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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하나님? (롬 9:14-18)

우리 장로교회에서 가지고 있는 신앙의 아주 중요한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Tulip이라고 부르는 칼빈주의 5개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한번 즈음은 들어보셨어야 하는데요. 칼빈주의 5대 교리, 혹은 킬빈주의 5대 요점이라고 하는 것인데, 총 다섯 개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타락해 버려서, 죄로 인해서 오염되어 버려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 어느 한 사람도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이 전적 타락의 교리입니다.

두 번째의 교리가 있는데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어떻게 선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선택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 그 사람의 업적에 따라서, 그 사람이 착하게 살았는가, 악하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선한 일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따라서, 공로에 따라서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고 싶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준 것이지, 그 사람이 어떤 장점이 있거나, 어떤 공로가 있거나, 그 사람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무나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교리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제한 속죄(limited stonement)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제한 속죄라고 하는 교리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그런 속죄 사역을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이 누구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신 것인가? 모든 인류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피를 흘려주셨다고 하는 것이 제한 속죄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사건이 온 우주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맞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게 되는, 그런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인데요.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서 그 속죄의 사역,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피흘림이 누구를 위한 거였는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한 속죄 사역이었다고 하는 것이 제한 속죄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네 번째는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구원하시기로 했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구원해 주시기로 했을 때, 그 어떤 사람도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역사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서, 하나님께서 선택한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교리는 무엇이냐면,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선택받은 성도, 즉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하신 그 성도가 있다고 한다면, 구원받을 자로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쩌다가 보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지만, 구원 못 받게 되는 그런 케이스(case)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런 사람은 반드시 끝까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끝까지 구원시켜서 “결국에는 구원받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교리입니다.

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5대 요점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잘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특별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의 말씀에 보면, 이러한 원리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칼빈주의 5대 교리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으실 자를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도중에 실패되는 법이 없다. 전능하지 못하다면, 실패하겠죠. 전능하지 못하다면, 놓쳐버리겠죠. 전능하지 못하다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텐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하나님이 자의적으로, 임의로,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선택한 사람들을 선택하셔서, 끝까지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는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좀 들어보셨습니까? 오늘 처음 들어보십니까? 들어봤습니까? 감사합니다. 들어보셔서.

그런데 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그냥 누가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고,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고, 사실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고 있는 그 말씀을 잘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이상한데, 정말 그럴까? 질문이 떠오르십니까? 뭔가 좀 이상한데 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어떤 게 떠올라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을 선택해 주시고,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뭔가 좀 이상하다.”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서 제일 불편하게 느껴지는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1, 2, 3, 4, 5번 중에서 몇 번일까요? 두 번째. 두 번째. 한번 다시 한번 보여주시면 좋겠어요. 무조건적인 선택.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셨는데, 무엇에 근거해서 선택하셨는가?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냥 선택했다는 거예요.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지 않고, 그냥 무조건 그 사람을 선택해서, 그 사람을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교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의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열심히 수고했으면, 그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한다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것이지, 내가 잘했든 잘못했던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천국에 보내고, 어떤 사람을 일방적으로 지옥에 보냈다고 한다면, 어쩌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생각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그렇다면 엿장수와 같은 하나님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엿장수가 엿을 잘라줄 때, 어떻게 잘라주죠? 누구 마음대로 잘라주죠? 엿장수 마음대로 잘라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엿장수에게 엿을 사 먹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이가 드셨다는 얘기예요. 옛날 얘기예요. 옛날 얘기. 저도 어렸을 때 엿장수가 있었는데, 엿장수가 엿을 가지고 와서 가위를 가지고 짤가닥거리면서, “엿 사세요”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엿을 사 먹는데, 돈으로 사 먹는 게 아니고, 고물로 사 먹는 거죠. 집에 있던 병들을 가지고 가서 엿 바꿔주세요. 또 집에 있는 그 못 쓰는 그런 고철더미 가지고 가서, 엿 바꿔주세요. 어떤 사람은 멀쩡한 냄비 그릇 갖고 가서, 엄마한테 혼나면서 엿을 바꿔 먹기도 하는데, 그런데 그 엿장수에게 가서 “엿 바꿔주세요” 하면서, 제가 병 2개를 가지고 가서 “엿 바꿔 주세요.” 했더니 이만큼 잘라주는 거예요. “야, 맛있다.” 하면서 먹고 있는데, 조금 뒤에 영희라고 하는 여자아이가 와서, “엿 바꿔주세요.” 하는데 병 하나만 가지고 와서, “엿 바꿔주세요.” 하는데, 엿을 더 길게 잘라주는 거예요. 세상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공평해야지. 정의로워야지. 나는 두 개를 냈는데도, 이만큼 주고, 영희는 병 하나만 가져와도, 길게 잘라주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도대체 기준이 뭡니까? 엿을 왜 이렇게 잘라줍니까?” 하면, 엿장수가 하는 말이, “그거 내 마음이야. 엿장수 마음이야.”

엿이야 안 사 먹으면 그만이지만, 그런데 만일 우리 사회가 엿장수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 같으면, 불편할 거 아닙니까? 그런 사회가 과연 정당한 사회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라면을 훔쳤다고 하는 죄 때문에 몇 년씩 징역을 사는데, 수십억 원을 훔쳐간 사람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사회라고 한다면,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잘못을 저질러도 정말 혹독하게 처벌하고, 그리고 사람을 박살 내버리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떵떵거리며 살아도,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아무도 혼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회가 과연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처럼 보이기 때문에 불편한 거예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정의로워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공의로운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권력을 잡은 자들처럼, 그렇게 팔이 안으로 굽는, 그런 나쁜 그런 권력자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는, 그런 불편한 마음들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하는 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듣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선한 일을 했어도 천국에 못 가고, 저 사람은 아무리 약한 죄를 저질러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까, 괴로운 거예요. 악인은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선택했다고 하는 이유로 천국에 가고,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다고 한다면, 도대체 이게 무슨 공의로운 하나님입니까? 이게 무슨 정당한 하나님입니까? 과연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예배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9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이 로마서 9장 14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불의한 하나님이냐?”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꾼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엿장수 같은 하나님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질 수가 있는 겁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 버리고, 그냥 이 세상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공무원을 채용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을 공무원으로 채용해야 할까요? 그것은 공무원 시험을 치러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뽑지 않고, 어떤 기관장이 실력도 안 되는 사람,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정말 점수도 안 나온 사람인데, 자신의 친인척이라고 해서 특별 채용한다고 하면, 어떤 유력한 정치인을 안다고 해서, 그 회사에 합격을 한다고 하면, 그것처럼 정말 괴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라톤 대회가 있는데, 1등 한 선수에게는 금메달을 주지 않고, 꼴찌로 들어온 사람에게 금메달을 준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마라톤 대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학 입학 사정을 아는데, 전교 수석한 학생은 떨어뜨리고, 꼴찌 한 학생은 내가 안다고 하는 이유로 합격시킨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누가 천국에 가야 됩니까? 좋은 사람이 천국 가야 되는 거예요. 누가 지옥에 가야 돼요? 나쁜 놈들이 가야 되는 거예요. 나쁜 놈들은 지옥에 가야 하고, 선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가야 그게 맞아요. 그런데 오늘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통해서 정리된 그 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오늘 읽은 로마서 9장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천국에 들여보내시는가? 선한 사람을 들여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도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인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그냥 마음에 드니까, 그냥 긍휼을 내가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긍휼을 베풀고, 저 사람은 내가 긍휼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 그냥 못 본 척해버리고, 우리가 원하면 우리가 달음박질을 해서 그래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냥 아무렇게나 선택해 버리셨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불의한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독재자 같은 하나님입니까? 정말 “말로만 공정과 상식을 부르짖고, 사실은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악한 지도자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아무런 조건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냥 어떤 사람은 선택했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거기에는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서 바로 첫 번째 교리입니다. 첫 번째 교리를 한번 다시 봤으면 좋겠는데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전적 타락의 교리입니다.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 사람 가운데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합격점을 받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완전히 타락해 버려서, 스스로의 능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점수를 가지고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고, 도무지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이 그 누구도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을 때, 거기에서 무조건적인 선택이 따라 나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하나씩 하나씩 떼어볼 것이 아니고, 같이 연결해 봐야 되는 거예요. 전적인 타락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선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해 버려서, 아무도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의 업적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는, 모두가 다 타락한 인생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다 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긍휼을 베풀어 주신 거예요. 그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거예요. 아무 이유 없이 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신 것이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혼인 잔치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혼인 잔치를 배설하고, 그리고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청했습니다. 그 혼인 잔치에 오기로 되어 있던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임금님의 손님들이니까, 아마 그런대로 사회적 신분이 있는 사람들을 임금님이 초청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다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런데 정작 혼인 잔치의 날이 되어서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으니 오라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한결같이 못 오겠다고 거절을 한 겁니다. 나는 소를 샀으니 그 소를 테스트해 봐야 하기 때문에 혼인 잔치에 못 가겠다 말하고, 나는 밭을 샀으니 밭을 보러 나가기 위해서, 혼인 잔치에 못 가겠다 말하고, 결혼했으니, 결혼, 그래서 못 가겠다 말하고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못 가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주신 이 비유에 보면, 그 임금님이 결단을 내립니다. “가서, 아무나 데리고 와라.” 전국 혼인 잔치에 올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아무나 데리고 오라. 아무나 데리고 오라. 그러자 임금님의 종들이 나가서 아무나 데려오는 겁니다. 길에 지나가던 사람, 전혀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다 데리고 와서, 혼인 잔치에 앉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그게 우리들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나,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불평할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은 공무원 시험과는 다른 겁니다. 공무원 시험에는 합격점을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겁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학 입시와는 다른 겁니다. 대학 입시에는 좋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있고, 점수를 받지 못한 학생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자격이 있는 사람과 자격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그중에서 몇 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무엇과 같은가? 자격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거, 마치 장학금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온전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어떤 학생이 정말 좋은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학교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진학을 못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어떤 사람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래서 살며시 다가와 장학금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 학생은 내가 대학에 입학할 그런 능력이 안 되는데,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장학금을 내놓는 바람에 그래서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는가? 옆에 있는 친구가 들었어요. “나는 왜 장학금 안 줘요?” 가서 따질 수 있나요? “왜 나한테는 장학금 안 줘요? 쟤는 주는데, 왜 안 줘요?” 할 수 있어요? 자격이 없고,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이 장학금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구원은 무엇과 같은가 마치 고아원에서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아원에 한 어떤 부부가 와서 아이를 입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고아원에 와서, 어떤 아이를 입양할까? 여기저기 바라보면서 가는데, 그 가운데 어떤 한 아이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 아이를 보는데 괜히 마음이 끌려요. 괜히 그 아이만 보면 마음이 통해요. 안타까워요. 어떤 아이인가? 건강한 아이가 아니라, 아픈 아이예요. 예쁘게 잘생긴 아이가 아니라, 별로 못생겼어요. 건강한 아이가 아닌, 그 아이가 있는데, 입양하러 온 그 부모들이, 그 사람들이 양 부모들이 그 아이들을 다 보는 가운데, 건강한 아이도 많이 있고, 잘생긴 아이도 많이 있고,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괜히 그 아이가 마음에 끌리는 거예요. 우리가 아니면 저 아이는 누가 입양해 갈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아이를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아이들이 그 사람들에게 와서 항의할 수 있나요? 왜 나를 선택하지 않습니까? 나는 얘보다는 건강해요. 나는 얘보다는 똑똑해요. 나는 얘보다는 더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데, 왜 나를 선택해 주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것은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달음박질에 의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서 선택해 주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불만을 표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격 없는 우리들을 선택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때, 나와 같이 연약한 사람, 나처럼 이기적이고 나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그리고 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구원해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와 같은 사람을 선택해 주셨을까? 생각하면, 내 공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택되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날마다 날마다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평하셔야만 했다고 한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집행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사람이고, 우리는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심판하셔도 아무 짝에도 항변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공평하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거예요. 정의롭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고, 사실은 불공평하게 하나님께선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피 흘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무 죄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날마다 만입이 내게 있어도 늘 감사와 찬송 가운데,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종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내신다고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아무리 내가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할 것 아닌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또한 정반대로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요. 어떤 사람은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선택한 사람이 있고, 그 선택한 사람을 반드시 구원하시기로 하셨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마음대로 죄를 짓고 마음대로 악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결국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까?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선택받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나의 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못 들어오게 그 열린 문을 닫아버린 게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무엇이냐면, 죄로 인하여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그 천국의 문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그 천국의 문이 열리게 만든 게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인가? 구원받을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의 선택 안 해서 천국에 못 간다. 그런 말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께서 선택 안 해서 나 천국 못 간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받게 만들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선택인 것입니다.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그런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한국 성도님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그저 “나 예수님 믿어.”라고 말하는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사탄을 내 마음의 왕자에 모시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삶을 살아왔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내 마음의 왕자의 사탄 대신에, 예수님을 모시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늘 넘어질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결국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늘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 되겠고, 하나님의 그 사랑 자격이 없는 자를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입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배신을 하고 나에게 악한 짓을 하고 내 마음을 속을 썩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나쁜 일들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을 생각하며, 오히려 용서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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