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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람산 기도 (눅 22:39-46)

브라이언 트레이시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100만 불짜리 습관>이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우리가 습관을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모든 성공과 실패의 95%를 습관이 결정한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이 형성이 되면 성공으로 이끌겠지만, 나쁜 습관이 형성이 되면 실패로 이끌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명한 책인데요. 만일 당신이 100만 달러를 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다음에 다시 또 100만 달러를 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 그 모든 재산을 다 날려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100만 달러짜리 습관을 익힌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한 번 무엇인가를 해본 사람은, 습관 가운데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하는 그런 말이어서,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습관의 중요성은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가운데서, 감람산에 가셔서 습관대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9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 어쩌면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역을 하나 남겨놓은 그 시점에, 그 주님께서 하신 일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습관대로, 예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감람산이라고 하는 것은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그런 산입니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가서 보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편에 보면, 감람산이라고 하는 그런 산이 있는데, (감람이라고 하는, 감람나무라고 하는 것은 올리브나무라고 하는 것을 중국 말로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올리브 산이 성전 있는 곳 건너편 동산에 있는 곳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이 되면, 전국에서부터 전 세계에서부터 예루살렘에 몰려와 예배하기도 하고 순례하기도 하는데, 낮에는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저녁이 되면 예루살렘에 머물 곳이 없어서 예루살렘 동쪽으로 가서,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동쪽으로 가서, 그쪽 동쪽 지역에 있는 마을에 머물기도 하고 그렇게 했는데, 예수님도 낮에는 예루살렘에 계셨지만, 저녁이 되자 이제 감람산으로 올리브산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 가운데 가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올리브산에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고, 그리고 그 옆에 많은 올리브 나무들이 있는데, 어떤 올리브 나무를 보니까, 둥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올리브 나무가 있었습니다. 가이드가 설명해 주기를 이 나무가 수령이 최소한 1500년 이상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2천 년 정도 되었을 수도 있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바로 그 시간에 아마 조그마한 나무였을 가능성도 있겠다 하는데, 가능성이라고 하지만 참 그 자리에서 많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산에서 예루살렘이 바라보이는 그 감람산을 보시면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했던 그 자리를 둘러볼 수가 있었는데요. 이제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하실 그날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습관처럼 기도하러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평소에 기도의 습관을 연습해야 되고, 때가 될 때마다 기도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모든 삶에 여러 가지 형편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를 오래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매 순간순간마다, 일을 하기 전에, 무엇인가 힘든 일을 만날 때,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를 때, 또는 절망이 생길 때, 모든 순간들 순간들이 있을 때마다, 그때 잠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하는데요.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까? 평상시 행동하던 대로, 평상시 연습하던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연습이 중요하고 습관이 중요한 것인데요.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매년 여러 번에 걸쳐서 연습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화재 훈련이었습니다. 화재가 났다고 하는 그런 가정을 하고서, 아이들이 기어서 탈출하는 훈련을 매 학기마다 연습을 하는 거죠. “불이 났다”라고 하는 그 소리와 함께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어 나가는 겁니다. 연기에 질식사하지 않기 위해서, 엎드려서 기어 나가는 연습을 매 학기마다 매번 했는데도,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정작 화재가 발생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평상시 연습한 대로 엎드려서, 그래서 연기에 질식사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보호해 가면서 빠져나가는 그런 훈련들을 하게 될 때, 비록 화재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안전하게 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재가 발생하거나 어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인명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연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재가 나거나 어떤 무서운 일들이 생기면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하다가 넘어져서, 사람에 밟혀서 혹은 사람들 때문에 그래서 더 많은 인명사고를 내게 되는데, 늘 기다리며 순서를 기다리면서 엎드려서 빠져나가는 여성과 노약자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그들을 먼저 내보내고 순서대로 나가는 연습을 한 그런 훈련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도, 질서를 지켜서 그래서 그만큼 문제가 적게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습관에 따라 기도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될 그 순간에, 십자가의 그 무게가 짓누르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 말로 형연할 수도 없는 그 엄청난 고통과 그 슬픔과 스트레스 가운데 주님께서는 습관을 따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십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거죠.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위기를 맞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반응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평상시 우리가 하던 대로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평상시 거짓말을 많이 하던 사람은 위기의 상황 가운데 거짓말을 하게 되어 있고, 평상시 돈으로 해결하기 좋아하던 사람은 돈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할 것이고, 평상시 불평과 원망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위기의 상황이 닥치게 되면 오히려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되는 것인데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권면해 주셨습니다. 4절과 46절에서 두 번에 걸쳐서 시험에 들지 않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시험에 들지 않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늘 시험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서 해주고 있는 말씀인데요. 베드로전서 4장 12절의 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문제는 시험거리가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생긴다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 닥치는 문제와 시험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문제인 것이죠. 기도하는 자들은 시험을 만날 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 시험을 이기게 되는 것인데요. 기도의 습관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쉽게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이 십자가를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했는데요.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십자가를 옮겨 달라고 하는 이렇게 기도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약간 의문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신 주님이신데, 어떻게 이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나약한 기도를 할 수가 있겠는가?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기도를 하는가? 우리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요. 첫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100% 완벽한 신이었기도 하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100%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들과 전혀 다른 게 없는 완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들과 똑같은 감정과 똑같은 아픔과 똑같은 슬픔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밥을 먹지 아니하면 허기를 느끼셨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셨고 죽음을 바라보시며 슬픔을 느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피곤하시면 주무셔야만 했었기도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다고 한다면 아무 고통 없이 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를 당해야만 했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당하셨던 그 고난의 무게가 무엇인가 너무나도 엄청난 큰 고난인 것이죠. 책임감의 무게 고난의 무게가 예수님의 그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부활절을 앞두고 미국에서 사역할 때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돌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 행사를 위해서 부활절 연합 찬양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는 가운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엄청난 책임감 가운데 제가 주체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게 내 잘못인가? 나의 책임인가? 우리 교우가 죽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견디기 어려운 그 책임감의 중압감, 그것을 느끼면서 제가 그때 조금이라도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겟세마네 동산 가운데서 주님께서 짊어지셨던 그 주의 책에 책임감에 중압감이, 온 인류를 향한 그 모든 짐을 홀로 지셨던 그 책임의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 책임의 중압감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슬퍼하며 고통 가운데 울부짖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와 똑같은 우리의 심성을 가졌던 주님께서 그 죄책에 엄청난 중압감을 지시고 하나님 앞에 고통 가운데 울부짖고 있는데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정답을 말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솔직한 감정과 소망을 말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반복하고 정답을 적어내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나의 간절한 소망과 나의 슬픔과 아픔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엄청난 심적 고통 가운데서 그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것과 같은 그 아픔으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제목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피하기를 원했던 이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고난을 일부러 자취하기를 원하고,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종종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렇게 고난을 자취하는 것이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 가능하면 고난이 없는 게 정답이고 가능하면 편안한 것이 정답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은 옳은 것이죠. 바울 사도도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기꺼이 그 고난을 짊어지면서 선교 사역을 했지만, 바울 사도가 했던 그 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 교회와 나누었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면,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환란 가운데서 나를 벗어나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를 간절하게 부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가능하면 이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기도한 이후에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했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주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힘을 북 돋우어 주었다고 하는 말씀이 43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내 팽개쳐진 것 같고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나는 외로운 것처럼 보이나,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시각으로 본다고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내팽개 지쳐진 것이 아니라, 금 그릇에 담겨 24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런 모습이 요한계시록의 환상 가운데 보여 있고 있는 것이고, 또 금향로에 담겨서 그 향기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소중하게 바라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냥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하는 가운데 주의 천사가 함께하셔서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고 우리를 힘내게 만들어 주시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힘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면서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냐면,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게 된 것이죠. 우리가 기도하면서 우리의 뜻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는 우리의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 앞에 아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의 간절함을 하나님 앞에 토로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기도하면서 항상 질문을 던져야 될 것은 과연 내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기도의 제목을 바꾸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나의 남편을 남편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우리 자녀들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어떻게 바뀌어야 됩니까? 사실은 우리 자녀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우리 아이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기도의 자리로 기도의 제목이 바꾸어 나가야 되는 것이오. 저 사람이 바꾸기를 위해서 기도하기보다, 하나님 내가 더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더 주시옵소서. 기도의 제목을 바꿔 나가야 되는 것이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기도라고 하는 것은 대화이기 때문에, 대화는 내 말만 하는 것이 대화가 아니고, 내가 말을 해놓고 내 말에 대해서 상대방이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는지를 들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나요? 지금도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려고 한다면 들려주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삶을 원하시는가?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을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도의 제목을 바꾸어 나갔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기도하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게 되었고, 담대하게 그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남겨놓으신 십자가가 있어요. 우리에게 사명이 있고 사명에는 십자가가 따르게 되어 있고, 고난이 있게 마련이고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해 나가는 가운데 시험거리가 늘 있을 수밖에 없으나, 그러한 모든 상황 가운데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이 한 주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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