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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보다 방향 (롬 10:1-3)

속도와 방향, 방향과 속도, 이 가운데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어떤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둘 다 중요합니다. 속도도 중요하고, 방향도 중요하겠죠. 특별히 오늘 이 시대는 속도가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빌게이츠라고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이슨 제임스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제목이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책 제목을 내기도 했는데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느리면 손해 보고, 느리면 빼앗기게 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디어를 먼저 터뜨리고, 대중화시키고 그것을 상품화해야, 그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먼저 해버리면, 그 뒤에 따라가는 사람은 똑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성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1등을 기억하는 것이지, 2등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속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빨리빨리 해야만 하는 게, 그게 성공의 비결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쩌면 빨리빨리를 가장 잘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국인의 몸에는 빨리빨리 DNA가 들어 있어서, 무엇보다도 빨리빨리 하려고 하는, 그런 습성들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늘 그래요. 저도 늘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조급하고 빨리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버스에 타려고 할 때나, 아니면 비행기를 타려고 할 때, 먼저 들어가고 싶고, 또 내릴 때도 먼저 내리고 싶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먼저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막 비행기 안에서도 먼저 들어가려고 하고, 나올 때도 먼저 나오려고 하는데, 그런데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까, 좀 약간 창피하더라고요.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다려주고 배려해 주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만을 위해서 이렇게 빨리빨리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배려해 주고 기다려주는 것도 큰 미덕이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마는, 아무튼 이 시대는 어쩌면 그렇게 미적거리다가는 꾸물거리다가는 모든 것을 다 놓쳐버리는 그런 시대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속도도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속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방향입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죠. 그 말을 누가 제일 먼저 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괴테라고 하는 문필가가 그런 말을 했다고도 하고, 톨스토이의 책에 나온다고 말도 하기는 하는데, 아무튼 아주 중요한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빠르게 한다고 한들, 만일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는 아마도 살아오면서 여러 번 들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했는데, 지나가는 마차를 불러 세워서 그 마차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부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데는 얼마나 걸리나요? 그랬더니 한 30분 정도면,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제 30분 뒤면 예루살렘에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행복하게 그 말을 타고 가다가, 마차를 타고 가다가 잠깐 졸았습니다. 한참 졸고 난 다음에 일어나서, 마부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얼마나 가야 합니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부가 하는 말이 “여기서는 한 시간 가야 됩니다.”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아깐 30분이라고 해놓고, 왜 한 시간입니까?” 그 마부가 하는 이야기가 이 마차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여리고를 향해서 가는 겁니다. 거리만 물었지, 얼마나 가까운가만 물었지, 어디로 가는가를 묻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하더라도 방향이 잘못되어 버리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한 그런 결과를 어쩌면 종종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겁니다.

물건을 주문하고 그래서 물건을 받게 되었는데, 조립해야 될 경우에, 어떻게 조립을 해야 합니까? 저는 너무나도 성급해서 일단 조립하고 봅니다. 제 아내는 기다려보라고 하고, 다 설명서도 읽어보자고 이야기를 하는데, 근데 막 조립하다 보면, 이상하게 부품이 하나 남아요. 이게 웬일일까 보면은, 잘 작동도 되지 않습니다. 알고 봤더니 거꾸로 잘못된 방향으로 한 것이죠. 그냥 가만 내버려 두고, 처음부터 잘 읽어보고 했더라고 한다면, 그냥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것을, 잘못 만들었기 때문에 잘못 조립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풀어야 하고, 또다시 조립해야 되고 해서, 세 배나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어서, 빨리 한 것 같았지만, 오히려 더 늦게 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방향이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 할지라도, 방향이 맞지 아니하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못한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열정도 중요하지만, 열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바른 방향을 향해서 가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열정으로 하면, 그 열정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이단 집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열정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데 아무리 열정이 많이 있어도, 그 열정이 표출되는 방향이 잘못된 방향을 향해서 표출되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특히 요즘에는 이단의 그런 피해에 대한 경각심이 잔뜩 높아져가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단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언론을 통해서,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이단의 폐해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정말 잘못된 이단 집단에 가게 되면, 큰 손해를 보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이단 집단에 가보면 아주 열정이 대단합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집회 참석도 열심히 하고, 정말 뭘 하든지 열정적으로 해요.

안타까운 것은 제대로 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열정이 없는데, 그래서 그들의 열정을 보면서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그런데 사실 잘못된 열정, 잘못된 방향을 향한 열정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것보다도 더 손해인 경우가 훨씬 더 많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좋은 방향에 바른 방향에 바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열정도 다 해야 되지만, 바른 방향을 향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또 점검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적인 열정이 대단했었지만, 그러나 잘못된 방향을 향해서 달려갔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0장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바울 사도는 지금 유대 민족을 향한 그런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유대민족도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유대민족도 나처럼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바울 사도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우리 유대민족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이 열정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열정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바로 된 제대로 된 지식 위에 기초한 열정이 아니라, 잘못된 근거 위에 잘못된 지식 위에 기초한 열정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지도 못하고, 바른 길로 이끌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들도 좀 제대로 된 길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망을 오늘 읽은 말씀 로마서 10장 2절 말씀 가운데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바울 사도의 옛날 모습이 그랬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회심하기 전에 유대인들처럼, 일반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열정은 있었지만 잘못된 방향을 향해서 열정이 있었던 것이죠. 이게 옳은 길인 줄 알았어요. 이게 정말 맞는 길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잡아오기도 하고, 심지어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기도 하면서, 정말 유대교를 보호하는 일에 열정을 냈던 사람이 바울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열정을 내면서 저 다메섹에 있는, 다마스커스(Damsacus)라고 하는 곳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달려가는 도중에, 그 길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게 될 때에, 바울 사도는 그때 완전히 변화되게 된 것이죠.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이 잘못된 길이었구나. 내가 지금까지 이게 옳은 길인 줄 알고 달려왔는데, 잘못된 길을 달려가고 있었구나. “지금까지 내가 엉뚱한 방향을 향해서 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순간 완전히 180도 변화되어서, 그때부터는 어떤 삶을 살게 됐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전하는 자의 삶을 살게 된 것이죠.

예전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 내어버리고, 예전에 달렸던 그 길을 다 포기해 버리고, 이제는 주님을 향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5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과거에는 유대교회에 있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잘못된 걸 알았어요. 그래서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해서 달려가게 된 것인데, 그것이 복된 길이고 그것이 정말 바른 길이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내가 새로운 길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동족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내가 예전에 그 길을 갔었는데, 그 길이 잘못된 길이니까, 돌아오시고, 예수님에게로 오세요. 예수님에게로 바른 방향을 향해서 가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오늘 바울 사도의 그런 고백의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고 있는 그 길은 예전에 바울 사도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던 그 길을 여전히 가고 있는 거예요. 저렇게 가면 안 되는데, 저렇게 가면 망하는데, 저렇게 가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여러분들 그 길로 가지 마시고 바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 마음이 이해가 돼요. 이제 우리 어르신들이 되면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면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손주들을 향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없나요? 있어요. 얘가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내가 옛날에 그렇게 살았다가 내가 실패했는데, 너 그렇게 살면 너도 망하는데. 옛날에 자기 자신의 경험을 생각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잖아요?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게, 우리 어른들의 말인데, 잘 안 들어요. 그런데 만일 내가 그 길을 갔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말해주고 싶은 게, 그게 자연스러운 심정일 겁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우리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제 아내가 회전근개 파열이 돼 가지고, 그래서 어깨가 아파서 어깨를 잘 쓰지 못하고 손을 쓰지 못하고, 막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얘기가 자기도 회전근개 파열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었고, 그래서 수술까지 받았다고 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런데 자기가 왜 수술을 받게 되었는가? 처음에 조금 아팠을 때 누구를 만났다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아 거기가 아픈 것은 여기 마사지도 좀 막 하고, 그리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그래서 고쳐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 말에 따라서 열심히 했다는 거예요. 막 마사지도 받고 뭐 뭐 또 맞고, 막 그러면서 뭐 또 푸시업도 막 운동도 하고 하면서, 했더니 결국 파열돼 가지고 수술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에게 하는 말이 제발 그렇게 하지 마세요. 제발 그렇게 하지 마세요. 그 수술하는데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본 길이고, 망했던 길이고, 잘못된 방향을 해서 갔던 그 경험 때문에, 이야기를 해주는 거죠. (제 말도 한번 의사한테, 한번 체크해 보고, 따라 하십시오. 괜히. 저는 신앙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가 나갈 수 있으니까, 한번 확인해보고 하시기를 바라고요.)

제가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허리가 아팠어요. 허리가 아파가지고 3, 4번 디스크가 나오고, 그래서 다리가 저릿저릿하고, 그리고 잘 걷지도 못하고, 그러는 일이 있어서, 그랬는데, 의사 선생님한테 가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의사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가 저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묻더니만 물어보는 거예요. 혹시 다리를 높게 들고 의자에 누워서 이렇게 혹시 있었던 적이 있느냐고 물어요. 며칠 전에 제가 책상 위에다 다리를 딱 얹히고 피로를 풀기 위해서 다리를 높게 들고,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미국에 있을 때 일입니다.) 그래서 앉아서 잠깐 졸고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아프다고 그랬더니, 그게 디스크가 빠지는데 아주 치명적입니다. 그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아무튼 그것 때문에 한 달 넘게 고생을 했는데, 그래서 제 옆에 누가 다리를 올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얘기해 줍니다. 우리 딸을 우리 딸이 자꾸만 그렇게 해요. 제 아내도 가끔 그럴 때가 있어가지고, 바로 올리지 말라고, 차 타고 가면 운전하고 가면, 옆자리에 앉아서, 발을 보네트에다 올려놓으려고 그러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우리 딸한테, 막 제가 이야기를 해요. 왜냐하면 고생해 봤으니까,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고, 그 이야기를 해주는 그게 우리들의 마음이잖아요?

바울 사도가 지금 자기가 예전에 잘못된 열정, 잘못된 그런, 그 위를 달려갔는데, 거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통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그 기쁨 때문에 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잘못된 지식에 따른 잘못된 열정을 할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길로 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잘못했던, 그 잘못된 길이 잘못된 방향이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 10장 3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의 신앙이 어떤 신앙이었냐면,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고, 그저 내 의를 세우려고 했다는 것, 내가 의롭게 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고, 공로를 통해서, 내가 착하게 살고, 내가 의롭게 사는 걸 통해서, 무엇인가 해보려고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로마서든지 갈라디아서든지 어느 서신을 읽어보든지, 바울 사도는 전반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라고 하는 것,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지만, 그 서신서 후반부에 가면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냐면, 그러니까 “여러분, 이제 막살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가 되었으니, “이제는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에서 계속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실컷 설명한 다음에, 그리고 뒤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죄악을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는 게 중요하고, 기도하는 게 중요하고, 예배를 드리는 게 중요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게 중요하고, 전도하는 게 중요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그런데 이 중요한 것들을 다 하는데, 그 사이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열심을 다한 후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솟아오르게 되는 거죠. 자랑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나는 이 정도 열심히 수고했다. 나는 이만큼 열심히 신앙생활했다. 나는 열심히 이만큼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다.”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과 자랑거리가 마음속에 솟아날 뿐만 아니라,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비난하고 멸시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렇게 지키지 않는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쁜 짓을 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그게 바로 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고, 내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될 겁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함정에 빠지기가 쉬워요.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함정이고,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졌던 함정이고, 우리들도 그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나의 의를 내세우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내 의를 가지고서는 정말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해주신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를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합니다. 모든 재산을 다 망쳐버리고, 잃어버리고, 그리고 악을 행하다가 빈털터리가 되어서, 아버지 앞에 돌아올 때 이 탕자는 아버지 앞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버지,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아버지라고 말할 그런 용기가,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자신이 없습니다. 그저 저를 품꾼들처럼 봐주세요. 아버지 집에 품꾼 데려다 놓고 일 시키고 밥 먹여주듯이, 저도 품꾼들처럼, 그냥 집에 데려다 놓고, 밥 먹여주는 그것만 해주면 고맙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 아버지의 은혜가 풍성하게 그 아들에게 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첫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큰 아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아버지의 뜻을,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완벽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아버지의 사랑에 접근을 못하는 거죠. 특별히 그 말을 할 때는, 어떤 말을 어떤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아버지,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 명을 한 번이라도 어긴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그 큰 아들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예요? “얘야, 집에 들어가자.” 하는데, 안 들어가고 집 밖에 서서, 못 들어가겠다고 아버지를 거역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자기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사실을 내세울 때, 아버지의 사랑을 만날 수도 없었고, 아버지의 은혜를 체험할 수도 없었던 것이죠.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보면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부릅니다. 인력 시장에서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데려다가 일을 시키는데,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에게 무엇을 요구할 권리가 없어요. 시급만 줘도 감사해요. 나를 한 시간이라도 써줘서 너무나도 고마워요. 그래서 주인의 그 자비로우심에, 자신의 마음이 열려서, 주인의 자비로우신 처분을 받고 있을 때, 놀랍게도 주인은 그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루치 일당을 선물로 주는 거죠. 그런데 12시간 내내 일한 그 일꾼은 자기가 12시간 동안 일했기 때문에 자기가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생각해 보면, 그날 그 포도원 주인이 그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수많은 그 인력 시장에 널려 있는 그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도 못하고, 하루를 공치고 빈손으로 들어가야 될 그 상황 가운데서, 주인이 나가 그 사람을 선택해 준 그 고마움과 은혜는 다 망각해 버리고, 그 고마운 분에 대한 접근이 안 되는 것이죠.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내가 이만큼 철저했고, 내가 이만큼의 공로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오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을 보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12절 말씀에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자기는 이 모든 사람들보다 완벽한 것 같아요. 나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는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가 없었고, 전혀 잘못된 방향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겁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이었소이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나아가는 자에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선언해 주시는 겁니다. 바리새인보다 이 세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고 선언해 주신 것이죠.

그 옛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할례 받은 민족이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 때문에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왔지만, 예수님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할 때, 거기서 소망이 있는 거예요,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구나. 내가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구나”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회복될 수 없구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주신 은혜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갈 방법이 없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우리들의 가정 가운데서 우리들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내가 잘한 것만 기억하고 내가 뛰어난 것만 기억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소망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 허물과 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있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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