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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하니 (레 11:44-45)

지난번에 제가 성지 순례를 다녀오게 됐는데요. 그때의 기억이 참 강하고, 참 좋은 경험이 되어 있어서, 앞으로는 한동안 많이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곰탕 우려먹듯이 팍팍 고아도, 참고 인내하며,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어떤 분들께서는 “좀, 그곳의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셔서, 가능하면 많이 전달해 주고 싶고,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텐데, 또 어떤 분들은 또 좀 불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참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희 일행이 텔아비브(Tel Aviv)라고 하는 도시에, 공항에 내려서, 그래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 첫 번째 날이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은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날이었는데요. 그날은 안식일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평일 같았더라고 한다면, 평상시 같았더라고 한다면, 러시 아워(rush hour)였고, 그리고 차가 많이 밀릴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아주 편하게 베들레헴까지 이동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을 철저하게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아주 큰 유익이었습니다. 저희가 미국에 살 때도, 유대인들 회당이 있어서, 그 안식일만 되면, 토요일만 되면, 그 회당에 모여드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이스라엘에 가서 거기서 직접 경험하게 되니까, 그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철저하게 구약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데, 이렇게 안식일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안식일이면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이드해 주었던 선교사님께서 설명해 주기를, 만일 예루살렘 경내에 차를 몰고 들어가게 되면, 지나가던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차에다 던져버린다고 합니다. 왜 안식일날 차 타고 돌아다니느냐고 돌을 던져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차가 깨져도, 박살이 나도 손해배상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요. 왜냐하면 돌아다닌 사람 잘못이지, 돌 던진 사람은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예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안식일이 되면 예루살렘 경내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아놓았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호텔에 갔더니, 거기에 엘리베이터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에 조그마한 표시가 하나 되어 있는 것을 봤습니다. 이 사진에서 보시면 알겠지만, 그 엘리베이터 누르는 그 옆에 “안식일 전용 엘리베이터”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샤밭(Shabbat)이라고 하는 말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말인데, 히브리어, 이디시로 쓰여 있고, 그리고 영어로도 밑에 써져 있습니다. 이 안식일 엘리베이터라고 하는 게 무엇일까요? 안식일만 되면 모든 층이 다 열립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날 일하지 않기 위해서,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층마다 다 열리게 되어 있고, 그래서 안식일 날에는 유대인들이 일하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도록, 그렇게 버튼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신기하죠?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어떤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야 되는데, 안식일이 되어서 유대인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개신교인인 이 선교사님께서 그 문을 열어주니까, 그때서야 들어가게 되어서 고맙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안식일 법만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음식도 아주 철저하게 가려서 먹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규정대로, 무엇을 먹어도 되고 무엇은 먹지 말아야 되는 규정들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규정에 따라서 철저하게 음식을 구분해서 먹습니다. 특별히 음식을 내놓을 때도 저녁에 내놓는 음식과 오전에 아침에 내놓는 음식이 달랐습니다. 저녁에는 주로 고기 위주의 음식이 나오는 반면에, 아침에는 고기를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계란과 치즈와 요구르트와 이런 음식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렇게 음식이 구분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신명기 14장 21절의 규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은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계류하는 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젖에 삼지 말지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과 함께 삼지 말라고 하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고기와 젖으로 만든 치즈를 함께 먹지 않는 것이죠. 적어도 7시간이 지난 후에 먹을 수 있는 것이고, 햄버거점에 가면 고기 패티와 치즈가 같이 나와야 맛있는데, 치즈를 넣어주지 않는다고 해요. 음식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행을 갔을 때 우리 일행들 가운데는 한국에서 음식들을 많이 싸 왔습니다. 음식이 맞지 않기 때문에, 음식을 싸 왔지만, 유대인 식당에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음식 규정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고, 굳이 먹으려고 하면 자기 방에서 조용히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복장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유대인들은 성경의 말씀에 따라, 그 옷을 입었습니다. 자기 집의 문 앞에 성구를 단 함을 매달아 놓기도 하고, 사진에서 보시면 알겠지만, 머리 위에 성구를 적은 양피지를 보관한 경문을 달아놓고, 또 왼손에도 그것을 달아놓는 등, 신명기 6장 6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기록된 그 말씀대로 복장을 하는 겁니다. 신명기 6장 6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내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내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 그대로 문 앞에도 성구를 달아놓고, 몸에도 머리에 그리고 손에 성구를 달아놓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신앙생활 구약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렇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보수적으로 성경의 규정에 따라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텔아비브(Tel Aviv) 수도죠?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유대인이어서, 안식일을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지도 않고, 음식법을 이렇게 철저하게 지키거나, 복장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생활 속에 깊숙이 유대의 전통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음식의 문화에 있어서, 그리고 안식일 규정들에 있어서, 자기들이 지키는 것도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처럼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이 세속적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규정들을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잘못된 환상이 많이 심겨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주 듣게 되는 잘못된 이야기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종종 무슨 이야기를 많이 하냐면, 유대인들은 신앙생활을 아주 철저하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구약 말씀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그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서 있어서, 그래서 유대인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노벨상도 많이 받게 되었고, 갑부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고,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유대인에서 많이 나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니까 우리도 유대인들을 본받아서,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따르자.”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유대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유대인의 교육 방법과 유대인들을 따라 하자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도표를 한번 보시면 알겠지만, 사실은 그러한 결론은 너무나도 성급한 결론입니다. 종교적인 유대인, 종교적으로 아주 철저한 유대인들은 전체가 아니라, 사실 소수에 불과한 일부 종교적인 유대인들이 있는 것이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유대인으로서, 그렇게 신앙생활의 철저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죠. 그런데 탁월한 업적을 나타낸 사람들은 누구냐? 그 가운데서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 극소수의 사람들이 탁월한 업적을 나타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아주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했기 때문에, 아주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서, 안동 하회마을에 사는 유교를 철저하게 믿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그 사람들은 갓도 쓰고, 도포를 입고 마치 훈장처럼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런 사람들을 보여준 다음에, 또 손흥민 선수나 김민재 선수를 보여주고, “우리나라가 유교를 잘 믿어서, 저렇게 축구를 잘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부 유대인들이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들어서,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뛰어나고 아주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이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하는 것을 “과연 우리가 본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사실 우리가 유대인들로부터 배울 점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자적으로 성경 말씀을 잘 지키고, 유대인들이 음식법을 잘 지키고, 복장 규정을 잘 지키고, 문자적으로 잘 지킨다고 하는 그 사실은 사실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레위기 11장 44절에서부터 45절까지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레위기 11장 44절에서 45절의 말씀을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이 지켜야 될 여러 가지 규정들을 말씀해 주신 내용이 내 레위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11장의 말씀에 보면 여러 가지 규정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 무엇을 먹지 못할 것인가? 무엇을 만져서는 되는가? 안 되는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한 세세한 규정들이 성경 말씀 가운데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느러미가 있는 생선 비늘이 있는 생선은 먹을 수 있지만, 지느러미가 없거나 비늘이 없다고 한다면 먹을 수 없는 겁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잡히는 수많은 생선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많은 생선들을 먹을 수 있지만, 장어와 같이 미끌미끌한 그런 생선들은 도무지 먹을 수가 없는 그런 규정인 것이죠. 이 외에도 성경 말씀에 보면 다양한 규정들이 많이 있어서, 우리가 지켜야 될 것 따라야 될 규정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러한 모든 규정들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이죠. 우리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이 가장 큰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이것을 하면 된다. “이것을 하면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세세한 규정들을 성경에서 많이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들을 잘 지킨다고 해서, 문자적으로 잘 따른다고 해서, 그런데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경 속에 있는 규정들을 세밀하게 잘 지켰습니다. 일하는 것이 어디까지 일하는 것일까? 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면서 이것저것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안 지켰어요? 정말 중요한 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말씀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부터 34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온 율법에서 말하고 있는 것, 온 선지자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이 어디에 걸려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이 계명에 다 걸려 있다는 것, 이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의 사랑에 대한 그것이 빠져버리면, 그 어떠한 계명에 순종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이 행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은 빠져 버렸습니다. 자기들 옆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들을 차별하고 공격하며,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하는 특권 의식에 빠져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러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 옛날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부터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빼버리고, 밖으로 드러나는 것, 밖으로 판단 가능한 것 수치로, 환산 가능한 산술적인 보이는 것들은 다 행했지만, 정말 중요한,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과 불쌍한 자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도와주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잊어버린 채, 잘못된 의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져버렸던 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었고, 그 잘못이 오늘날 유대인들의 모습 가운데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계명들을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해 버리고 만 것이죠. 이것은 마치 목적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만일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잘못을 하게 되면, 선생님이 반성하라고 하는 의미로 반성문을 쓰게 할 겁니다. 그러면 그 반성문을 쓰면서 그 반성문을 쓰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내가 잘못했구나”를 깨닫고, 내가 이런 큰 잘못을 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다시는 이런 잘못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하는 결심과 다짐 가운데, 반성문을 쓰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잘못을 했군요. 내가 이런 잘못을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으로 반성문을 쓰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반성문을 왜 제출합니까? 혼나지 않기 위해서, 제출해 버리고 끝내버리는 것이죠. 예전에 했던 잘못은 그대로 반복하면서, 전혀 뉘우치는 마음도 없이, 혼나지 않기 위해서 반성문을 제출해 버리는데, 요즘 같으면 어떻게 반성문을 제출하겠어요? chatGPT한테 물어봐서, AI에게 물어봐서, “반성문 하나 써줘.” 해서 제출해 버리고, “난 반성문 제출했다. 끝났다.”라고 말해버린 것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무슨 반성문이에요? 아무 의미가 없는 종이 쪼가리 제출한다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고,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긍휼의 마음을 갖게 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인데, 그 가장 중요한 계명은 잊어버린 채, 그저 겉으로 평가될 수 있고, 겉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계명들만 규제 그런 것들만 행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종교 생활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했던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었던 아히멜렉 제사장입니다. 어느 날 다윗이 이 아히멜렉 제사장에 찾아와서 아히멜렉에게 묻습니다. “지금 제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저와 함께 있는 자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님, 혹시 먹을 게 있습니까? 먹을 것이 있으면, 좀 주십시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 제사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수 있는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단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매일매일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물려낸 빵, 진설병이라고 하는 빵입니다. 이 진설병이라고 하는 빵을 하나님께서는 규정해 주셨습니다. 뭐라고 규정해 주셨어요? 일반인이 먹으면 안 된다. 누구만 먹어라? 제사장들만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말씀해 놓으신, 그 진설병의 빵이 그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이멜렉 제사장은 그 다윗과 일행들을 향해서 빵이 있기는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줄 수 없다고 기록돼 있으니, 나는 줄 수가 없다. 알아서 해봐라. 나가서 알아서 찾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아히멜렉 제사장은 하나님의 율법과 어긋나게 그 진설병의 빵을 다윗에게 제공하고 그 일행들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그 아히멜렉 제사장이 한 행동에 대해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진설병의 빵의 규정이 나온 이유는 일반인들은 자기가 일해서 먹을 수 있고, 일반인들은 농사를 짓고, 일반인들은 목축을 해서, 그래서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제사장들은 오직 성전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성막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이 진설병은 바치고 하나님께 바친 다음에 이 제사장들이 다른 수입이 없는 이 제사장들이 먹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규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제사장들만 먹으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 이유에서 그렇게 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들어서, 이건 우리들만 먹으라고 했지, 당신은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 배고픈 자를 봤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주고, 힘든 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어려워하는 자들을 도와주고, 사랑으로 도와주는 게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을 아는 아히멜렉은 그 빵을 다윗과 일행들에게 주었던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이고요.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저 고귀한 곳에 따로 거하며, 내가 너희들과 섞임으로 말미암아 내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 내가 거룩성을 유지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곳에 혼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들어오신 것이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면서, 그들을 도와주었고, 환자들의 그 아픈 곳을 만지며, 나병 환자의 몸을 만지고, 병자의 고름을 짜내며, 그 아픔 가운데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신 것이죠. 율법의 규정에 만지지 말라. 거리를 두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전염병이 퍼지지 않기 위해서, 모두에게 사랑을, 모두가 건강하고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일시적으로 같이 어울리지 말아서, 전염병이 돌지 말라고 했던, 그런 규정이었는데, 그 규정을 들어서, 그냥 외면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우리들의 아픔을 만지시고, 치유해 주시며 온전케 해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더러움은 만지는 것에서부터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마가복음 7장 18절에서부터 23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실 유대인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 유대인처럼 종교생활을 하는 것은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걸어가지 말라고 하면 안 걸어가면 되고, 일하지 말라고 하면 일하지 않으면 되고,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으면 되고,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짜 종교가 이런 유대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금식을 며칠 동안 해야 한다. 산에서 며칠 동안 지내야 한다. 아니면 침묵을 몇 시간 동안 해야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측정 가능한 것들로 우리들의 신앙을 규정해 버리고, 그것만 잘 지켜버리면, 정화수를 떠놓고 100일 동안 기도를 채운다든지, 어떠한 부적을 붙인다든지, 굿을 한다든지, 할 수 있는 것들만 해버리는 것은 사실은 힘들기는 하지만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참된 신앙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그렇게 할 수 있고, 측정 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마음의 문제인 것이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거룩함을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것이죠. 마음이 청결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탐욕과 음란의 마음들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눈에 드러나지 않고 측정할 수 없기에, 우리가 하는지 안 하는지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것은 더 힘들고 어려운 믿음의 길인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믿음의 길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우리가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종종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유대인처럼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먹지 말아야 되는가? 일을 하지 말아야 되는가? 뭘 해야 되는가? 그런 측정 가능한 것들로 신앙을 정해놓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도 종종 신앙을 어떻게 하냐면, 측정 가능한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을 읽었는가? 성경을 읽었으며, 얼마나 몇 번 읽었는가? 일독했는가? 이독했는가? 암송을 얼마나 많은 구절을 했는가? 얼마나 많이 썼는가? 성경을 매일 묵상하고 있는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가? 내가 교회에서 얼마 큼의 헌신을 했는가? 내가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드렸는가? 측정 가능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전부인 건 양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고, 드러나야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겉모습으로 신앙행위를 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졌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착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 이웃들을 향해서 내 형제자매들, 내가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은 다 그림자예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예표 해주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모든 그림자들을 다 폐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그 그림자만 붙들고 있을 것이 아니죠.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구약의 모든 율법적인 요구들을 다 폐하시며, 성취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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