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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롬 10:4-13)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0장에 13절의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데요. 누가 영생을 얻으며,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이 오늘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신약 성경에만 처음 기록된 말씀이 아니고, 사실 요엘서 2장 32절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 때 이미 이 말씀이 선포되었는데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복음 중의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복음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쁜 소식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 중에 부르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서, 못 부르겠다고 하시는 분 계십니까? 없어요.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거예요. 어린아이도 부를 수 있고, 내게 장애가 있어도 부를 수 있고, 가난해도 부를 수 있고, 그리고 배우지 못했어도 부를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이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모두에게 열린 것이 바로 이 구원의 복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가운데 율법을 완벽하게 잘 지켜서, 그 어느 하나의 율법 조항도 어기지 않고, 완벽한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도를 많이 닦은 사람만, 높은 경지에 올라간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가운데 선착순으로 달리기를 해서, 1등으로 들어온 사람만, 금메달을 딴 사람에게만 구원을 준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이냐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야말로 복음 중에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부르기만 하면, 누구든지 주님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거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데요.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니까,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냥 예수님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세상에서 마음껏 죄를 지으며,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그냥 주일날 나와서 찬송 부르고, 주일날 나와서 예배드리고, 주일날 나와서 주여 부르기만 하면, 그러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든지, 당연히 주님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향해서 비난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이유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도 위선적이라고 하는 것이죠. 온갖 나쁜 짓을 다 해놓고, 교회당에 와서 주여 부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위선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너무나도 마음에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서, 교회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 말씀은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냥 아무렇게나 죄를 마음껏 지으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면서 주님을 부르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을 받게 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도 있지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죠? 마태복음 7장 21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하고 부르면, 구원받습니까? 못 받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한 구절만 읽을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를 다 종합해서 읽어야 하는 것인데요.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에, 주님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받을 것만 같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부르기만 했으니까, 나는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으니까,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주를 부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분명하게 분별하면서, 잘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는 로마서 10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을 읽으면서 그냥 “입으로 시인만 하면 괜찮구나.”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도대체 구원의 조건이 무엇일까? 입으로 시인하는 게 구원의 조건이라고요? 예! 내가 시인하죠. 나 예수님 믿어요. 나 예수님 믿습니다. 교회 다닙니다. 내가 그렇게 시인하면,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구원의 조건이 입으로 시인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할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는 임종 직전에 불신자들을 향해서, 우리 부모님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라도 찾아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간곡하게 권고하곤 합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대답 좀 해보라고, 죽기 전에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대답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니, 예수님 믿지? 예수님 믿는다고 대답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서, 그래서 병상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러면 구원을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물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때라도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주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그렇게 유도하는 것이, 그들에게 복음을 마지막으로라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도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마음을 열면서 낙원의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라도 아직도 숨이 살아 있다고 한다면, 마지막에라도 가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그냥 우리가 마음대로 막살아도, 그냥 내 마음이야 어떻든지 간에,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든 말든, 그냥 입으로 우리가 시인하기만 하면,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는 전도하면서 그 전도 대상자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함께 따라서 기도하라고 유도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입으로 시인하게 만들면, 그러면 구원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런데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나의 주로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이 돼요. 까짓것 예수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주여, 믿습니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1세기에 이 로마서를 쓰고 있을 이 당시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냐면, 그 시대의 주(主)는 오직 로마 황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전 로마 제국을 다스리면서, 그 황제를 향하여 신(神)이라고 숭배하고, 경배하지 아니하면, 죽여버리는 그 살벌한 그 상황 가운데서, 로마 황제가 나의 황제가 아니라, 로마 황제가 나의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의미했는데요. 내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냥 내가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가운데,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고 말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내가 주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황제인 로마 황제를 내가 거부해 버리고, 참되신 주님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고, 그게 바로 주를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의미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이 세상의 황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의 우상이기도 하고, 탐욕의 우상이기도 하고, 성공의 우상이기도 한 것이죠.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여전히 추구하면서, 이 세상의 방식대로 마음껏 살면서, 그냥 교회에 와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여 주여 그렇게 말로만 기도한다고 하면, 그게 참된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예수님을 모셔드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그게 예수님을 나의 주로 영접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시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속에 왕좌의 주인으로 앉아 계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이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으면, 사랑해야 돼요. 누군가 내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까지 돌려대라 했으면, 대야 되는 거예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대로 그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마음의 왕좌를 내어드리지 않은 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이죠. 어디에 비유할 수 있느냐면, 탕자의 비유의 예, 거기에 비유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느 날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보다 세상에 가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해 보였고, 거기서 사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아서, 모든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든 우상이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약속을 하면서, 사실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우상인데, 탕자는 얼마 가지 아니해서 모든 재산들을 다 낭비해 버리고, 비참한 상태까지 빠져버리게 된 겁니다. 그때 이 탕자는 아버지를 향해서 돌아가는 거죠. 아버지를 부르는 겁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와 하나님 앞에, 하늘에 죄를 지어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부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받아주세요.”라고 이야기할 때, 아버지를 부를 때, 그 아버지가 그 탕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시는 것이죠. 아버지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가서, 네가 잃어버린 돈을 다시 다 벌어와라. 말씀하지 않았어요. “네가 이제는 모든 것을 다 회복해서 돌아와라.” 말씀하지 않고, 그냥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그 아들을 무조건 영접해 주고, 그래서 금가락지를 끼우고, 옷을 입혀서 아버지의 상속자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었는데, 그런데 그 탕자가 이 집 안에 들어와서 이제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게, 그게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지, 여전히 세상 속에 있으면서, 저 딴 곳에 있으면서 하나님 나의 아버지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주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을 부르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율법을 예수님께서 마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방법이 있었는데, 구약 성경에서의 방법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고,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여전히 붙들고 있던 길이 무엇이냐면,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로운 길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무엇이 되시니라?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 율법을 끝냈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마쳤다는 거예요. 율법이 예전에 있었는데, 율법이 이제는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것인데,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율법을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전부 무효화됐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율법 중에서도 의식법이라든가 시민법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이제는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법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그런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다 충족시켰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텔로스라고 하는 말입니다. 텔로스라고 하는 헬라어 말의 의미가 끝, 종말, 마침, 목적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 텔로스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자고 한다면, 로마서 6장 4절의 말씀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목적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주시는 그런 목적이요 마침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번역해 놓은 성경이 영어 성경 가운데 있는데, “뉴 리빙 트랜슬레이션”(NLT)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율법이 주어진 목적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를 믿는 모든 자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이다”라고 로마서 10장 4절 말씀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됩니까? 옛날에는 율법을 지키는 그 길만을 가야 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요구들을 다 성취해 버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새로운 길 쉬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죠.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쉬운 길입니까? 어려운 길입니까? 제 질문이 쉬운 질문입니까? 어려운 질문입니까? 예수님을 부르는 거, 주님을 부르는 게, 쉬운 길입니까? 어려운 길입니까? 쉬운 길이에요! 왜냐하면 율법의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율법의 길은 그 누구도 성취할 수 없는 길이고, 그 누구도 그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지고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이 율법의 길인 겁니다. 하지만 그 율법의 길 대신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다 충족시켜서, 이제는 새로운 길을 예수님께서 내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다시 말하자면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그 믿음의 길을 가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아주 쉬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죠.

아주 쉬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마서 10장 6절에서부터 7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하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6절 7절 말씀의 의미를 좀 이해하시겠습니까? 좀 헷갈리시죠? 이해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아마 제가 볼 때는 번역하는 사람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번역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좀 풀어가지고, 직역은 아닌데, 풀어가지고 설명해 놓은 것이 메시지 성경의 번역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 번역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모세가 기록했듯이 한사코 율법 조문을 이용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다는 자들은 곧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깨알 같은 계약서 조항들에 일일이 얽매여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바른 삶을 형성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메시아를 모셔오겠다고 위험천만하게 하늘까지 올라갈 일도 없고, 또 메시아를 구출하겠다고 위험천만하게 지옥에 내려갈 일도 없습니다.” 조금 이해가 되십니까? 조금 이해가 될 겁니다.

율법의 길은 뭡니까? 내가 의를 얻기 위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지키는 길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어려운 길이에요. 가다가 늘 넘어지고, 가다가 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주로 부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은 쉬운 길이에요? 어려운 길이에요? 쉬워요! 어떻게 쉬워요? 그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하늘까지 갈 필요 없다는 거예요. 하늘까지 올라가서 예수님 예수님을 데리고 와야 될 정도로, 예수님이 그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저 무저갱까지 들어가서, 거기서 예수님 데리고 와서야, 겨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 우리가 저 멀리까지, 저 해외까지 가서, 하늘나라까지 가서, 저 바다 건너까지 가서,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그렇게 억지로 힘들게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 주로 고백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원을 받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꼭 결혼에 비유하고 싶어요.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결혼을 하는 게 쉬워요? 어려워요? 네? 어렵다고 다들 얘기를 하더라고요. 근데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첫 번째 쉬운데, 왜 쉬운가? 아무나 결혼할 수 있기 때문에 쉬워요. 자격이 안 돼서, 결혼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의사고시 패스해야 결혼시켜 준다 그랬나요? 아니요. 교장 시험 합격해야 결혼시켜 준다 그랬나요? 아니요. 백만장자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다 그런가요? 아니요. 아무나 결혼할 수 있어요. 아무나 결혼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결혼했어요. 지금으로부터 30 몇 년 전에 제가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신학생이었어요. 돈 한 푼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제가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못해요. 결혼할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아파트를 구입할 수가 있겠습니까? 가전제품 하나 구입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구입할 능력이 한 푼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했어요. 어떻게? 아파트도 없이 가전제품도 하나도 안 사고, 예물도 없이 예물도 그냥 시계 하나만 겨우 하고, 신혼살림을 어디서 했는가? 우리 장모님 집에 들어가서 살았어요. 조그마한 집인데, 거기에 방 두 칸인가 세 칸짜리 있었는데, 처남은 여기 있고, 우리 장모님은 이쪽 방에 있고, 제 방이 살던 방은 한 한 평이나 두 평짜리 되는 그 방에 그 방에 들어가서 신혼생활을 했어요. 왜? 돈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결혼이 되더라고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결혼이에요. 돈이 없어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없어도 할 수 있고, 가난해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어도,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결혼을 하려고 마음먹는 게,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어려워요! 왜냐하면 과연 내가 이 남자랑 평생을 살 수 있을까를 따져야 되기 때문에, 과연 내가 이 여자와 평생을 같이 살아가도 될까? 따져야 되기 때문에 그렇죠. 아무나 할 수 있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결혼이잖아요? 그래서 고민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고민해요? 결혼식 올리기 전날까지 고민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우리 딸 결혼할 때, 마지막에 가서 이야기했어요. 얘야! 친구들 다 초대했고, 결혼식 다 준비했고, 다 했는데, 너 안 해도 돼. 지금 결혼하기 싫으면, 지금 포기해도 괜찮아. 너 정말 이 사람이랑 결혼할래? 결혼하겠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예수님을 나를 따르려고 하면, 먼저 앉아서 계산해 봐라. 내가 예수님을 따라도 되겠는지 안 되겠는지 계산해 봐라. 말씀해 주셨어요. 어떤 계산이요? 망대를 세우는 자가 내가 가진 예산을 가지고 망대를 세울 수 있을지, 예산을 계산해 보고, 망대를 세워야지, 계산도 안 해보고 무작정 시작했다가 기초만 놓고 그만두면 그 무슨 우스운 꼴이냐? 전쟁하려고 한다면 내가 가진 군인들로 저 상대 적국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따져보고 전쟁을 해야지, 전쟁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미리 가서 화친해야 되지, 먼저 따져보고 무엇인가를 한다면 하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어떻게 따라야 되는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내게 주신 그 십자가를 져야 된다고 하는 결단을 하고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쉬운 길이고, 누구나 다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과연 내가 주님을 따라도 될 것인가? 내가 내 평생 주님 앞에 나의 삶을 바칠 것인가 결단하며, 고민하는 가운데 따라가야 하는 것이죠.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로 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뉴스가 나온 것이 있는데요. 반지하방에 살던 30대 어떤 총각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문이 잠겨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 화장실 안에서 문을 열려고 하니까 문이 열리지 않는 거예요. 혹시 뉴스 들으셨습니까? 어떻게 그건 다 들어요? 문을 열려고, 그 안에 있는 거 막 뜯어서 때리기도 하고, 막 문을 부수려고도 하고, 안 되니까 천장을 뜯기도 하고, 그러기를 5시간 동안 하다 보니까 지치고 너무나도 힘들어서, 이 총각이 이러다가 내가 고독사, 그래서 화장실에서 혼자 죽겠구나 생각이 들던 그때에, 이 총각이 문득 생각난 게 있어요. 휴대전화에 음성 인식 기능이 생각이 난 거예요. 그래서 불렀습니다. “빅스비! 119에 전화해 줘.” 하는데, 휴대전화가 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요. “빅스비! 119에 전화 좀 해줘.” 그것도 안 되고, 저도 안 되고, 그러니까 “119에, 아빠한테 전화해, 엄마한테 전화해 줘.” 근데 가까스로 한밤중에 12시가 넘어서 부모님에게 전화 통화가 됐는데, 통화되는 줄도 모르고, “119에 전화해.”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119에 전화해서 그 아들을 살려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참 재미가 있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전화기를 놓고 제가 연습을 해봤어요. “쉬리야! 119 전화 좀 해줘.” 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아무리 애플 전화를 가지고, “쉬리야” 내가 매번, 우리 집사람이 하면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데, “야, 나는 큰일 났다. 이거 죽게 생겼구나.”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셔요. 우리가 미사여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멋지게 기도해야만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음소리를 가지고 울부짖으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그 아들의 울부짖음마저도 외면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부르짖는 그 기도의 소리에 응답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이 세상에 인생의 길을 가는 동안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세상의 율법에, 그 굴레에 얽매여 힘들게 힘들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의를 내세우며 사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주님 앞에 자신의 더러움을 다 내어놓고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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