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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서 나신 주 (마 1:1-12)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유대의 한 조그마한 마을 가운데 탄생하셨습니다. 그 탄생을 본 동방의 박사들이, 동방에서부터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하는 그 별을 보고, 저 먼 곳에서부터 찾아와 경배를 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온 이 박사들이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들일까요? 마술사인가요? 점성가들인가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고 하는 것을 별을 보고 알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왜 그 별을 보고,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먼 곳까지 여행을 와서 예수님께 경배를 하였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때 나타났던 그 별은 도대체 어떤 별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 질문을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점성술사였다고 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가지고, 여러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고, 또 그때 나타났던 별들이 어떤 별이었는가? 혜성이 나타난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혜성이 나타났다고 하는 역사적 기록을 들추어내며, 이 당시에 이런 혜성이 나타났다고 하는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하는 것을 제시하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그런 데이터들을 조사해서,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토성이나 이런 화성이나 이런 별들이 일직선상으로 놓이게 되었던, 그러한 신비한 현상이 있었던 것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은 우리들의 흥미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아야 될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사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 메시지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바라보아야 될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주목해 보아야 될 게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동방의 박사들은 저 먼 곳에서부터 메시아가 탄생했다고 하는 그 별을 보고서,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주는 그 별을 보고서, 동방에서부터 이 가나안 땅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들은 이 유대 땅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찾아간 겁니다. 그 왕궁에 찾아가서,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그 별을 우리가 보고서 왔는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 계시냐?”라고 질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헤롯이 살고 있던 그 궁전은 아주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그런 궁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 생각해 볼 때,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예루살렘 헤롯이 살고 있는, 이 궁전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궁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그마한 동네, 사람들도 얼마 살지 않고 있는, 그 자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가복음의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베들레헴에서도 어디에 뉘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구유에 뉘었다! 예수님을 누릴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해서, 그 집이 너무나도 비좁아서,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잘 누일 수 있는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구유의 여물통 위에, 거기에 예수님을 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보통 방이 아니라, 말 구유에 뉘이셨다고 하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세주로 오셨다고 하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하면, 무엇이 이 세상의 법칙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법칙은 탁월해야 주목을 받습니다. 성공해야 사람들이 우러러봅니다. 무엇인가 두각을 나타내야,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무엇인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그게 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우리나라 선수들 가운데 대단한 스타가 한 명 탄생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아, 좀 얘기 좀 해주세요.) 그게 누굽니까? 조규성 선수요! 조규성 선수가 전북 현대 축구 선수라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아, 이제 반응이 나오시네요. 전 몰랐어요. 그런데 가나전에서였던가요? 두 골을 집어넣은 바로 그 선수가 정말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영화배우 뺨치는 듯한 그런 외모에, 키도 크고 그리고 엄청난 실력을 드러내면서, 그렇게 두 골을 넣는 그 장면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선수가 누구냐?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저도 그 전에는 몰랐는데, “이 선수가 전북 선수구나.”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 선수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2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경기가 끝난 다음 날, 갑자기 100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고 그래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보니까 2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어젯밤에 제가 설교를 위해서 한번 조사해 보니까, 287만 명의 팔로워가 생긴, 287만 명의 사람들이 그 선수를 열광하면서 따라가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아주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모두 다 성공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무엇인가 우리 분야에서, 내가 한 그 분야에서 최고의 두각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고, 모두가 다 성공하고 싶은 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들처럼 그렇게 성공한 사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도 이 세상 가운데서 뛰어난 사람, 성공한 사람, 대단한 사람들만 주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명함을 내밀 수가 없는 것이죠. 사실 이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향해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어쩌면 정당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땀을 많이 흘린 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요? 우리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 성공하고 싶지만,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 그 꿈이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아요. 탁월해지고 싶고 뛰어나고 싶지만, 그게 안 되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 어렸을 때의 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어렸을 때, 아이들의 꿈은 모두가 다 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이었습니다. 너는 커서 무엇이 무엇이 될래? 물으면, 전부 다 다 우리 반 아이들이 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제 친구들 중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꿈은 크게 가졌지만, 대통령은커녕 반장도 하기 힘들어요. 대통령은커녕 우리 집안에서도 인정받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런데 만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공한 사람만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이 세상에서 탁월한 두각을 드러낸 사람만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주님께서 알아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면서, 왕궁의 화려한 곳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바로 그곳으로, 그 주님께서 그 헤롯왕과 고관들을 향해서 찾아가서 거기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아무 이름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한 시골 마을에, 그리고 조그마한 곳에서부터 거기에 오셨다고 하는 그 점은 복음이 우리들에게 어떤 소식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잘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뿐만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두각을 드러낸 사람뿐만 아니라,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이 바로 복음이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소식인 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의 다른 점입니다. 이 세상 참된 성경적인 기독교와 가짜 종교와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성경적이지 아니한 모든 종교는 누구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까? 성공한 사람을 중요하게 봅니다. 여러분도 노력하면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당신도 도를 닦으면, 득도할 수 있고, 당신도 참선하고 당신도 노력하면, 성불할 수 있으며, 최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 살지 말고 집을 뛰쳐나가서, 자연과 벗하며 살면서, 그리고 거기서 최고의 노력을 수련을 하게 되면 당신도 언젠가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으니, 한번 그렇게 해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인데, 놀랍게도 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10년 공부가 도루 아미타불 되는 것이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경지에 올라갈 수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종교뿐만 아니라,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 세상도 역시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세상의 법칙도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가 있겠는가? 돈을 많이 벌거나 성공하거나, 이 세상에서 두각을 드러내면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어떡해요? 모두가 다 수고하고 애쓰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극소수만 성공할 수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다시 실패의 경험을 겪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참된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참된 기쁨의 소식이요 복음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똑똑하고 잘나고 성공한 사람들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자리에까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그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너희 돈 많은 자들아, 내게로 오라. 너희 건강한 사람들아, 내게로 오라. 능력이 많고 뛰어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선착순으로 내게 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는 거예요. 성공하지 못해도, 내게 오고, 정말 연약한 가운데 슬퍼함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 “내게 오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그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는 결단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누구를 만나시는가? 누구나 다 만나주시는 거예요. 누구나. 다 찾아가 주시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교회는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복음의 원리를 정면으로 훼손하면서,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중세 천주교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신부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신부에게는 축복을 내려주시고, 신부의 기도는 들을 수 있지만, 일반 평신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 가르친 것이죠.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가 없어서, 신부를 통해서야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고, 일반 성도들은 직접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할 수 없어서, 신부에게 죄의 고백을 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대신 받을 수 있고, 나 같은 미천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돌아보시지 않으니, 신부를 통해서,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복음으로 출발했던 교회가, 복음적이지 못한 교회가 되어 버린 것이 중세 천주교회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개혁한 것이 바로 종교 개혁이었고요. 종교 개혁을 통해서 들려주신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이제는 누구든지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을 회복하게 된 것이 그게 바로 종교 개혁인 것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종교 개혁으로 출발했던 우리 개신교마저도, 성직자들이, 목회자들이 마치 신부들처럼 하나님과 일반 성도들 사이를 중개할 수 있는 것인 양, 잘못 은연중에 가르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나 같은 사람을 주님께서는 알아주시기나 할까? 나는 그저 내 삶을 사는데 바쁘고, 내 인생 사는데 바빠서 헌신하지도 못하고 별 볼 일 없는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있을까?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니, 누구를 통해서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하는 거죠. 목사님이 대신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목사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송구영신이 되면 우리 가족을 위해서 좀 축복 좀 해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복음의 원리가 무엇이냐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에게 찾아오시는가? 바로 우리들을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그 옛날 베들레헴을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께서, 그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원하시고, 축복해 주시기 원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기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경험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송구영신 예배 때 기도를 잘 안 해주려고 그래요. 하지만 해달라고 하면 해줘요. 또 그것은 해주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은혜를 더 많이 받아서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같은 사랑을 가지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싶어서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해주는 것이지, 제가 여러분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 성경의 진리가 무엇이냐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시는 주님, 탕자처럼 아버지를 배신하고 멀리 떠난 자마저도, 달려가서 안아주시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받아주시고, 귀 기울이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또 바라보아야 될 점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고 했던 그 하나님의 약속은 아주 오래된 약속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한 그때부터,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뱀의 후손을 물리치겠다고, 박살 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 네 아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해 주시겠다는 그 약속, 다윗에게 해주셨던 그 약속, 네 아들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시겠다고 했던 그 모든 약속들, 그 약속들이 하나님께서 너무 많이 해주셨는데, 그 약속들을 그냥 잊어버리고, 그냥 중요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 가운데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물었을 때에 헤롯 왕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묻습니다.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나겠는가? 그럴 때 미아서 5장 2절의 말씀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읽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성경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하찮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신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우리를 하찮게 보시고 외면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아내가 썼던 글 가운데 하나가 <피아노와 어머니>라고 하는 그런 글이 하나 있어요. 제 아내가 작가인 줄 아십니까? 수필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수필을 써서, 이렇게 글을 종종 쓰는데, 근데 글을 어디다 발표하냐면 카카오스토리에다 발표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한 열 몇 명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 썼던 글 가운데 <피아노와 어머니>라고 하는 글이 하나 있어요. 제가 볼 때 우리 제 아내의 가장 최고의 명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 <피아노와 어머니>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제 아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 가산이 많이 기울어서 너무나도 힘들 때, 우리 장모님이 할 수 없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피아노를 팔아버려야 했어요. 가장 값나가는 것이니까, 딸이 피아노를 치는데, 피아노를 팔아버릴 때, 부모의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이 아팠을 것 같아요? 피아노를 팔고 나서 그날 밤 엄마와 딸이 누워서 있는데, 손바닥에 엄마가 딸을 향해서 글씨를 써줍니다. 평상시에 늘 글씨를 쓰면서, 무슨 글씨가 알아봐라. “사 랑 해” 글씨를 쓰기도 하고, “고 맙 다” 글씨를 쓰기도 했던 그 어머니가 피아노를 판 날에는 글씨를 써주는 거예요. “다 시 사 줄 게” 그런데 사줄 수 있었냐면, 못 사줬어요.

결혼하고 미국에 가서 16년 있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삿짐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삿짐 속에는 미국에서 쓰던 피아노까지 같이 온 것을 본 어머니가 묻는 거예요. “피아노, 미국에서 샀나배?”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쓰던 거라 가지고 왔다고 말하고, 엄마를 위해서 피아노 한 곡 멋지게 연주해 주었을 때, 뒤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가 한 말이 “내가 그때 피아노 못 사줘서 미안했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날 밤 제 아내가 어머니와 함께 누워서, 어머니의 손바닥에 글을 썼습니다. “안 사 줘 도 괜 찮 아” 근데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못 사줘도, 약속하면 딱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가장 좋은 걸 해 주고 싶고,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이죠.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해서 그런 마음이셨어요. 우리가 죄악으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우리를 그냥 외면해 버리시고, “너 잘못했지” 하고 끝내버리시고 해치우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원자를 베풀어 주겠다. 너희를 살려주는 메시아를 보내주겠다. 약속하고 또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베들레헴 땅에서 예수님을 보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이루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야 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은 약속을 해도 잊어버리고,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해도 무시해버리고, 무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수명이 끊어져서,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며,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 옛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면서 약속을 이루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한 말씀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의 탄생에 성취되었음을 예언했던 그 예언 가운데서, 마태복음 2장 6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다.” 주님께서 이 베들레헴을 향해서 선포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만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때 우리 주님께서는 이 베들레임을 향해서, 뭐라고 선포하고 계십니까? 너는 유대의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않다! 정말 보잘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던, 그 조그마한 마을을 향해서 “너는 작은 자가 아니다.” “너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너는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땅에서 내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오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속에 붙든다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하찮은 포장지로 쌌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보화가 들어 있으면,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인 것처럼, 예수님을 우리가 영접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허접한 존재가 아니라, 아무런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한다고 하면, 복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시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 허전한 마음을 이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고 합니다. 때로는 좋은 집으로, 때로는 좋은 자동차로, 때로는 학위로, 여러 가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으로 가득 채워서, 그래서 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나를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늘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허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인데,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물질 내의 것으로 채우고 채우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목마르고 더 갈급하고 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을 우리가 영접할 때, 우리의 마음은 만족하게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23편 1절 말씀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된 길이고, 행복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선 우리 우리를 크게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작지 않다고 평가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볼품없는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사야서 53장 1절 2절 말씀 가운데 “우리에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주님께선 우리를 가장 귀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신 그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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