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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억지(고후9:1-5)

오래간만에 우리가 고린도 후서의 말씀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은 8장의 말씀에 연이어서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8장의 말씀 가운데, 어떤 내용이 있는가를 좀 아시면 좋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십니까?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시죠? 8장의 내용이 어떤 내용이냐면,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돕는 구제 헌금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8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교회가 어려움을 당했고, 기근을 당하게 되었고, 굉장히 힘든 상황 가운데 있게 되었을 때, 교회는 무엇인가? 개교회, 개교회, 개교회 나누어져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인 하나님, 하나인 주님 안에서 온 교회가 하나다. 형제요, 자매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형제 교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줘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8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9장의 말씀은 그 말씀에 연이어서, 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 동참해달라. 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구제 헌금을 열심히 잘해달라. 격려하고 권고하는 말씀이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9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도를 보면서 이해를 좀 도왔으면 좋겠는데요. 지도를 보시면 파란색으로 표시된 것이 오늘날의 이름입니다. 익숙하시죠?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에, 이스라엘, 이집트, 리비아가 있는 저 지중해 중심의 지도를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의 그리스라고 하는 그 나라에 있는 한 도시가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이고, 고린도 후서는 바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보낸 편지가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가 되겠습니다. 지금 그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줘라 하는 것이죠.

(지도를 더 보여주세요. 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지도 화면을 더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도와줘라 하는 것이 이 말씀인데, 아가야라고 하는 것은 고린도가 속해 있는 큰 그 지역을 아가야 지방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 지역을 가리켜서 아가야 지방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마게도냐라고 하는 곳은 어디냐? 그리스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을 가리켜서 마게도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이 아가야, 마게도냐, 고린도, 예루살렘 이런 내용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떤 지역이 어디에 있는가? 한번 머릿속에 기억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하는 그런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언제부터 있었냐면, 1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모습을 보여주니까, 바울 사도는 그게 너무나도 좋았어요. 고린도 교회가 형제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너무나도 좋아가지고, 바울 사도가 그것을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답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런 좋은 일을 한답니다.” 하면서, 떠벌리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 고린도 교회만 이 선한 일을 할 게 아니라, 우리도 도와주겠다고, 그렇게 마게도냐 교인들이 같이 동참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런데 삼절 말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이제 바울 사도가 사람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사람들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여러분들을 독려하기 위해서입니다.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권면을 하는 것일까요? 헌금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죠. 이렇게 헌금 준비를 하라고 독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실컷 자랑을 해가지고, 마게도냐 교회도 하겠다고 그렇게 됐는데, 정작 고린도 교회에서 헌금을 안 해버리면, 그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습니까? 당신들 때문에 다른 교회가 영향을 받아서 헌금하겠다고 하고, 다른 교회가 이렇게 열정을 내게 되었는데, 정작 고린도 교회가 헌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가, 마게도냐 교인들과 함께 바울 사도와 함께 이 고린도를 방문해서 “헌금을 거두어서 전달해 주려고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몰랐는데요” 하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분주하게 그 헌금을 거두려고 하고 한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 되겠는가?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사람을 보내어서 권면하고, 고린도 후서를 써서 권면하는 것은 미리미리 다 준비해서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는 그 선한 일을 열심히 미리미리 잘하라고 하는 것을 권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겠다고 하는 그런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게 되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다른 교회들도 감동을 받은 겁니다. “야, 고린도 교회는 이런 좋은 일을 하는구나.” 하면서 감동을 받은 것이죠. 그런데 정작 그 돕겠다고 하는 교회에 찾아가서 “도와주세요”라고 했더니, 그때 우물쭈물거리고 있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들, 원래 그렇게 계획했던 거 하세요. 예루살렘 교회를 돕자고 했잖아요? 준비하세요. 우리가 갔을 때, 그때서야 허둥지둥하지 말고, 미리미리 준비했다가, 그래서 헌금을 하세요”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인 것이죠.

바울 사도가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은 쉽게 뜨거워지지만, 그러나 실제로 행동을 옮기는 데는 굉장히 느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알아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신다고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물론 종종 모르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방탕하게 사는 것보다 경건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외면하는 것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알고 있는데, 언제나 그것은 마음뿐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마음은 알고 있는데, 그것을 실행하기까지가 너무나도 오래 걸리는 거예요. 정작 실행에 옮기지를 못한다고 하는 것이죠.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 다 알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 사는 게 바쁘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그냥 지나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된다는 거, 다 알아요. 하지만 그런데 피곤하니까, 그냥 바쁘게 살다 보니까, 기도하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는 것이죠. 마치 살 빼는 것과 똑같아요. 살을 빼야 된다는 거 알죠? 안돼요. 그런데. 매일매일 걸어 다녀야 되는데, 산책해야 되는데,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내가 운동을 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이렇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문제는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심각한 영적인 질병이라고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으니까, 내가 마음이 뜨거워졌으니까 됐다가 아니라,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걸 실천으로 옮겨야 되거든요. 그런데 옮기지 않고 마음만 뜨거워지고, 그냥 마음속에서만 뜨겁게 생각하고, 그리고 식어져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괜찮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영적인 질병이요, 영적인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그런 영국의 문필가가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소설을 쓴, 판타지 소설을 쓴 작가가 바로 C.S. 루이스라고 하는 그 작가인데요. 그 작가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스크루테이프라고 하는 편지는 어떤 편지냐면, 사탄들끼리 서로 의논하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인지를, 사탄끼리 논하고 있는 이야기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고 하는 책입니다. (한번 보여주세요.)

거기서 사탄이 사탄 조카 사탄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제 이 재난의 수습 대책을 모색하는 일이 남았구나.” 여기서 말하는 재난이 무슨 재난일까요? 성도가 은혜를 받은 거예요. 회개하기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탄 쪽에서 보면 이게 재난이죠. “이제 이 재난의 수습 대책을 모색하는 일이 남았구나.”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건 환자가 어떠한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는 일이다.” 환자라고 하는 것은 성도를 가리키는 말이죠. “이 새로운 회개에 대해 아무리 많이 생각을 한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그 하찮은 짐승이 자기 머릿속에서만 뒹굴게 하거라. 글재주가 눈곱만치라도 있거든, 이 경험에 대해서 책을 쓰게 하고, 글쓰기는 말이야, 원수가 영혼에 심은 씨앗을 말려 죽이는데, 종종 탁월한 효과가 있는 거야. 이 같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그것이 의지로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전혀 없다.” 사탄 입장에서 해로울 게 없다는 거죠. 다시 말하자면 영적으로 우리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인간이 말했듯이,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악화되는 법이거든.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아주 탁월한 통찰력이 있는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 그러면 우리는 다 됐다고 생각을 해요. 하지만 사탄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겁니다. “감동 받아봐라.” “은혜 받아봐라.” “아, 좋은 생각해봐라.” 하나도 두렵지 않다는 거예요. 왜?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그것은 우리를 말라 죽이는 것이고, 그렇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은혜받는 것,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회개, 이러한 것들은 결국 그 사람을 고사시키는 것이고, 영적으로 말라죽게 만드는 것이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아주 정말 도전이 되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특별히 우리 설교자들에게는, 정말 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메시지예요. 왜냐하면 설교를 할 때 종종 어떤 분들은 은혜를 받아요. 설교를 할 때 어떤 분들은 감동을 받고, 그리고 결단하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아, 설교를 잘했나 보구나.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니까 이제 됐다”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죠.

하지만 무엇인가? 그렇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고, 사탄이 꿈쩍도 하지 않을, 정말 아무것도 아닌 헛된 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바로 그 상황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린도 교회 내에서 엄청난 반응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줍시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게 됐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수많은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가 감동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가 어려운 교회거든요. 힘든 교회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와주겠다고 하는 그런 선한 모습들을 보여줄 때, 마게도냐 교회는 너무나도 감동을 받아서, “야, 우리도 함께 동참하자. 우리도 함께하자”라고 하면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그런 고린도 교회가 정작 아무런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게 어쩌면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의 따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정확하게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놓고,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이죠. 하나도 따르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그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라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은혜받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으로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감동을 받는 것으로 충만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삶을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에 의하면 무슨 말씀을 합니까? “행함이 없는 것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때문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었고, 여러분 때문에 선한 영향력이 펼쳐지게 되었는데, 이제 여러분들이 원래 결심했던 그 결심을 이제 이루십시오. 이제 하십시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쩌면 바울 사도가 꼼수를 쓰는 것 같아요. 이중 플레이를 하는 것 같아요. 왜 그렇습니까? 마게도냐 교회를 향해 가서 말하기는, “저 고린도 교회를 보세요.” “고린도 교회가 이런 열정을 내고 있어요”라고 말해서 마게도냐 교인들의 신앙을 북돋우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해요? 다시 고린도 교회에 가서 하는 말이, “마게도냐 교인들은 이렇게 반응을 보였는데, 당신들도 하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꼼수입니까? 꼼수가 아닙니까? 이중 플레이입니까? 이중 플레이가 아닙니까? 어쩌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개인적인 착복을 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사기를 저지르고 탐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모습은 이중 플레이오 꼼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부모님의 모습과 같아요. 부모님의 마음은 무엇이죠? 여러 자녀들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도 잘 됐으면 좋겠고, 이 아이도 잘 됐으면 좋겠고, 이 아이도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게,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이 아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아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얘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도 좀 열심히 해라.” 말하고, 얘가 열심히 하는 걸 가지고 이 사람에게 이야기하면서, 너도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부부 사이를 화해시키는 상담자의 역할과 같아요. “아내가 당신 사랑한대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대요.” 양쪽으로 가서 서로 이야기하고, 그래서 화해시키려고 하는 그런 상담가와 같이, 바울 사도는 지금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권면하기 위해서, 마게도냐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또 마게도냐 교회를 가서는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그 믿음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요. 감사한 것은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고, 마게도냐 교회도 마찬가지고, 바울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거 꼼수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런 선한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26절 말씀에 보면 마게도냐 교회 대해서 쓰고 있는데요.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아가야 사람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말합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습니다.”. 양쪽 교회가 다 헌금을 하게 된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 선한 일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비아냥거리고, 그리고 딴지 거는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선한 믿음을 본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열정이 우리 가운데 불릴 듯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성경을 읽는다고 한다면 나도 성경을 읽어야 되겠다. 누가 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한다면 나도 전도를 좀 해야 되겠다. 누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한다면 나도 기도를 해야 되겠다. 누가 정말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 같으면 나도 예배에 열심히 참여했으면 좋겠다. 누가 성가대 한다고 하면 나도 성가대를 하고 싶다. 이런 선한 열정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고, 그리고 서로 영향을 주어서 우리 온 성도들이 함께 믿음으로 성장해 나가고, 한 단계 한 단계 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 헌금하는 일을 독려하기 위해서 먼저 디도를 보냈습니다. 디도와 함께 다른 형제들을 고린도 교회로 파송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디도를 보낸 이유를 5절 말씀 가운데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5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하는 모습을 보면 바울 사도의 강조점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7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헌금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자선을 베풀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선한 일을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못해 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 말고, 정말 자발적으로 해라”라고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데, 정작 바울 사도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자발적으로 하도록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습니까?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어떻게 강조하고 있어요? 디도를 보내고, 형제들을 보내고, 편지를 쓰면서, “열심히 준비하십시오. 미리미리 준비하십시오.” 하고 자꾸 권면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억지로 하지 말라. 헌금을 하든, 뭘 하든, 선한 일을 하든, 뭘 하든, 억지로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으면서, 정작 바울 사도는 권면을 하고, 자꾸만 하라고 이렇게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좀 모순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이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자발적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한다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이고, 권면은 필요한 거예요. 권면이 필요한 거예요.

저는 목회를 해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강요하거나, 막 억지로 끌고 가거나, 그렇게 목회를 해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알고 계십니까? 그랬어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그렇게 강요하거나, 막 이렇게 막 억지로 끌고 가거나 하지 않고, 우리 성도님들이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기를 늘 기다려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종종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 말은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잘하든 말든 그냥 아무런 상관하지 않고 놔둬도 괜찮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죠.

오늘 바울 사도도 정확하게 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너희들이 헌금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다시는 말 안 할게.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알아서 하든지 말든지 그냥 두고만 볼게”라고 말하신 것이 아니에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한 말을 생각나게 했어요. 여러분들이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디도를 보내면서 격려하고 있어요. 미리미리 준비하시오. 그래서 정말 이 선한 일에 여러분들이 동참하시오. 격려하고 권면하고 있어요.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죄성이 많아서, 가만 내버려 두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태해지기 쉽고, 가만 내버려 두면 우리는 늘 탐욕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서로 권면하고 서로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서로서로 권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사님,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집사님, 우리 성경 같이 읽읍시다. 집사님, 예배 열심히 참석합시다. 그렇게 자꾸 빠지지 말고 함께 합시다. 서로서로 권면해야 되는 거예요. 믿습니까? 한번 말 한번 해봅시다. 우리 옆에 사람 쳐 쳐다보고, “열심히 신앙생활합시다.” 열심히 하는 분들한테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잘 안 보이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나오든 말든 아무 상관하지 않는 다가 아니라, 신앙생활에 좀 나태해지는 것 같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서로 권면해야 되는 거예요.

바울 사도는 지금 디도를 보내서 권면하는 겁니다. 8장 9장을 통해서 권면하는 겁니다.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쩌면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편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돈에 관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선한 일을 독려하고 권면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우리 성도가 함께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서로 격려해서 선한 일을 도모하게 만들고, 믿음의 길로 가게 만들고, 그냥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질수록, 같이 신앙의 일을 격려할 수 있도록 불러주신 것이 우리 교회로 하나로 묶어주신 것이고, 우리가 성도됨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는데, 세례를 받은 이유는 우리가 함께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믿음의 길을 함께 가자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이제는 가족이 되었으니, 영적인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손 잡아주고 넘어질 것 같으면, 이렇게 세워주면서 함께 믿음의 길을 같이 걸어가자 하라고 하는 그런 권면의 의미가 있는데, 원하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서로가 서로를 권면하는 가운데 함께 믿음의 길이 세워져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근데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하셨던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가고, 우리가 망하게 되었을 때, 저 높고 높은 하늘 가운데서 그냥 “열심히 하나, 안 하나, 보자” 하고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 주님께서는 그냥 너희들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나에게 찾아오면, “그때 내가 가겠다”라고, 그냥 하늘 위에서만 계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망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피와 땀을 다 흘리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의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토요일날 우리나라는 정말 엄청난 참사를 겪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젊은 아이들이 각 가정의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는 그런 참사를 겪게 된 것이죠.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인데 그 가운데서 있었던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참 마음의 감동을 주는 것이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20대 여성이 있었는데요. 그 쓰러지는 넘어지는 그 한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한 가운데 있었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겨우 구조를 받아서 파출소로 가게 됐는데요. 그 아무튼 그쪽으로 가게 됐는데, 그 여성 20대 여성이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거예요. “아빠 지금 옆에 사람들 다 죽어 나가고, 나도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화 통화가 제대로 잘 안 돼서, 문자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아빠 무서워. 아빠 살려줘”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문자를 받은 아버지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성남에 살던 62세의 아버지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걸 보니까 굉장히 늦게 낳은 그 딸아이 같아요. 62세 아버지가 자기 딸의 그 이야기를 듣고 쏜살같이 이태원으로 달려간 거예요. 택시를 타고 달려간 거예요. 택시를 타고 달려갔는데 택시가 그 안까지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딸이 있는 그 파출소까지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택시에서 내려가지고, 그 62세 아버지가 1.5킬로를 뛴 거예요. 1.5km를 뛰어서 자기 딸에게 가서 보니까, 아주 딸아이의 상태가 심각해요. 그래서 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 경찰들은 이 아이보다 더 힘든 사람들 죽은 사람들 처리하느라고, 순서 기다리려면 몇 시간이 기다려도 순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한 일이 무엇이냐면, 그 딸아이를 업고, 또 1kg를 뛰어가는 거예요. 업고서 1kg를 또 뛰어서,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택시를 잡을 수도 없어요. 택시를 잡을 수도 없어서, 한참 뛰어나가다가, 결국 지나가는 차를 붙들어서 타게 되었는데, 30세의 젊은 남녀가 다행히도 태워주고, 병원까지도 데려다주고, 그런데 그 병원에서도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치료를 못하니까, 다시 분당 차병원에까지 그냥 무료로 태워준 그런 착한 남성이 부부가 30대 부부가 있었다고 하면서 인터넷에 올린 이야기를 보게 됐습니다.

이 아버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거예요. 아이의 그 상태를 듣게 됐을 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뛰어가는 거예요. 1.5 킬로, 1킬로를 업고 뛰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일이에요. 우리가 망가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는 그 일을 하신 것이고,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되었을 때, 그냥 “너희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나에게 오나 보자”라고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보자 위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또한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질 때, 그리고 믿음의 길을 주저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서만 생각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 “우리 함께 가자” “함께 가자”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면서, 믿음의 공동체로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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