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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발 (롬 10:14-15)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는 그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주님을 영접하고 나의 주로 모시기만 하면,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아주 쉬운 길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가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겪어서, 그리고 엄청난 그런 우리의 힘과 노력을 다 해가지고, 겨우겨우 따내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로 값없이 거저주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고도 너무나도 편한 길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다른 거짓 종교들은 참된 종교인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우리 기독교의 진리와는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이 세상에 다른 종교들 거짓 종교는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열심히 수고하고 정말 열심히 노력을 다해서, 그것을 얻어야 된다.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함으로써 그것을 얻어야 된다”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이 세상 거짓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 거짓 종교의 가르침 특별한 일을 해야만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주로 세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이죠. (사진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거짓 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들은 무엇인가? 주로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천국을 얻을 수 있고, 득도할 수 있고,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무엇이냐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금욕적인 삶을 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금욕적인 삶을 삶으로써, 우리가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희생적인 헌신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겁니다. 우리의 것을 바치고 우리의 삶을 희생하고, 무엇인가를 자꾸만 (신에게) 드려서, 그래서 구원을 얻기도 하고, 천국을 얻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 옛날 천주교회에서 면죄부를 팔아서, 그 면죄부를 돈 주고 사면 구원을 얻게 되고,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는 그런 가르침을 한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거룩한 삶 정말 아주 최상의 거룩한 삶, 정말 도덕적이고 정말 의롭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그래야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얼마 전에 나온 뉴스를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아프리카 케냐의 동부 해안도시 말린디라고 하는 곳에서 65명의 시신이 발굴되었다고 하는 뉴스가 이번 주에 나왔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이 65명의 시신이 발굴이 됐는데, 병원 이송 중에 죽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총 73명의 사망자가 케냐 동부의 말린디라고 하는 도시에서 이렇게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것이죠. 이 사람들이 왜 죽었느냐? 굶어 죽었다고 그래요. 굶어 죽었는데, 왜 굶어 죽었는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이비 교주의 말에 따라서 굶다가 죽은 겁니다. 사이비 교주였던 맥켄지 은탱게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자신이 모아놓은 신도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는가? 굶어 죽어야 간다는 거예요. 지금 이렇게 먹고 잘 살고 그러면 전국에 못 가고, 당신들이 굶어야, 그래서 굶어서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신뢰하고 어리석고 우매한 신도들이 굶기 시작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굶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기꺼이 굶는 것이죠. 그래서 굶으면서 함께 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황당한 사건이 지구상 어느 한 편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런 황당한 주장과 비슷한 아류의 주장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고, 놀랍게도 그런 황당한 주장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황당한 주장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고 그 주장을 칭찬하고 있고, 언론과 방송에서 띄워주고 있습니다. 무슨 주장을 하나요?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행복하다.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극락에 간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아서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다 내어버리고, 과도한 모든 욕심들을 다 내어버리면,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득도할 수 있고 경지에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이죠.

과도한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과도한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하는 그 진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해서, 그러니까 아예 소유 자체를 버리면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인 비약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도한 욕심은 불행을 초래하고, 고통을 초래하니까, 그렇다고 하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아 과도한 욕심을 버려야 되겠구나! 우리가 욕심을 부리며 살면 안 되겠구나! 내 마음을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정당한 결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정당한 결론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비약을 해서 그러니까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행복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 소유라고 하는 것은 고통만 줄 뿐이고, 그러니까 모든 소유를 다 내버리면, 그러면 행복해질 거라고 하는 논리적 비약으로, 과도하게 극단적으로 적용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과도한 욕심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하는 그 진리에서부터,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고 하는 논리적 비약으로 그렇게 껑충 뛰어버려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무소유로 사니까, 정말 저 사람은 행복한가 보다. 그러니까 무소유가 되면 행복할 것이고, 성불하게 될 것이고 해탈하게 될 것이고 경지에 올라갈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그래야 천국에 가고,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논리적인 비약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인지하지 못한 채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가족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니까, 그러니까 가족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얽매이는 거 다 끊어버리고, 이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그래서 출가해서 혼자 도를 닦으면, 그러면 우리가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말에 속아서 그래서 출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겁니다. 결혼하지 말고 혼자 독신으로 살아야 된다. 금욕주의적인 그런 주장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면서, 실제로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죠. 사실 그러한 것은 굶어야 천국에 간다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금욕주의적인 그런 주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그러한 금욕주의적인 주장에 그냥 무분별하게 뛰어들어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흥청망청 아무렇게나 쾌락적인 삶을 살아도 좋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방탕한 삶을 살아도 괜찮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도 괜찮고,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런 엉터리의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과도한 욕심을 버리는 것은 맞는 것이지, 성경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특별히 바울 사도는 고백하기를 나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자족하는 비법을 배웠는데, 가난해도 그것으로 만족해 하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물질이 있어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거기에 내 삶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부에도 내가 처할 수 있는 그런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우리들도 이 물질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족할 수 있는 그런 비법을 비결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디모데전서 6장 6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그리고 정말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짓 종교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그런 과도한 욕심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아예 소유 자체를 버려야 하고, 아예 결혼도 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되고, 그리고 또한 금식을 해야 되고,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고, 우리의 몸을 자꾸만 고통스럽게 만들고, 정말 힘들게 만들고, 우리의 삶 자체를 정말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오히려 천국을 얻는 길이다.”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주장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짓 종교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우리가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하고, 어떠한 경지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헌신을 해야 된다. “희생적으로 무엇인가를 드려야 된다.”라고 말하는 종교들이 있습니다. 주로 저급하고 미신적인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런 말이죠. 우리가 신에게 무엇인가를 엄청난 희생을 해가면서 바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신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비싼 돈을 내고 부적을 붙여야 한다든가, 소원을 담은, 그 소원을 담은 등을 달아야 된다든가, 아니면 소원을 적은 기와를 돈을 많이 주고 사야 된다든지, 굿을 해야 된다든지, 사찰을 짓든지 불상을 짓든지, 우리가 종교적으로 내 돈을 희생해가면서, 그래서 무엇인가를 바치면,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고, 극락에 갈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공양미 3,000석과 같은 그런 엄청난 재물을 바쳐야, 그래야 눈이 떠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인데, 주로 저급하고 미신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것들입니다.

아주 오래된 선교사님의 편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갔던 어떤 선교사님이 보고한 선교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아마도 10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인 것 같습니다.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어떤 엄마가 한 아이를 물에 빠뜨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를 빠뜨려서 자기 아이를 죽여버린 것이죠. 그래서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그 엄마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왜 당신의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입니까? 그랬더니 이 엄마가 울면서 대답을 하는 거예요. 무당이 나한테 얘기를 했는데, 나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한 아들이 지금 시름시름 앓고 있고,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아들을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을 죽일 정도로 그런 희생을 내가 해야, 이 아이가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을 들은 엄마는 할 수 없이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 아이를 죽여야만 하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신이 누구인가? 신은 우리의 것을, 우리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가 버리고, 우리의 엄청난 희생을 드리고 내 많은 돈을 바치기도 하고, 내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우리 자식을 바치기도 하면서, 그래서 엄청난 희생을 해야, 그래야 그 신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요. 거짓 종교는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줄 테니까 우리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죠. 우리들의 것을 빼앗아가는 그런 종교가 바로 거짓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돈도 우리 일종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늘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맘몬을 섬길 것인지, 돈을 섬길 것인지, 너희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돈도 우리들에게 일종의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종교를 안 믿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나는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알려진 종교들 가운데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지, 사실은 이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돈의 종교를 섬기고 있는 것이죠. 돈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공하게 되면, 우리가 돈을 많이 얻게 되면, 행복하게 될 수 있고, 돈이 우리를 살리고, 돈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고,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살릴 것이라고 하는 그런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 잘못된 종교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러니까 성공을 위해서, 돈을 위해서 우리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죠. 부부와의 관계, 자녀들과의 관계도 다 희생시켜버리면서,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다 희생하면서, 우리들의 건강이나 우리들의 모든 관계나 이런 것들 가족이나 이런 것들을 다 희생해가면서, 돈을 얻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는, 그런 거짓 종교의 가르침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서,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추구하다가, 성공을 추구하다가 결국에 가정이 깨어져버리고, 건강을 다 잃어버리고 정말 고통스러운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역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거짓 종교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저급 종교와는 달리 고급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윤리적인 삶 도덕적인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그래야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그런 종교들은 이런 종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유대교가 이런 거룩한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당시에 저급한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유대교의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고요. 지금 알려져 있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종교들은 다 이런 고급 종교들입니다.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죠. 완벽하게 살아야 되는 것이죠. 더러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깨끗하고 정말 정말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도 역시 우리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우리를 고통 가운데 몰아넣고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완벽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조금 더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서 우리가 완벽해질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결국 그 단계로 가면 갈수록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멸시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교만해지기도 하고, 또한 우리가 그렇게 쉽게 넘어지기도 하는 그런 것을 통해서, 그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우리에게는 쉬운 길이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죠. 성경은 이런 이 세상의 거짓 종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아주 쉬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너무나도 쉬운 길이 열려져 있는 것이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거룩한 삶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요. 우리가 희생적인 헌신 안 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니고, 그런 거 자족하는 삶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다 필요해요. 다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우리가 획득해서 우리가 노력해서 힘들게 힘들게 따내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은혜를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주를 시인하고 영접하게 될 때,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가를 알아야 되는데요. 우리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금욕적인 것을 통해서, 또는 우리가 어떤 많은 것을 드려서, 또는 우리가 어떤 거룩한 삶을 통해서 저 천국을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가 어려워요. 의대 입학보다 어려워요. 훨씬 더 어려워요. 교장 선생님 시험 합격하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그걸 그 그것 가지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우리의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마치 대서양에 빠져버린 그런 사람들과 같습니다. 1912년이죠. 지금으로부터 약 111년 전에 영국의 사우스햄튼에서 출발한 엄청난 큰 배 타이타닉 호 가 영국에서부터 출발해서 뉴욕으로 가던 길이었나요. 가다가 중간에 이 빙하를 만나 빙하와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대서양 한가운데서 조난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배가 바닷물에 빠지게 되었고,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고, 바닷물에 빠지게 됐는데요. 그 바닷물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한번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대서양 한가운데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첫 번째, 굶어서 몸을 가볍게 만들어 물 위로 뜨게 하는 방법으로 살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선장에게 뇌물을 주고 살려달라고 부탁하면 살 수 있을까요? 세 번째, 지금부터 열심히 수영을 배워서, 그래서 그 수영을 배워가지고 뉴욕까지 헤엄쳐 가면 될까요? 불가능한 거죠. 그런데 이게 가짜 종교들이 하는 말이에요. 금욕적인 삶을 통해서 어떻게 해결해 봐라. 돈을 들여서, 희생을 해서, 한번 그것을 구원을 한번 사봐라. 세 번째는 열심히 거룩한 삶을 살아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을 얻어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방법으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에게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구조선이 왔다는 거죠. 우리의 힘으로 살아날 수 없는데, 구조선이 와서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때, 그 손을 잡기만 하면, 이끌어주는 대로 구조선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살 수 있는 길이 놓여진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과 같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도무지 이 악의 굴레에서부터, 죄악의 굴레에서부터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내어주신 것이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죄를 다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너무나도 쉽고, 너무나도 모든 사람들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도,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다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방법을 해 주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는데, 이 사람이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야기해 줘야 돼요. 이야기해줘야. 구조선이 와서, 그 구조선을 구조선에서 손을 내밀고 있고, 밧줄을 던지고, 구명 동그란 그거 뭐죠? 그걸 던지면, 그냥 잡고 배에 타기만 하면 되는데, “이 배에 타기만 하면 살 수 있다.”라고 이야기해 주는데, 배가 온 줄도 모르고, 바로 내 옆에 있다고 하는 것도 모르고, 내가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까? 그때부터 수영을 배울까? 선장에게 뇌물을 줄까? 그때부터 내가 굶어서라도, 내가 가볍게 할까 하면서, 그렇게 스스로 노력하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내가 여기 왔으니, 구조선이 여기 왔으니 타기만 하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 주변에 이런 놀라운 구원의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전달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로마서 말씀 10장 13절에서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데, 몰라서 못 믿는다고 한다면 알려줘야죠. 어느 병자가 있는데, 정말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신약이 개발되었고 그 약만 먹으면 살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다고 한다면, 알려줘야지.

제 친구 목사님이 어제 우리 교회를 방문했어요. 서울에 있는 목사님인데, 그런데 얼굴, 온몸에.. 막. 뭐라고 그러죠? 두드러기 같은 것이 막 나고, 피부가 안 좋은데, 뭐 피부과를 가고, 어디를 가고 뭘 해도, 그래도 낫지 않는 거예요. 낫긴 나았는데, 그런데 송태근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나도 힘들었었는데, 저 경상남도 하동에 가면 어떤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이 무슨 기능의학을 한다고 하면서 치료를 해주는데, 그게 좋다라고 하는 얘기를 들려준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하동에, 서울서 경상남도 하동까지 치료 받으러 오는 거예요. 저 시골 서울 사람이 시골 가져와서 치료받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근데 가서 치료를 받는데 어제 보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얼굴이 거의 깨끗해요. 몇 번 갔냐고 그러니까, 16번 갔대요. 이 목회자들에게 토요일 날은 굉장히 힘들고 바쁜 시간인데, 토요일날 가서 치료받고 올라가는 길에 잠깐 들렀더라고요. 그러면서 얼마나 열심히 선전을 해주는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가서 좀 치료받았으면 좋겠다. (근데 정말 좋은지 안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치료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데서 약을 먹어서 좋아졌는지 모르니까, 항상 의학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정답이 아니니까, 조심하셔야 되는데) 아무튼 정말 좋은 게 있으면 알려줘야 되는 거죠.

열왕기하 7장 9절 말씀에 보면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 옛날 사마리아 성에서 기근이 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아사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가 약속을 하면서, 오늘은 우리 아들 잡아먹고, 다음 번에는 네 아들 잡아먹자 하면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던 그 사마리아 성에 있던, 그 성문 앞에 있던 나병 환자들이 “아이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할 수 없다.” 하면서, 적군인 아람 진영에까지 갔다가 아람 진영에 도착해서 보니까, 아람 군대가 이상하게 다 도망가 버리고 없고, 그 안에 군수물자가 가득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거기서 이 나병 환자들이 마음껏 실컷 먹다가 생각하면서 했던 말이 이 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우리가 살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좋다.”라고 하는 그 정도까지만 끝난 게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침묵하고 있으면 아니 되겠도다. 지금 저 사마리아 성에는 이 소식을 알지 못해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굶어 죽는 사람 사람들을 놔둔 채 우리가 이야기해 주지 않고 그냥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산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범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들어가서 알리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어쩌면 이 복음은 정말 놀라운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와 같은 불가능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정말 잘못된 우상을 쫓으면서 멸망해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귀하고 복된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그냥 막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늘 잘못하냐면, 우리가 정당하거나 우리가 옳을 때 늘 잘못하고 실수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은 정당하고 명분이 있는 일이고, 그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들에게 막무가내로 혼내기도 하고, 폭력적이 되기도 하는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자녀들은 더 나쁜 길로 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냥 옳은 이야기를 말해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아이의 마음을 살펴보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아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이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민하면서, 아주 신중하게 뱀같이 지혜롭게 접근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이고, 정말 시급하게 해야 될 일이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외쳐버리기만 하면,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가 있어요. 지금 가만히 계시고 계신 분들 잘하고 계시는 건데, 농담입니다. 그냥 함부로 이야기해서, 복음에 대해서 더 반발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지금 마음을 꽉 닫아버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냥 아무렇게나 이야기해버려서, 거룩한 진주를 개에게 던지듯 돼지에게 던지듯,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냥 함부로 던져서 짓밟히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할 것이 아니라, 정말 어떻게 이 좋은 것을 받아들이게 할지 연구를 해야 돼요.

우리 아내는 우리 아이를 기를 때 좋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 부단히 많은 노력을 했는데요. 아이들이 편식을 하잖아요? 편식을 하고 하기 때문에, 입에 입맛에 좋은 것은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먹지만, 그런데 정말 영양가 있는 것은 안 먹으려고 하잖아요? 콩 안 먹고 이것도 안 먹고 저것도 안 먹고, 이것 좀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아이가 안 먹어요. 그러니까 “입 벌려” 하고 그냥 입으로 쑤시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 별 모양을 만들어서 예쁘게 만들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에 그것을 갈아서 넣어서, 이 아이로 하여금 먹게 만들기도 하고, 이 아이가 이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영양가 있는 이 음식을 이 아이에게 공급해줄 수 있을까? 거부하지 않고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연구해서, 정말 다양한 방법을 써서 아이를 먹였더니, 정말 막 이렇게 두룩두룩 살이 찌면서 금복주 같이 그렇게 컸던 기억이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바위와 같다.” 그런데 그 바위를 터트려서 깨뜨려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데, “복음은 다이나마이트와 같다” 그랬어요. 근데 그 다이나마이트를 어떻게 터뜨릴 것인가? 그냥 바위 곁에서 뻥뻥 터뜨리면, 바위만 시커멓게 그을릴 뿐, “바위는 터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바위를 터트리기 위해서는 먼저 드릴로 그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리고 그 바위 속 깊은 곳에 다이나마이트를 집어넣고, 그리고 그 바위 한가운데서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야, “그 바위가 부서진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냥 함부로 막 전해서, 복음에 대해서 오히려 반발하게 만들고, 내가 저딴 인간들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안 나가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선한 일을 하셨는가? 간증해야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 여인에게 찾아가셔서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물로써 대화를 하면서, 여인의 마음을 열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셨고, 수가성 여인과 같은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었으나, 나 같은 사람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다른 사람들도 용서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접근들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접근해 나간 것이죠. 원하기는 구원의 기쁨의 소식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주어진 모든 대상자들에게, 사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든 부모님이든 자녀들이든, 또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든, 사회에서 만나든 그 어떤 사람들이든,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런 목적 없이 만나게 해주신 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사람에게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하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들이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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