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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5강 – 성경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 명시적 부분에 비추어보라.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분하라.

10. 성경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

오늘은 성경이라고 하는 거울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된다라고 하는 주제를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성경 자체만을 바라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마치 거울과 같은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거울의 용도는 무엇이죠? 그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고, 그래서 우리의 모습이 괜찮은지, 치장을 해야 될 게 있는 것인지, 고칠 게 없는 것인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볼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거울에 비춰 보아야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를 잘 모르는데, 성경을 비추어 보게 되면, 우리 자신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고, 성경만을 연구한다고 하면, 거울이 이게 어느 나라 제품인지, 거울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울만 보고 그 거울 속에 비추어진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성경의 그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이 되겠죠.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 자체만이 목적이 아니라, 거울과 같아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것을 깨닫기를 원하시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볼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먼저 주의할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데 있습니다. 성경 속에 있는 내용들은 1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신 말씀일까요? 그 당시 그 순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죠.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해 주셨으니까, 이 말씀을 들어야 될 사람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 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성경을 읽으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집을 나가면 되나요? 나가면 됩니까? 성경을 읽고? 아니죠.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지, 우리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신 말씀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겐 아무 의미가 없느냐? 아니죠. 성경이 쓰인 것은 왜 쓰였는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쓰인 것이고,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서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준 메시지이기는 하지만, 그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 그런 것들을 분별해가지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냥 아브라함에게 얘기했구나. “그러면 나랑 상관이 없는 얘기네.” 하고, 그냥 흘려 지나가버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지난번에 강의를 하면서 구약에 있는 말씀들 가운데서 의식법이라든가 시민법은 이제 더 이상 우리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이제 구약 성경 같은 건 뭐 하려고 읽을까? 안 읽어야 되겠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농담으로 그렇게 하셨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1차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닌 게 아닌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게 만드셨고, 또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이유는, 이걸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될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따라서 그 메시지를 우리가 발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고 한다면, 그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1차적인 의미가 아니라, 2차적인 의미로, 그리고 파생적인 의미로 영적인 의미들을 우리가 발견해 나가야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우리가 읽게 된다고 한다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줬단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그 메시지가 뭐예요?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되, 어떻게까지 사랑해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그 대상이 어떻게 돼야 된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림이 있습니까?) 예 강도 만난 자가 있는데, 그 강도 만난 자는 유태인이에요. 그런데 그 유태인을 누가 도와줬는가?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준 거죠. 사마리아 사람과 유태인은 어떤 관계냐 아주 철천지 원수입니다. 정말 상종을 안 하는 인간들이에요. 정말 미워하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싫어하는 사람들인데, 그 관계인데 놀랍게도 그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그런 선한 일을 해준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우리들에게도 그러면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 누구냐? 누구를 사랑해야 돼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 된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우리가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 우리가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 우리가 제가 주일 학교 다니면서는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까지 사랑하셨다. 그렇게 말씀하면서, 공산당은 무찌르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헷갈렸어요. 도대체, 원수를 사랑해야 되는데, 공산당은 무찔러야 되나? 다른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해야 된다. 왜 사랑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의 원수들을 우리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까지라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이란 거울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 겁니다. 남의 이야기로 듣는 것이 아니라, 2천 년 전, 혹은 3천 년 전의 이야기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그 거울에 비추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그런 모습을 보아야 되는 것이죠.

11. 명시적인 말씀에 비추어보라

두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명시적인 것에 비추어서 명시적이지 않는 것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 부분이 있고, 그리고 하나의 명제처럼 되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명제처럼 되어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들이죠? 하나님만 섬겨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런 명령들은 다 명제적인 명제 같은 것들이죠. 하지만 이야기체로 된 부분도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야곱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사사들의 이야기, 기드온의 이야기, 드보라의 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 것들을 읽을 때에는, 우리가 항상 어디에 비추어 보아서 판단해야 됩니까? 명시적인 것 명제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내가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을 두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여럿 있었단 말입니다. 사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갈도 취했고, 또 이삭도 또 야곱도 여러 아내를 두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족장들이 이렇게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는 다윗도, 아내를 여러 명 두었으니까, 우리도 아내를 여러 명 둬도 괜찮은 거죠? 놀랍게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이단 종파를 보면 성경에 보면, 일부다처제가 성경에 다 되어 있는데, 우리도 일부다처제를 하는 게 좋다. 그러면서 일부 다체제를 시행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죠.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우리들에게 모범으로 제시된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다윗도, 다윗도 우리가 100% 따라 해야 될 모범생입니까? 모범생이 아닙니까? 모범생이 아니에요. 다윗이 행한 것이 다 맞느냐? 아니요. 다윗이 행한 것이 다 맞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잘못한 것들도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우리가 무엇으로 판단해야 되는가?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그래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이야기들을 평가해 봐야 되는 거죠.

그렇게 평가해 보아서, 우리가 판단을 해야 되는데, 예를 들자면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사가 있습니다.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사가 하나님께서 전쟁하러 나가라고 했더니, 그랬더니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어떻게 보여줍니까? 양털을 통해서 이것만 젖고 저것은 젖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두 번씩 시험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자고 하는 그런 증거를 얻기를 원했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기드온처럼 하면 되죠? 돼요? 안 돼요? 성경 말씀에 다른 부분을 가지고서 평가해 봐야 된다. 기드온이 사사였기 때문에, 기드온의 행동이 다 정당화되는 게 아닌 겁니다.

또한 삼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또 입다라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입다는 어떻게 했어요?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전쟁하러 나가는데,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고 해가지고, 자기 딸을 번제로 불태워 제사를 드렸어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나요? 번제를 드린 것은 잘한 일인가요? 잘못한 일인가요? 서원을 지킨 거 보면 잘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명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서원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맞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러나 사람을 죽여서 번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분석해볼 때, 이게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행동이라고 해서 다 괜찮은 사람들이고, 우리가 다 본받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항상 명시적인 부분에 의해서,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사울은 제비뽑기를 해서 이 죄가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자 해가지고, 제비 뽑아서 요나단이 범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냈어요. 우리도 제비뽑기를 하면 될까요? 그러면 그래서 이런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 부분, 다른 많은 부분들을 우리가 그냥 성경에 있으니까, 무조건 그대로 우리가 따라야 하거나, 그냥 옳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명시적인 부분에서는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꿈을 통해서 앞길을 인도해 주시기도 했으니까, 지금도 우리가 꿈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을까요? 옛날에 모세는 지팡이를 이용해서 바다를 갈랐으니까, 우리도 지팡이를 가지고 어떻게 한번 휘둘러 볼까요? 아니면 여리고성을 7번 돌았으니까, 우리도 얻고 싶은 거 있으면 한 번 돌면 될까요? 또 바울의 손수건을 통해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니까, 손수건을 사용해도 될까요?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그대로 따라 할 것은 아니다.

특별히 심지어 좋은 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무조건 다 따라서 할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이런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고, 그리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는 게 그게 바람직한 거죠? 네?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독처하는 게 좋지 못하다는 거예요. 결혼하는 게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창조 규례인 것이죠. 따라서 그냥 어떤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했으니까, 바울 사도가 이렇게 행동했으니까, 그냥 무조건 따라서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서,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바른 하나님께서 원하신가를 일일이 일일이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12.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분하라

세 번째로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우리가 비유를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석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는 비유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비유를 많이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실 정도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는데,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면서 비유를 사용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르치고자 하는 그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나요? 안 보여요. 하나님을 만질 수 있나요? 만져지지 않아요. 우리가 경험할 수 없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는지도 않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설명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것에 빗대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좋은 겁니다. 그래서 비의 비유가 꼭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설명할 내용이 어렵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설명하면 쉬워요?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하면 이해가 되는 거죠.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다 하면,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비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영적인 진리가 어렵기 때문에, 이 비유를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요.

그런데 비유가 장점이 있지만 비유의 단점이 있습니다. 단점이 뭐가 있을까요? 비유의 단점? 첫 번째 단점은 아무리 뛰어난 비유도 실제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렇죠? 예를 들어서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한들, 원숭이가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원숭이나 사람이나 비슷하다고 해서, 사람을 원숭이에 빗대어서 설명하면, 설명이 제대로 되느냐 하면, 설명이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비유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비유라고 할지라도, 실제보다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게 비유라는 그런 단점이 있는 거죠.

두 번째 단점이 있는데 비유는 의도하지 않는 것까지 전달할 위험이 있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그렇게 비유할 때,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목자라고 했겠어요?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마치 목자가 양들을 돌보듯이, 그렇게 돌보시는 하나님, 또 양들을 푸른 풀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 우리에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공급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점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설명하는 거죠.

근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설명하면 사람들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 그러면 목자는 나중에 양을 잡아먹는데, “하나님도 우리 잡아먹겠네?”라고 오해하게 되는 거죠. 근데 그것을 전달하려고 한 건 아닌데, 목자라고 하는 그 이미지 속에는,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유사점도 있지만,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는 차이점들도 이 목자라고 하는 비유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비유를 사용해서 영적인 진리를 가르칠 때의 단점이 무엇이냐면, 의도하지 않았던 것까지 전달이 되게 되는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해석할 때는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우리가 항상 던져야 될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비유했을까?”를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해요.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 했을 때, 목자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목자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란 말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 비유를 사용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하고 있을까를 항상 질문을 던져야 되는 것이죠.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열심히 하면서,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에요. 얼마나 열정적으로 감동 있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여학생이 “나, 그런 하나님을 안 믿어” 하면서 나가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에 대한 나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그 여학생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 원래 이 아버지라고 하는 비유를 말하려고 할 때는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표현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비유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걸 나타내기보다는, 포악하고 아주 말도 통하지 않고, 나에게 나쁜 짓을 하는 그런 포악한 아버지의 이미지도 같이 전달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비유라고 하는 것이 단점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유사점이 무엇이고, 그리고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항상 분별해내야 됩니다. 유사점이 무엇일까? 차이점이 무엇일까를 항상 질문을 던져야 되는 것이죠.

비유가 있어요. 비유의 abddf라고 하는 속성들이 있는데 그 비유가 나타나는 실제가, Agkm 이런 게 있어요. 그러면 이 가운데서 서로 유사점을 갖는 것은 빨간 거 하나만 유사점이에요. 그렇죠? 빨간 거 하나만 유사점이에요. 나머지는 다 차이점이에요. 대조점이에요. 목자라고 한다면 목자의 사랑하고 돌본다고 하는 그 점은 하나님과 유사점이지만, 목자가 잡아먹는다든지, 때로는 목자가 신경을 잘 못 써서 그래서 이리들에게 양을 빼앗겨 버린다든지,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는 차이점이지 유사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던질 때는 어떤 의미에서 유사성을 갖는가? 어떤 의미에서 이 비유를 사용했는가를 항상 질문을 던져봐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유사점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면, 첫 번째는 문맥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어떤 문맥에서 사용됐는가? 그 문맥을 살펴보면 “이것은 어떠한 점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고, 두 번째는 전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유사점을 찾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목자처럼 목자는 양을 이렇게 돌보다가 피곤하면 옆에 누워서 자는데, 그러니까 하나님도 주무시다가, 주무시다가 양들을 돌보지 못할 때도 있는 거 아니야? 하나님도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왜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사람 목자와 하나님이신 목자 사이에는 그건 유사점이 아니라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유사점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첫 번째는 문맥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우리가 살펴볼 때,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먼저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보죠) 재판장과 과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사점이 있습니다. 어떤 유사점이 있어요? 재판장이 과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재판장을 닮았습니다. 과부가 재판장 앞에 나아가 간청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청해야 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재판장을 닮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재판장과 하나님 사이의 차이점도 있습니다. 어떤 점이 차이점입니까? 재판장은 과부를 귀찮아해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귀찮아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다가가는 것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인가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내게 부르짖으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기도하면 내가 너희에게 듣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죠. 또한 재판장은 어떤 재판장입니까? 한두 마디 하면, 말을 안 들어요. 과부가 어떻게 하니까, 겨우 들었어요? 자꾸 찾아가서 끈질기게 조르고, 끈질기게 따지고, 끈질기게 간청하니까, 그때서야 겨우 가서 데모하고, 소리 지르고, 울고불고 그러니까 겨우, 재판장이 그때서야 겨우 들어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한 번 기도하면 안 듣는 하나님이에요? 아니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이미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건가를 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점에서 차이점이죠. 재판장은 어떻게 과부의 간청을 듣습니까? 그것은 과부를 사랑하기 때문에 과부의 간청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과부의 간청을 들어준 이유가 뭐예요? 빨리 들어주어서, 더 이상 오지 말게 만들어야 되겠다. 빨리 떨쳐버려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과부의 간청을 들어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세요? 귀찮아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시죠. 과부가 끈질기게 매달렸을 때 겨우 응답을 하시지만, 했지만, 재판장은,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빨리 응답하시는 하나님, 천천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빨리 응답하시는 하나님. 과부와 재판장 사이는 어떤 관계예요? 남남이에요. 아무런 혈연 관계도 없고,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그저 남일 뿐이고, 그냥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재판장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세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아버지인 것이죠. 그래서 재판장은 남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해석에 있어서 종종 오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언제 이루어지냐면, 차이점을 유사점으로 착각할 때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재판장도 가서 끈질기게 메어 달려야만 겨우 응답해 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가서 끈질기게 매달려야만,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겨우 들어줄까 말까 하다”라고 결론을 내리시면 됩니까? 안 됩니까? 하나님 그런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무심한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나쁜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내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시고 계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 거죠.

그러면 왜 낙심하지 말아야 되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왜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1번, 과부처럼 끈질기게 메어 달리면, 언제 언제든 결국 하나님도 재판장처럼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수 있으니까, 낙심하지 않는다. 2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응답을 해주든 응답을 해주지 않든, 그것은 하나님이 안 들으셔서 관심이 없어서 안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더 크고 더 좋은 길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이에요.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는 과부가 끈질기게 메어 달려서 결국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끈질기게 매달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끈질기게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나요? 들어주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느냐에 따라 다른 겁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안 들어주셔요.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을 기도하면, 정욕으로 구하거나,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안 들어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라고 요구한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으로 훨씬 더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언젠가는 우리가 끈질기게 메어 달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의 그런 모습과 똑같은 것이죠. 우리 아이들은 저에게 다가와서 요구를 했어요. “아빠, 우리도 강아지 기르자. 우리도 고양이 기르자.” 얼마나 애원했는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우리 아파트는 애완견을 기를 수가 없는 아파트였기 때문에 “안 돼” 그랬어요. 그러면 우리 아이가 “아빠, 미워” 하면서, 가서 막 펑펑 울었어요. 근데 그 아이가 그다음 날부터 저를 아빠로 인정 안 하고, 아빠는 내 말 하나도 안 들으니까, “아빠는 우리, 우리 아빠 아니야” 하면서, 인정 안 하고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그다음 날에는 또 제게 다가와서 “아빠, 이거 해줘. 아빠 저거 해줘.” 이야기를 했어요. 응답해주지 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의 기도 간청에 예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바로 아빠 엄마가 자기들을 제일 사랑한다고 하는 그 확신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낙망하지 않고, 그 아빠 엄마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쟁취해낼 수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시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 비유를 유사점이 아닌 차이점마저도, 저 재판장 나쁜 재판관의 모습마저도 하나님의 모습인양 그렇게 잘못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한번 살펴보면은요. (알곡과 가라지의 그림도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밭의 주인과 하나님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나요? 밭의 주인이 자기 밭에 대한 처분권을 가지고 있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고, 이 세상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은 밭의 주인과 닮아있습니다. 밭의 주인은 추수의 주인이고, 하나님은 심판의 주인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닮았습니다. 그리고 밭의 주인은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울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각각 그들에게 마땅한 처분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그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밭의 주인은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차이점은 어떤 차이점일까요? 밭의 주인은 잠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려놓고 가버렸습니다. 자기 밭을 방어할 수가 없는 것이죠. 원수가 와서 활개를 쳐도 속수무책인 주인이 밭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도 사탄이 판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사탄의 권세마저도 그 아래에 두고 있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 세상의 밭의 주인과는 다른 모습인 거죠. 밭의 주인은 이야기합니다. “가만 내버려 둬라.” 알곡을 뽑다가,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다칠지 모르니까, 알곡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도 악인을 제거하다가 선인이 다칠까 봐, 악인을 제거 못하시는 하나님일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지금 당장 악인들을 없애버리고, 선인들만 남겨놓으라고 한다면, 그렇게 충분히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 당장 선인과 악인 한 치도 털끝 하나 선인들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악인들을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밭의 주인은 그럴 방법이 없어서, 그냥 방치해 두는 거예요. 왜 가라지가 있는데도 가라지를 제거 안 합니까? 가라지 제거하면서 알곡을 다치게 할 방법이 없어서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그냥 방치해 두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죄인을 방치해 두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 방치해 두는 건가요? 아니요. 무능해서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회를 여전히 주시는 것이죠.

밭의 경우에는 가라지가 변해서 알곡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알곡은 처음부터 알곡이고, 가라지는 처음부터 가라지입니다. 가라지가 변해서 나중에 알곡이 되든가, 알곡이 변에서 가라지가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가요? 사람은 언제든지 회개가 가능합니다. 악인이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겁니다. 삭개오와 같은 세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하는 것이고,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정도로 그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게 사람인 것이죠.

그런데 종종 어떤 해석자들은 엉터리 해석을 하는 겁니다. 차이점마저도 유사점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거 봐라. 알곡은 알곡이고, 가라지는 가라지지,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하는 거 봤냐? 그러니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거야. 사람은 변할 수 없어. 처음부터 참된 신자고, 처음부터 가짜 성도고, 처음부터 진짜고, 처음부터 가짜니까, 이건 변화되는 게 아니야”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시면은 안 되는 겁니다. 차이점마저도 유사점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특별히 성경에 보면 비유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데 그 비유들을 보면서, 이 비유를 사용한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의도에서 이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시다 하는 얘기는 그 밑에 들어가면 아무리 화살이 날아들어도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반석한테 말해봤자 반석이 말귀를 알아듣겠나? “하나님도 못 알아들으시지”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에 보면 결국은 영적인 진리,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영적인 모습들에 대해서 모든 것들을 다 이런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고 계시는데, 이 비유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를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참 생긴 모습이 탤런트 같으십니다. 연예인 같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연예인도 연예인 나름이에요. 멋진 멋지게 생긴 연예인도 있지만, 못생겨서 유명한 이주일 같은 연예인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도대체 이 비유가 어떤 비유인지, 그것을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이 비교점을 잘 찾아야 되는데, 유사점을 찾아야 되고, 차이점을 찾아야 되는데, 그 차이점 유사점을 어떻게 찾는가? 문맥을 보면서 찾아가야 되는 겁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그 문맥. 더군다나 더 큰 것은 무엇이냐면, 전체적인 하나님의 그 교훈에 비추어 봤을 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이 비유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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