라는 얘깁니까? 아버지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지, 우리가 종이고, 하나님이 주인인 주종 관계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 보면, 우리를 종으로 비유하는 비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어떤 주인이 있는데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종들이 그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일한 종도 있고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종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는 칭찬을 하시면서 상을 내리지만, 그러나 열심히 일하지 아니한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는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와 같은가? 주인과 같다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와 같은가? 마치 종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비유를 읽으면, 그 비유를 읽으면, 우리는 종처럼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그리고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살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잘하게 되면, 상을 받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주종 관계로 나타낸 비유가 또 하나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입니다. 어떤 주인에게 청지기가 하나 있는데, 그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리하는 청지기가 재산을 함부로 막 쓰니까, 주인이 그 청지기를 해고하게 되는 이야기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인 것이죠.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누구와 같은가? 주인과 같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누구와 같은 것인가? 마치 청지기와 같다는 겁니다. 종과 같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비유들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주인인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마치 청지기와 같고, 종과 같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명하는 이유가 정말 하나님이 주인이고 우리가 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비유들의 핵심은 우리들에게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그 사명대로 잘 살지 않게 되고 그랬다가는, 나중에 심판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그런 비유의 말씀이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내 주는 비유가 있다고 하면 어떤 비유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부자지간의 관계, 부모님과 자녀와의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나타내는 참된 관계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비유가 무엇이 있냐면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아버지를 무시해버리고, 배반해버리고,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집을 뛰쳐나갑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죠. 아버지에게 실망을 준 것이죠. 그리고 그 아들은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보내는 겁니다. 마음대로 돈을 써버리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그런 정말 불효자요 정말 못돼먹은 그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내 기대에 충족하지 못했으니,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야. 너는 내 호적에서 파버리겠어. 다시는 나를 아는 척하지 말라. 하면서 부자 관계를 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 탕자가 집을 나간 그날부터 아빠는 기다리는 거예요. 우리 아들이 언제 돌아오나? 자꾸만 먼 곳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이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마치 거짓처럼 터벅터벅 집을 향해서 돌아오는 그 모습을 저 멀리서 본 아버지가, 그 망한 아들을 보면서 뛰어가서, 그 아들을 맞이하고 사랑으로 품고, 그리고 다시 씻기고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면서 이제는 다시 아들의 위치로 회복시켜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종처럼 하나님께서 그냥 내쳐버리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산 것은 어떻게 살았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일들을 했고, 미워하며 살았고, 탐욕을 부리며 살았고, 거짓말하며 살았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행하면서 사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내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시키시고, 다시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너희는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어떻게 나가라고요? 아빠 하면서 나가라는 거예요. 어떻게 나가요? “아저씨 내가 천 원 줄 테니까, 천 원어치 주실 수 있어요?”라고 나가는 게 아니라, 아빠하고 나가라는 거예요. 마치 갓난아기가 울면, 엄마가 젖을 주듯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다 베풀어주듯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너희가 열심히 공부해서 100점 만점 받아오면, 그러면 밥 주겠다. 그랬나요? 아니요. 빵점 맞아도 밥 얼마나 잘 줬는지 몰라요. 돈을 벌어오면 그러면 옷 입혀주겠다고 했나요? 아니요. 계속 가져다 써도, 계속 사랑해줬어요. 앵벌이에서 껌을 많이 팔면, 그러면 잠을 재워주겠다고 했나요? 그게 아니에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그 부모님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 우리를 무한대로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와 같다고 그러면 별로 감동이 안 돼요. 아버지가 사랑이 많은 것보다는, 화도 잘 내고, 또 무뚝뚝하고, 모질게 했던 기억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하나님이 아버지와 같다.” 그러면 별로 그렇게 감동을 안 받으시는 것 같아요.

제가 어떤 영상을 봤는데, 그분이 우리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 사람이랑 결혼해서 미국에 갔어요. 가서 거기서 아기도 낳고 길렀는데, 코로나 시절에 한국에 올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코로나가 어느 정도 완화가 되고, 한국에 올 수 있게 돼서, 3년 만에 그 아기를 데리고 친정을 방문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친정을 방문했더니, 그 아기를 손주를 본 할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냐면, “야야” 그 손주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손주 앞에서 너무나도 따뜻하게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애기 엄마가 “저게 우리 아빠 맞을까? 저분이 우리 아빠 맞을까?” 나한테는 한 번도 저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됐나 싶을 정도로 확 변해버렸다고 하는 그런 걸 본 적이 있는데요.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면 더 잘 설명이 될까요?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소개하기보다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분이셔. 하나님은 너희 어머니와 같은 분이셔.”라고 표현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가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원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지만, 입양이 되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죠. 종은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데, 왜 일을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일하는 거죠. 돈을 받고 취직한 사람은 그 직장을 위해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요즘 라디오 듣고 가다 보면 “돈 받은 만큼 일합니다.” 막 그런 멘트가 자꾸 나오더라고요. 돈 받은 만큼만 일하는 게, 취직한 사람의 모습일 것 같아요.

하지만 가족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녀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 받은 만큼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하는 것이죠. 어느 날 식당을 갔습니다. 식당을 갔는데, 식당에서 이렇게 음식을 차려주는 직원이 있었는데, 그 직원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예요.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부족한 게 없는지를 또 와서 살펴보고, 그래서 가져다주면서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는지, 우리 같이 갔던 일행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참 저 직원은 정말 친절하고 착한데, 아마 사장님이시겠지. 아마 사장님의 가족이겠지.” 생각했어요. 직원이라면 이렇게 안 하겠지 하면서 생각한 거죠.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나가면서 물어봤어요. 참 친절하시네요. 혹시 이 가게에 사장님이십니까? 그랬더니, “저 아들이에요.” 돈 받은 만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종은 돈 받은 만큼 일하고, 주인이 무서워서 일하고 보상을 바라고, 그리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일한다고 한다면, 자녀는 누군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누구로 보느냐의 문제일 수 있겠는데요. 많은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마치 미신에서 말하는 그런 미신의 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내가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혼날까 봐,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주실까 봐, 그것을 계산을 하면서 열심히 하기도 하고, 보상을 바라면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효녀 심청전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심청전 이야기를 다 하시죠? 심청전에 보면 바치는 이야기가 세 사람이 나옵니다. 누가 먼저 바치는가? 심봉사는 절에게, 절에 삼천 석의 곡식을 바쳐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심봉사는 왜 쌀을 삼천석이나 절에 내야 합니까? 그것은 절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내 눈을 뜨려면, 삼천석을 내야 된대. 그러니까 내는 거예요. 내가 눈을 뜨려면 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내는 겁니다.

뱃사람들이 있습니다. 뱃사람들은 처녀를 구해다가 바다에 바쳐야 됩니다. 용왕님의 화를 달래기 위해서, 그래서 처녀를 사다가 바쳐야 되는데, 처녀 몸값으로 3천 석이라고 하는 쌀값을 지불해야 되는 거예요. 왜 뱃사람들은 그런 거금을 투자하면서까지 처녀를 구하고, 그래서 바다에 빠뜨립니까? 바다가 좋아서? 용왕님이 좋아서? 그게 아니라 안 바치면 항해하는 도중에 풍랑이 일어서 죽을까 봐. 무서워서 억지로 바치는 것이 그런데 또 하나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그건 누구냐면, 바로 심청이죠. 심청이는 아버지로부터 아버지 심봉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 눈이 뜨려면 공양미 산천석을 바쳐야 한단다”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길을 걸어가는데, 담벼락에 방이 하나 붙어있는 거예요. 우리 배가 곧 출항하게 되는데 처녀를 구합니다. 인당수에 제물로 바칠 처녀를 구하는데, 그 처녀가 있다고 한다면 삼천석의 쌀을 주겠다고 하는 공고문을 보는 거예요. 그걸 봤을 때 이 심청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너무 좋다. 자신의 목숨을 주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왜? 아버지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내 몸을 바쳐서라도 아버지에게 줄 수만 있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 효녀 심청전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심봉사의 마음이나 뱃사람들의 마음은 기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것이고,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고, 안 하면 재앙을 면하지 못하니까, 안 하면 눈을 뜰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억지로 하는 겁니다. 하지만 효녀 심청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을 드릴 수가 있는 것이죠.

그 옛날 과거 유대인들은 마치 뱃사람이나 심봉사처럼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때, 그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멸망할까 봐. 어려움을 당할까 봐. 억지로 억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을까 봐 하는 것이죠. 또 잘 지키면 복을 받을까 봐, 그렇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는 이런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아버지와 자녀로, 그 사랑의 관계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세요. 하나님은 주인이나 재판관이나, 그리고 또 장사꾼과 같은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고, 조폭 그런 두목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선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냥 옛날처럼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양극단으로 가게 되는데요. 정말 하나님이 주인인 것처럼 생각해서 심판주처럼 생각해서 억지로라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거나, 우리는 종이 아니고 자녀입니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이 심판주 주인 이런 분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말하면,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라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바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양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또 부모를 위해서 고난도 받고 어려움도 자처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게 사랑을 되갚는 것이 그게 자녀의 마음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결단의 모습, 억지로가 아니라, 이거 하지 않으면 심판받을지 몰라. 이거 해야만 복 받을 수 있어라고 하는 그런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오늘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까?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까? 생각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에 우리 딸들한테 문자를 보냈어요. 얘들아. 금년에는 우리가 미국에 못 갈 것 같은데, 내년에는 우리가 한번 갈 수 있을 것 같다. 가게 되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이고, 차는 미국에 있는 내 친구 목사님한테 빌려서 타고 다닐 거다 하면서,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딸이 당장 응답이 다 왔어요. “아빠, 친구 목사님한테, 그렇게 부담 주지 마. 내가 해줄게. 내 차 써.” 요구하지 않아도, 아빠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왜 부모가 자기들을 사랑한 것이 너무나도 크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들이 힘들어도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진행하게 될 텐데요. 이 성찬 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가를 다시 한번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주신 몸과 살과 주님께서 나를 위해 흘려주신 그 피를 우리가 기념으로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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