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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한 거짓말 (행 5:1-6)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6장의, (아니) 5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 가운데는, 초대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발생한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마음속에 헌신을 결정하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처분하고 하나님께 바쳤는데,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 주었는데, 사실은 전부를 바친 것이 아니라 일부를 숨겨둔 것이었고, 결국 그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서, 그래서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그의 아내 삽비라도 거짓말을 하는 가운데 무참히 죽임을, 한 날에 남편과 아내가 죽임을 당하는 아주 그런 끔찍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사건을 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는 아주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그리고 제자들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 예루살렘 교회가 어디에서 모이고 있었을까요? 처음에는 성전에서 모이기 시작했고, 그리고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하는 곳에서 모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주로 모인 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에서 모였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성지 순례를 하면서 보니까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이 어딘가 가보게 됐습니다. 사진이 준비가 됐나요? 바로 이곳이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락방 그러면 조그만, 한두 명, 3~4 명 들어갈 공간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가보니까 이렇게 엄청나게 큰 공간이었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다고 했던, 그 마가의 집에, 다락방의 구조가 이렇게 큰 구조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봐야 되는구나. 봐야 되는구나. 생각을 좀 한 것이죠.

물론 이것이 그때 정확한 그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100%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마가의 다락방이었을 것이니까, 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무너졌을 수도 있겠고, 그 후에 재건했을 수도 있겠는데, 성경에 기록된 이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조그마한 그런 방이 아니라, 사실은 2층에 있는 연회장과 같은 아주 큰 장소였던 것이고, 밑의 층에는 생활공간이 있었지만, 2층에는 큰 연회장이 있어서, 그 크기가 우리 교회의 반절 정도의 너비였고요. 그리고 높이는 우리 교회보다 한 한 세 배 두 배 반 정도 높았나? 아무튼 높은 구조를 가지고 있던, 그 장소에서 아마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모여서 찬송하고, 정말 밖에서는 살기가 등등한 그 가운데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자리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초대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정말 좋은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정말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의 박해로부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일자리가 빼앗기기도 하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그런 아주 심각한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그때 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 혼자 먹고 잘 먹고 잘 살게 했다고 해서, 그냥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내놓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많은 것들을 내놓으면서, 서로 공유하면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던 교회가 초대교회였고, 예루살렘 교회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그 가운데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아주 큰 헌신을 하게 된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물건을 내놓아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을 때, 그렇게 그런 상황 가운데서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은 조금만 내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고, 초대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그런 엄청난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 말미암아, 정말 예루살렘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가 엄청난 은혜를 받고 정말 기쁨이 넘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삽비라라고 하는 이 부부도 바나바처럼 자신들의 전 재산을 내놓게 되었던 것인데요. 그런데 사실은 전부를 다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부를 감추어 두었고, 일부만 내놓게 되었을 때, 그것을 간파한 베드로가 책망하게 되었고, 이 거짓말은 사람들에게 한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한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아나니아도 죽게 되고, 결국 삽비라도 죽게 되는 아주 끔찍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 내놓지 않으면, 우리에게 심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은 마치 동네에서 삥을 뜯는 그런 깡패와 같은 하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그런 것일까요? 제가 중학생 때였는데요. 중학생 때 저는 산을 넘어서 학교를 가곤 했습니다. 산을 넘어서 학교를 갔는데, 산을 넘어가는 그 골목길에 종종 깡패들이 나타났습니다. 깡패들이 나타나서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그때 돈을 다 내놓지 않으면 혼나게 되는 거죠. 그때 깡패들이 했던 말이, 무엇인지 혹시 아십니까? 해보신 적 있습니까? 주머니 뒤져서, 돈이 다 내놓지 않으면,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1원에 한 대씩 맞는다고, 저는 그런데 가지고 있는 돈이 아무 돈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깡패를 만나도 두려울 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자신 있게 없다고 얘기했고, 돈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없다고 얘기해 놓고 생각해 보니까, 저에게 돈이 있는 거예요. 무슨 돈이 있는가? 어제 제 이모가 저에게 부탁한 게 있냐면 무엇이 있느냐면, “내가 돈을 줄 테니까, 회수권 좀 사다 줘.” 그랬어요. 회수권 혹시 아십니까? 학생들에게 주는 할인 교통 차표인데요. 그 탈 수 있는 것인데, 학생들은 싸게 사니까, 학생이 아닌 우리 이모가 저에게 회수권을 사달라고 해가지고, 그 회수권을 사다 주면, 우리 이모가 그 회수권을 가지고 출퇴근하기 위해서 사다 달라고 했는데, 그 돈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주머니를 뒤지는데, 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주 큰 곤란을 처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돈 내라.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놔.” 해놓고, 만일 우리가 정직하게 다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를 심판해 버리는 마치 깡패와 같은 하나님이기에 이러한 모습이 벌어진 것일까요?

하지만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내놓아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전체 재산을 다 바쳐야만 했었던 것도 아니고, 일부만 바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베드로가 했던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땅을 팔아서 교회 앞에 내놓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전부를 다 바치지 않고, 아무것도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 바치지 않고, 일부만 받쳐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 초대교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다 내놓고 사유재산이 없이, 모두가 다 공동체 생활을 해야만 하는, 그렇게 강제적으로 모든 재산을 다 헌납해야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도가 되는 필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재산을 자기가 가지고 있어도 돼요. 바치지 않아도 되고, 다 드리지 않아도 되고, 일부만 드려도 되고, 어떻게 해도 다 괜찮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사도행전 5장 4절에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재산 가운데 일부만 헌납한다고 해서, 적게 바친 것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고, 잘못된 행위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였다고 하는 것일까요? 거짓말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조금만 바쳤으면 “조금만 바쳤습니다” 하면 될 것인데, 조금만 바쳐놓고, 일부만 받쳐놓고 마치 전부를 바친 것처럼,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고, 그 거짓말을 악하게 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인데요. 이해가 좀 되십니까?

저는 참 이해가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왜냐하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이렇게 충격적으로 죽여버리시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것은 너무한 것이 아닐까? 좀 생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짓말을 하게 될 상황을 우리가 짐작해 본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상황들을 우리가 추측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5장의 말씀 가운데서는 전부를 자세히 기록하지도 않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 심리 상태를 자세하게 묘사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그들의 마음에 어떠한 마음의 동기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상황을 살펴보면 이렇게 추측할 수가 있겠는데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서로가 자신의 것들을 내놓고 서로 공유하기 시작한 겁니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던 빵을 나누어서 같이 먹은 것이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옷을 나누어 준 것이죠.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님들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서로 그렇게 돕고 공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돕고 공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게 된 것이죠. 그런 선한 영향력들이 끼쳐지는 가운데, 그런데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참 그 예루살렘 교회에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고, 정말 신실한 사람이었고, 이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 교에 소개한 사람이기도 한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어 놓은 것입니다. 바나바라고 하는 요셉이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어놓고, 많은 사람들을 돕기로 했을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바나바를 칭찬하기 시작한 거예요. 정말 감사하다고. 정말 하나님의 그 사랑을 실천한 이 바나바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기 시작했는데, 그럴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 옆에서 바라보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 가운데도 우리도 우리의 재산을 바치고 나누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바치려고 하니까 아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C.S. 루이스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남들을 돕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은 내가 이것을 남들에게 주었을 때, 우리들의 삶이 흔들릴까 봐. 무너질까 봐. 두려움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마 이것을 다 바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가지? 만일 아프게 되면 어떡하지? 긴급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갑자기 걱정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고, 다 바칠 것이 아니라, 일부만 드려야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일부만 바치려고 하니까, 폼이 안 나는 거죠. 한 사람은 다 바쳤는데, 이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은 다 드렸는데, 일부만 내놓으려고 하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빛이 나지도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을 바친 그런 모양새가 낫지 않게 되어서, 그래서 전부를 드린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죠. 십계명 가운데 제 9계명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렇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일 내가 이것을 조금만 바치면, 그것이 빛이 나지 않고,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덜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과대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그 마음 가운데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욕구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보다도 훨씬 더 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엇인가?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훨씬 더 커버린 것이죠. 교회라고 하는 세팅(setting) 속에서, 교회라고 하는 환경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리고 정말 자신의 것을 내놓는 그런 헌신적인 삶을 보여줄 때, 주어지게 되는 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받음, 사람들이 칭찬하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갈망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런 욕구 때문에 그렇게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위험한 요소가 바로 이런 요소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인데, 그런데 결국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교회라고 하는 그 상황 속에서, 교회 구성원들로부터 내가 인정을 받고, 교회 구성원들로부터 내가 박수를 받는 것이 더 갈급하고, 그것이 더 욕망이 되어 버리는 그런 결과가 나타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늘 반복되고 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이, 내가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는 그것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고, 그러한 하나님,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명예가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놀랍게도 초대교회 상황 속에서 믿음의 부흥이 있었고, 그리고 정말 예수님을 따르던, 그 힘들고 어려운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따랐던, 그 초대교회 상황 속에서도, 그 교회를 무너뜨리는 그 위험이 어디에서 나아오게 되었는가? 바로 내부로부터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리를 넘어뜨리는 위험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위험 교회의 가장 큰 대적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에 주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사실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종종 많은 교회가 교회의 적이 누군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그 위험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 밖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고, 교회의 그 정신과는 정반대로 가는 이 사회가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회와 싸우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을 보여주는 때가 많습니다. 물론 밖의 상황들이 그렇게 녹록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돌아가는 그 상황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의 상황도 역시 마찬가지였죠. 당시 유대 사회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고, 그러한 유대 사회의 그 핍박 때문에, 교회는 흔들리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밖에서의, 밖에로부터 오는 그 위험이라고 하는 것이 물론 작지는 않았지만, 그 밖에서부터 오는 위험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릴 정도의 위험은 아니었던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위험은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 안에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위험이 훨씬 더 큰 위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경건함은 사라져 버리고, 교회가 하나의 세속적인 목적,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취득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고, 결국 교회라고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세상과 똑같아져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교회를 아예 없애버리기보다는, 교회를 세상과 똑같이 만들어 버리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처음부터 아주 악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이 교회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처음부터 사람들의 칭찬을 받겠다고 하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거짓말로 전부를 바친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조금만 바치면 되면서, 그냥 바친다고 그렇게 처음부터 그런 계획을 하고서, 그렇게 거짓말을 처음부터 계획하고서 진행했을까요? 아니면 처음에는 그래도 처음에는 헌신을 제대로 했는데, 은혜를 많이 받아서 “우리도 헌신하자.”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 가운데, 처음에 했던 그 결단들이 조금씩 조금씩 약해지면서, 누그러지면서 그래서 자신의 그 마음들이 바뀌어 버리게 된 것일까요? 처음부터 악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일까요? 처음에는 순수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헌신이 약해지고, 그러면서 거짓말까지 하게 되는 그런 과정으로 흐르게 되었을까요? 모르죠. 성경에 안 쓰여 있으니까 모릅니다. 저한테 물어봐도 모릅니다.

두 가지 다 가능성들이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 양의 털을 쓴 가짜 성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처음에는 순수해요. “처음부터 나빴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경우는 처음에는 괜찮아요. 처음에는 헌신의 마음으로 시작했고, 처음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사탄이 주는 마음에 우리들의 마음들이 빼앗겨 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출발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우리들의 마음이 현실을 바라보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원래 헌신하는 마음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 신학교에 들어갈 때의 그 마음과,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서 실제로 목회를 하는 가운데 생기는 그 마음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처음에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을 때에, 젊은 신학도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성공을 위해서 살 게 아니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하는 각오로 신학교의 문을 두드려요, 나는 이 세상에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주를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하는, 열정과 각오를 가지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들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에 문을 두드린 게,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이야기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주를 위해 살겠다고 헌신하고, 이 세상의 영광을 살기보다는,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헌신하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린 것이죠. 그런데 그 40년 전에 신학교에 문을 두드렸을 때, 모두가 다 은혜가 충만했던 그 신학도들이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 되었는가?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은 차라리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나을 뻔했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모습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득문득 저의 마음 가운데도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죠.

사역자가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을 다 헌신하고, 모든 것을 다 주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다 바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사역자가 된 후에는 내가 드린 이 헌신과 이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 상해버리고, 조그만 말만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으면, 마음 상해져 버리고, 그리고 내가 해 드린 헌신과 내가 이 그 헌신에 대한 대가로 받은 것이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이 불편해서 괴로워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일이 되어버리고, 주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형식이 되어버리고,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냥 사역을 해버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겁니다.

장로로 임직 받을 때 그 마음과, 내가 권사로 임직 받을 때, 그 첫 마음이 어느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고,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마음 불편해하고, 그리고 교회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내가 이만큼 헌신을 했으면,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서 바쳤으면, 사람들이 나를 왜 인정해주지 않는가 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이 세상의 욕심을 다 내어버리고 주를 따르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는, 우리 가운데 누가 크냐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의 말씀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무엇을 더 얻으리이까를 늘 질문하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가롯 유다는 주님을 따른다고 했으면서도, 결국에는 예수님을 팔아버리게 되는, 그런 단계까지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런 위험이 항상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상존하고 있는 것이죠.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주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대접한다고 하는 것이 기쁨이 되었고, 행복이 되었고,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나와 함께 돕지 않는 마리아를 보면서, 그 마음이 상해버린 것이죠. 누가복음 10장 40절의 말씀에 마르다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도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나 혼자 일하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해야 되는데, 도와주지 않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내가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돼야 될 텐데,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나 혼자 한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모두가 다 괴로워하는 그런 상태로 떨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예전에는 순수한 헌신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돌변해 버린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마음이 변하는 것은 순식간에 모습인 것이죠. 어쩌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신도 처음에는 정말 순수했을 것 같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는데, 이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리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것이 무엇이 아까운가? 다 드리자.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마음이 다 변해버리고 만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초대교회 상황 가운데 교회가 세워지는 이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 아나니아와의 삽비라의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 죽여버리신 것이죠. 그것을 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깜짝 놀랐어요. 거짓말한 걸로 인해서 죽여버리시는,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을 보면서, 너무나도 깜짝 놀랐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죽여버리시기까지 하시는가? 이렇게 죽여버린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너무나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 믿음이 떠난 자들의 맞이하게 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겁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없어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조폭과 같이 “주머니 뒤져서, 1원이 나오면 한 대씩”이라고 말하는 그런 조폭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또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며, 또 참고 또 참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지금 당장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실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심각하게 경고를 받아야 하는데요. 이것이 심판이 없다고 하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하는 것이 무서운 것을 알기 때문에, 마스크가 해제됐다고 해도 우리가 쉽게 마스크를 벗지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이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면,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헛된 욕망, 아무런 가치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이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것이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그 어느 것도 아깝다고 하지 아니하시고, 숨기지 않으셨어요.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헛된 욕망 이 세상에 헛된 것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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