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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학 강좌 제7강 – 생략된 표현, 히브리 평행법, 헨디아디스, 실천적 지혜인 잠언

17. 생략된 표현이 있는지 살펴보라

오늘은 성경 해석학 강자 일곱 번째 시간이 됐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또 네 가지 주제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략되어 있는 표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언어에서는 생략법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 언어는 언어에도 생략이 물론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우리나라 언어는 생략하기보다는, 다 표현해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언어가 우리나라 언어입니다. 하지만 영어라든지, 불란서어, 독일어, 그리고 성경의 헬라어, 히브리어와 같은 언어들은 생략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자주 일어나고 있고, 많이 사용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원어의 특징을 우리가 이해해야,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영어의 예를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Are you happy?”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러면 “Are you happy?”라고 하는 질문은 무슨 뜻이죠?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십니까? 대단합니다. 역시.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Are you happy?”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물었을 때, 대답할 때, 뭐라고 대답하냐면, “Yes, I am.” 그럽니다. “Yes, I am” 그렇게 대답하면, 그 “Yes, I am”이라고 하는 것을 직역하면, “네, 나는 입니다.” “네, 나는 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번역하면, 안 됩니다. 뭐라고 번역을 해야 되죠? “네, 저는 행복합니다”라고 번역을 해주어야 합니다. “Yes, I am happy” 해피라고 하는 말을 표현하지 않고, “Yes, I am”까지만 해도, 번역할 때, 어떻게 번역을 해줘야 돼요? “네, 저는 행복합니다”라고 번역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죠. 또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다면, 생략을 살려서 번역한다면, “네, 그렇습니다”라고 번역해 줄 수가 있겠죠.

아무튼 영어 문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당신이 행복합니까?” “Are you happy?”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면, “Yes, I am happy”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한테 다 물어보세요. “Are you happy?” 그러면 미국 사람이 “Yes, I am happy”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뭐라고 대답하냐면, “Yes, I am”하고 끝이에요. “Yes, I am happy?”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happy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까요? 왜 사용하지 않느냐면, 정황상, 정황상 “I am”이라고만 해도, 행복하다고 하는 대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happy라고 하는 말을 생략해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아람어 세 가지 언어로 되어 있는데요. 이 세 가지 언어에서도, 생략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다.” “I am” “I am Christ”라고 대답하지 않고 “I am” 그럽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I am.” 그러면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대답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의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을 읽을 텐데요. 혹시 생략이 되어 있어서, “번역상 빼먹은 부분은 없지는 않을까?”라고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근데 이것은 좀 어려운 작업이지 않겠습니까? 웬만하면 좀 원어를 우리가 실제로 본다면, “아, 이게 생략이 됐구나. 생략이 안 됐구나.” 하면서 알 수가 있을 텐데, 한국말로 번역된 성경만을 읽으면서, 이러한 것을 알아차리기는 좀 어려운 감이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 생략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서, 생략된 채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충해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일반인들은 생략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거의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어에서 “Are you happy? Yes, I am.”이라고 영어 원어가, 원문이 있다고 한다면, 그 원문을 한국말로 번역할 때,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네,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다. 이 말이에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히브리어 원어 아람어 원어 헬라어 원어가 있는데, 거기에 생략이 돼 있으면, 생략되지 않고 그 원어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번역을 해줬기 때문에, 생략 문제로 우리가 고민할 필요는 거의 없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하지만, 어떤 성경 구절은 생략이 되어 있는데도, 생략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생략이 된 그 부분을 보충해서 번역을 해주는 게 맞는데, 번역자들이 그렇게 보충해서 번역을 안 해주는 바람에, 그래서 우리가 오해하기 쉽도록 번역된 성경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혼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장하시기를,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심판하지 않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전혀 판단을 안 하시는 분입니까?”라고 하는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아무도 정말로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분이십니까? 판단하시는 분이십니까? 에? 좀 크게 얘기해 주세요. 판단하셔요! 예수님은 심판주 하나님 아니십니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날에 판단하실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판단하시는 하나님인데, 요한복음 8장 15절에서는 말하기를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겠다.”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있어서 혼란스러운 겁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만 심판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는 도중에 판단하셨어요? 판단하지 않으셨어요? 판단했어요! 누구에 대해서 판단했습니까?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서 “화 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셨어요. 가난한 과부가 엽전 두 닢을 성전에 집어넣는, 헌금함에 집어넣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집어넣었나 보다, 그런가 보다 하고, 가만히 보고만 계셨습니까? 아니요! 이 여인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 생활비 전부를 넣은 여인이라고 칭찬하시며 판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판단을 아무것도 안 하시냐? NO. 판단 많이 하셨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복음 8장 15절에서 말하는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만 알려줘도 10을 알아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는 않겠다는 거예요. 보이는 모습으로, 겉모습으로,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이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육체를 따라”라고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을까요? 생략 어법입니다. 생략 기법,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에서 영어에서 독일어에서 불란서어에서 사용하고 있는 생략 기법에 따라, “육체를 따라”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지만,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지, 전혀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렇게 아시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생략법을 모르시는 분들이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 안 한 대”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판단하시는 모습이 널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 쓰여져 있는데, 성경에 수많은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을 오해해서,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 예수님이야”라고 설명해버리면, 엉터리 해석이 되는 겁니다.

자 생략이 육체를 따라라고 하는 말만 생략된 것이 아니고, (다시 한 번한번 요한복음 8장 15절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그 앞에 그 앞부분에는 무슨 말이 생략이 되어 있을까요?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에서 생략된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생략되었을까요? 너희는 “사람들을”이라고 하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는 거죠. 너희는 사람들을, 너희는 모두를, 너희는 아무나 다 육체를 따라 판단하고 있지만, “나는 아무도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겠다”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생략법이, 이렇게 평행으로 되어 있을 때에, 앞에 이쪽 하나가 생략이 되고, 뒤에서는 이게 생략이 되고, 생략이 되지만, 그 앞뒤 문장을 같이 연결해 보면, 앞에는 너희는 “사람들을”이라고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고, 뒤에는 아무도 “육체를 따라”라고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성경 가운데 혹시 이해가 안 되는 구절들이 있다고 한다면, “혹시 이런 식으로 생략된 게 없을까?” 한 번쯤 질문을 해보셔야 한다 이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8절, 11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 보면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남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은 없는데, 여성들에 대해서 특별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도 이것처럼 정숙해야 된다, 모함하지 않아야 된다, 절제해야 된다,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된다”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데, 도대체 왜 여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자격 조건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8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8절에서 뭐라고 설명하고 있냐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 여기서 말하는 집사는 남자 집사겠습니까? 여자 집사겠습니까? 남자 집사입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남성형, 여성형, 중성형, 세 가지 성이 있는데, 여기서 집사들 또 할 때는 남성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자 집사들에 대해서, 그 자격 조건을 열거하고 있는 겁니다. 남자 집사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정중해야 되고, 일구이언해서는 안 되고, 술에 임박이지 않아야 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아야 되고, 등등 남자 집사를 세울 때 남자 집사의 자격 조건에 대해서 8절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11절은 뭘까요? 여자 “집사”들에 대한 규정입니다. 앞에 “집사”라고 하는 말이 있기 때문에, 11절에서 집사라고 하는 표현이 생략된 거예요. 그러니까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감독들에 대한 규정을 얘기하고 있고, 8절서부터는 남자 집사에 대한 규정을 이야기하고 있고, 갑자기 11절에 가서 뜬금없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여성이 누구예요? 이해하기가 좀 어렵죠. 그것은 왜 어려운가? 생략 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생략 기법을 아신다고 한다면, 8절에는 남자 집사들의 자격들에 대해서 쓰고 있는 반면에, 11절에서는 여자 집사들도, 집사들도 “디아코노스” “집사라고 하는 말이 생략되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고서 해석해줘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번역하는 사람이 생략되었다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이 본문에 반영하지 않고, 그냥 번역해 버려서, 마치 여자 집사가 아닌, 일반 여자에 대한 규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계속 보여주세요.) 그런데 번역자가 번역을 잘한 것도 있습니다. –하지 아니하고, “해야 한다” — “해야 한다”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없어요.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해야 한다” 일구이언 하지 아니, “해야 한다”라고 하는 동사가 8절에는 없습니다. 11절에도 없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해야 한다” 모함하지 않아야 된다. “해야 한다”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동사가 역시 11절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3장 1절인가요? 디모데전서 3장 2절에서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는 동사가 “없어야 한다” “해야 한다”라고 하는 동사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고 하는 동사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동사 하나만 거기에 써주고, 8절에서는 그 동사를 생략해 버렸어요. 생략했어도 번역자가 아 2절에 있는 그 “해야 한다”라고 하는 그 동사가 8절에도 생략은 됐지만 있겠지 하고, 번역을 해준 거예요. 11절에도 없지만, 2절에 있으니까, “여기 똑같이 들어가겠지라”고 해서 번역을 해준 거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집사”가 생략된 것에 대해서는, 한국 말로 충분히 반영을 해놓지 않아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성경에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왜? 이미 번역자가 번역을 하면서 “생략됐구나” 그런데 “넣어서, 보충해서 번역하는 게 좋겠구나”라고 번역자가 판단을 해서, 우리 한국말 성경에는 생략을 다 보충해서 번역을 해놓았기 때문에, 생략 어법 때문에 우리 일반 성도님들이 고민할 일은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부 구절들을 보면 생략 어법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기억하시고,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8장 15절 같은 경우는, 누가 물어보면, 아 이렇게 생략 어법 때문에, “이것은 이렇게 된다”라고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이해가 되셨습니까? 다음입니다.

18. 앞뒤에 있는 평행구절에서 의미를 보충하라

다음은 히브리 평행법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 평행법(Hebrew Pallalelism)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같거나, 대조되거나, 발전하는 사상을 병렬시켜서 표현하는 기법을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설교하는 도중에, 히브리 평행법에 대해서 종종 설명을 해주었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시편 23편 2절 말씀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목자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는 거하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거라고 하고, 이 두 개를 병렬시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대부분 이렇게 병렬 표현법들이 많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또 그다음 뭐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렇게 대조, 발전, 같은 사상을 병렬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표현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렀으면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만 해버리면 얼마나 좋아요? 꼭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하냐면, 거기에다 왜 사울을 집어넣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라고 이렇게 병렬시켜서, 표현한다 이말이에요.

그런 표현법들이 많아요. 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 등등 해서, 그것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모든 성경 구절들이 이렇게 병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태의 열매가 뭐죠? 자식들이에요! 자식들이 태의 열매이고, 여호와의 기업이 그의 상급이고, 이렇게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서, 다른 표현으로 병렬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 히브리 성경에 많이 나온다. 히브리 평형법이라고 하는데,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삼손이 퀴즈를 낼 때도, 어떻게 퀴즈를 냅니까?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왔도다 그랬나요? 잠깐 헷갈리는데,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먹는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도다.”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 강한 자에게서 단 것” 이게 보면,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강한 자에게서 먹는 것, 먹는 자에게서 단 것 할 때, 강한 자와 먹는 것이 같은 겁니다. 먹는 자 중에서 강한 자는 누굽니까? 사자죠. 먹을 것 중에서 단 것이 뭡니까? 꿀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삼손의 질문 속에, 이미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생각을 하면, 답이 이미 들어 있는 거예요. 강한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먹는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그러니까 강한 자 중에서 먹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같은 것이고, 먹을 것 중에서 단 것이라고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자, 꿀”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게 이미 어느 정도 그 문제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대답할 때, 강한 자 중에 먹는 거 하면, 사자만 생각할 수 있나요? 뭐, 곰 생각할 수도 있고, 표범 생각할 수도 있고 하니까, 곰이냐? 호랑이냐? 뭐냐 하면서, 하면서, 대답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인데, 블레셋 사람들이 좀 멍청했던 모양이에요. 못 맞춰가지고, 들릴라만 힘들게 만들었는데, 답을 알아난 다음에는 그 블레셋 사람들이 대답을 합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사자에게서 꿀이 나온 거다”라고 대답하나요? 그렇게 대답하면 심심해서 유대인들은 못 삽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됩니까?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어떻게 표현해요?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으며, 무엇이 꿀보다 달겠느냐?” 이렇게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운율을 맞추어서, 표현하는 방식이 히브리 평행법이다 이 말이에요.

이 히브리 평행법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에 있는 많은 어려운 구절들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잠언서 12장 20절의 말씀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도대체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 희락이 있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의논한다” 그냥 화평을, 화평을 논의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요. 바로 그 앞에 행을 보면, 악을 꾀하는 자의 반대 의미로 병렬시켜놓은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러니까 악을 꾀하는 자, 화평을 꾀하는 자, 화평을 추구하는 자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번역하는 사람이 그 히브리 평행법적인 의미를 제대로 잘 살리지 못해서, 아쉽게도 의논하는 자라고 좀 힘이 없게 번역을 해놓았어요. 카운슬(counsel)의 의미에 해당하는 단어가 거기에 들어 있어도, 이게 히브리 평행법적인 의미를 본다고 한다면, 악을 꾀하는 자에게는,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해줘야, 더 멋있는 번역이 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46장 11절 말씀에 보면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사야 46장에서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른다고 했는데, 그 말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독수리를 데려오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까? 아니에요. 여기서 독수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의미하는 겁니다. 독수리처럼, 독수리가 목표를 향해서 공격을 해가지고, 잡아먹듯이, 그런 강력한 파워를 가진 그런 새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그 모략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러오시겠다고 하는 말을 비유적으로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불러오겠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말은 진짜 독수리를 불러오겠다고 하는 말이 아닌 게, 왜 아니에요? 바로 그다음 행에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표현하면,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어떤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줄 거라고 하는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평행법을 알게 되면, 우리가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모르면 위의 행을, 모르면 밑의 행을 보면 되고, 밑의 행을 모르면 위의 행을 봐가지고, 그것이 같은 의미인지, 반대되는 의미인지, 발전하는 의미인지, 그런 걸 봐가지고, 어느 정도 의미를 추측해낼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이야기고,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부활하셨다고 하는 의미인데, 그러니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범죄, 죄 용서를 위한 것이고,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런 각각 다른 역할이 있다고 하는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의 사건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그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일까요? 전자일까요? 후자일까요? 후자죠. “죽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죽음이지만, 부활은 우리를 칭의, 의롭게 하기 위한 부활이다”라고 주장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히브리 평행법적인 그런 관점으로, 이 구절들을 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의 행과 뒤의 행이 합쳐져서, 같은 의미를,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이 우리를 용서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의롭게 만드시는 그런 일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리지 않으려면 예수님께 가면 되고, 목마르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가야 되는 것이죠. 히브리 병행법적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서 예수님에게 오는 자가 주리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게 갑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예수님께 가겠어요? 어떻게 가시죠? 예수님이 어딘지 있는 줄 알아야 가지, 어떻게 예수님에게 우리가 가요? 그걸 이해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 가는 것을 그다음 행해서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구나! “예수님께 간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표현한 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평형법이 많이 나오니까, 이것은 정말 많이 나오는 것이니까, 보시면서 그 구절들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19. 두 개의 표현이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경우인지 살펴보라

다음은 “헨디아디스”(hendiadys)라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헨디아디스”라고 하는 전문 용어인데요. “헨”이라고 하는 것은 1이란 말입니다. “디아”라고 하는 말은 “통하여”라고 하는 말입니다. “디스”라고 하는 것은 둘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헨디아디스”라고 하는 말은 두 개의 표현을 가지고서 하나의 사상을 전달하는 표현 기법을 가리켜서 전문적인 용어로 “헨디아디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최초에 창조한 게,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창조했으니까, 이 두 개만 창조한 건가요?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하나에 하나로 묶어서,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하는 것을 번역자들이 알았기 때문에 번역할 때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말에서도 천지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하늘과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로써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장 47절의 말씀을 보면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를 보았고, 예수님의 대답을 보았고, 이 두 가지를 보아서 놀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지혜로운 대답”을 들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두 개의 표현으로 하나를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지혜로운 대답을 표현할 때, “지혜와 대답”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그다음에 그다음 거 하나 보여주세요.) 마가복음 2장 15절 말씀에 보면 “그의 집에 앉아 잡으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마태의 집에 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고 하니까, 세리들도 왔지만, 죄인들 또 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가요? 우리 한국말은 좀 그런 의미 같아요.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고,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들이” 왔다고 하는 그 의미입니다. 세리와 죄인이라고 하는 두 단어를 써서,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앉았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표현법들을 가리켜서 “헨디아디스”라고 하는 표현, 두 개의 표현으로 하나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랬으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두 개죠?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같은 것을, 이중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씻는, 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내듯이, 우리의 죄악을 씻어내는, 그런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를 씻음으로써,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물과 성령을 같은 하나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고요

계시록 10장 11절 말씀에 보면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내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리라 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했는데, 여기는 “헨디아디스”가 아니라 “헨디아테사론”이죠. 네 개의 단어들이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는 겁니다. “백성 나라 방언 임금” 이것이 온 세계 만민을 의미하는 의미로 이렇게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표현법들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20. 절대적인 계명과 실천적 지혜인 잠언을 구분하라

그 다음에, 그 다음 거 한번 보여주시죠. 이제 마지막으로 “잠언과 계명을 구분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잠언과 계명인데,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한 실천적인 지혜와 권고를 가리켜서 잠언이라고 말합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따라야 할 도덕법적 명령인 것이죠.

우리가 잠언서를 읽다 보면, 두 가지 정반대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데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데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그랬습니다. 자,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대답하지 말아야 돼요? 5절에선 대답하라고 돼 있는데요? 권사님,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4절만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미련한 자가 자꾸 이야기를 하면 대답해야 됩니까? 대답하지 말아야 됩니까? 지혜롭게 하라? 지혜롭습니다. 대답이 지혜롭습니다.

이것이 바로 잠언과 계명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건 뭔가요?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겁니다. “주 너희 하나님만 섬겨라” 하는 것은 계명입니다. 그렇죠?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는 것은 계명입니다. “부모를 순종하라”고 하는 것도 계명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계명입니다.

하지만 “대답하라” “대답하지 말라” 이것은 계명이 아니라, 잠언입니다.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요? 경우에 따라, 경우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겁니다. 자, 우리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상반된 조언들이 존재합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가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됩니까? 기회가 왔을 때 빨리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까? 돌다리도 두드리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거죠. 저 남자가 내 남편으로 좋은 남자일까? 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리다가 놓치는 거예요. 두드리는 게 좋습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됩니까? 상황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빨리 결단해야 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또 신중을 기해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돌다리로 두드려보는 심정으로 두드려야 되는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잠언은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그런 훈계가 아니라, 사실은 상황에 따라 우리가 취해야 할 잠언인 것이죠. 잠언, 그야말로 잠언입니다. 계명이 아니라, 잠언인 겁니다. 성경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성경 말씀에도 계명이 있는가 하면, 잠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해야 될 때가 있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으며, 웃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할 때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입을 열어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지혜롭게 분별해야 하는 것이죠.

어리석은 남편은 그걸 몰라서 늘 불만이죠. 언제는, 언제는 가만히 있으래매? 언제는 가만히 놔두라매? 언제는 또 말 걸래매? 말 좀 하자매? 도대체 남자들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여성들은 갈대와 같다고 하는데, 갈대가 아니라, 지혜롭게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 믿습니까? 여성은 갈대가 아니라, 잠언적인 마음을 가지고 대답할 때가 있고, 대답하지 않을 때가 있고, 아는 척을 해줘야 될 때가 있고, 하지 않을 때가 있고,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아마 우리 제 집사람이 굉장히 화가 날 것 같아요. 그렇게 잘 아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집에서 그렇게 행동했을까? 아마 화가 날 것 같아요. 아는 것과 행동이 달라서 문제입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에 보면 계명이 있는가 하면, 잠언이 있기 때문에, 그 잠언이 마치 계명인 것처럼 주장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보면, 어떤 일들을 정하고 결정하고 나아갈 때, 잠언을 이야기하면서, 정반대의 잠언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시급하게 빨리 결정해야 되어서, 한 번 지나가는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빨리 결정해야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자꾸만 돌다리를 두드려서, 또 두드리고 두드려서 실수하지 않아야 될 때도 있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대답해줘야 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대답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성경 속에서 잠언인가? 계명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세밀하게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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