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다윗과 시므이 (삼하 19:16-23)

2020년 11월 18일 수요예배 설교


다윗이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서 피난길에 올랐다가, 이제 그 모든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복귀하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은 두 가지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끝까지 다윗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다윗이 돌아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고 정말 좋아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게 되었을 겁니다. 다윗을 끝까지 지지했던 그 사람들은 다윗이 다시 정권을 잡고, 다시 왕이 되어 오는 그 모습을 너무나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지만, 하지만 아주 얍살하게 압살롬이 쿠데타에 성공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재빠르게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향해서 저주하고 다윗을 향해서 돌을 던졌던 사람들은 굉장히 난처한 상황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압살롬은 죽어버렸고, 자신들이 저주했고 자신들이 돌을 던졌던 그 다윗왕이 이제는 복권돼서 다시 왕으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에 정말 곤란하게 된 것이죠.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 다윗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 다윗을 향해서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하고 욕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하나 있는데요. 그가 누구죠? 시므이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시므이가 대표적으로 다윗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욕하고, 다윗이 피난길을 떠날 때 조롱하면서 비웃었던 사람이 바로 시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므이의 운명은 정말 난처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가 그 다윗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돌을 던지고 저주했는데, 그 다윗이 복권돼서 이제는 왕으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고, 자기가 믿었던 그 압살롬은 이제 죽어버렸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이 시므이는 잽싸게 요셉 지파 사람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끌고 다윗왕 앞으로 나와서 다윗왕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 앞에 자비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참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도 참 초라하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피난길에 갔을 때는, 피난길에 올랐을 때는, 그렇게 욕하고 저주하던 살기가 등등하고 의기양양했던 바로 그 시므이가 이제는 다윗이 왕으로 복귀하는 그 과정 가운데서 그 다윗왕에 엎드리는 그 모습, 이제는 그 다윗왕 앞에 자신이 욕하고 저주했던 그 다윗왕 앞에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이제는 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빌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의 왕에게, 이 세상을 잡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세력에 굴복하며 살 것이 아니라,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산다고 할지라도, 천국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이 세상은 마치 압살롬이 쿠데타를 성공해서 다스리는 것과 같은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윗은 쫓겨나 버렸고, 그리고 다윗은 지금 도망가버린 상태인데, 그 사이에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냐면, 하나님은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다스림을 받고 있는데,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냐? 여러분,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누구라고 생각을 하세요?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믿으면서 사는데, 실제로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실제로 우리가 만나는 현장 현장에서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으면서 사냐면, 하나님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피난 가 버리고, 하나님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가 돈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기보다는 돈의 신 앞에 굴복하면서, 그 맘몬의 신, 돈의 신이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다 그 맘몬의 신 앞에, 돈의 신 앞에 엎드리면서, 그 앞에 굴복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무소유를 내세우는 종교도, 무소유를 설파하고, 마음을 비워야 하고, 멈추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도, 알고 보면 그 뒤로 들어가서 보면, 돈의 위력 앞에서 굴복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들이 목도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돈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느껴져서, 그 순간에 하나님을 믿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고, 정말 바르게 살아도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고, 오로지 이 세상의 정의는 무엇이냐? 돈이 정의이고, 돈의 힘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움직여 나간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굴복해서 그 체제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갑질을 하고 억압을 하면서 살아가는 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이 세상의 방법대로 따라 살아야 성공할 수 있는 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은 망하는 길처럼 보여서,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온유하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온유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면 무시당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정말 깔봄을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온유한 자의 삶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죠. 의로운 일을 해야 될 텐데, 의롭게 살면 손해만 당하고, 의롭게 살면 정말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의 방법에 굴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 삶보다는, 화평의 길을 가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 더럽고 추한 모습을 가져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돈만 확보하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잘 살 것 같은 그런 유혹 앞에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오늘 자 경향신문을 보니까, 만평이 거기에 실려 있는데요. 그 만평 <장도리>라고 하는 만평에 무슨 만화가 나와 있냐면, 이런 만화가 나와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데, 선생님이 뭐라고 가르치냐면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첫 번째 장면. 두 번째 장면에 뭐라고 나오냐면, 책이 나오는데, 그 책에 뭐라고 쓰여 있냐면, “준법은 시민의 의무”라고 하는 그 말이 쓰여 있는 책이 두 번째 컷에 나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기를 노력하는 자가 성공할 것이라고 배우고 있고, 사람들은 준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그것이 시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배우며 사는 그 모습을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에서 그려주고 있는데, 세 번째 컷은 무슨 장면이 나오냐면 그 학생들이 그렇게 배웠던 그 책들을 불에 태워버린 거예요. 분서갱유를 해버리는 거죠. 자신들이 배웠던 그 책을 불에 태워버리는 그 모습 다음에 나오는 장면이 무엇이냐면, 한진그룹에서 아시아나를 합병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익을 남기고 돈을 버는 방법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이 준법이 아니라, 노력이 아니라, 결국은 편법과 잘못된 것을 통해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승승장구하고 더 잘 되는 모습을 비판하는 그런 만 평을 거기다 그려놓았는데, 어쩌면 이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왕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정말 성실하게 산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이고, 정말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승리해야 되는 것이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돼야 될 텐데, 그런 사람들은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는데, 편법과 술수를 쓰고 여러 가지 권력을 통해서, 갑질을 하고 폭행을 저지르고 악을 행하는 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아니하고 더 성공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다스리는 것이고, 이 세상의 방법, 편법과 술수와 모략을 써야만 성공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가득 들어서, 그래서 그 이 세상의 신 앞에 굴복하며 왕으로 모시고 사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 가운데 은연중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심지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겉으로는 무소유를 말하지만, 그러나 뒤로는 돈이 나를 살린다고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사무엘하 19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이 다시 왕으로 복권하는 그 앞에 한때 압살롬에게 붙어서 다윗을 비난하고 조롱했던 그 시므이가 다윗 왕 앞에 엎드려서 목숨만 살려주세요. 제가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들을 이제는 잊어버리시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하면서 엎드리는 그 시므이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 옛날 다윗이 복권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날이 올 것이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그 천국이 오게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믿고, 비록 이 세상에서는 돈이 왕인 것 같고 이 세상의 방법이 참된 그 방법인 것처럼 지금은 악마가 다스리는 세상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방법에 따라서 사는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모순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시민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모든 것들이 다 역전이 되는 거죠. 힘 있는 자가 괜찮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오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그 순간에는, 온유하고 마음 착한 자가 복된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욕심을 부리면서 탐욕을 부리고 모든 것을 다 쟁취하는 자가 잘 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자가 복이 있는가? 오히려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는 자가 복된 세상이 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절에서부터 12절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오. 지금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며,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믿으십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 우리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쩌면 피해를 당하며 살 수 있는 그런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압살롬이 통치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사탄이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지키고 살려고 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너희가 복이 있다. 결국은 주님께서 다윗이 왕으로 복권되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그때가 올 텐데 그때에는 누가 복이 있는가? 내 힘으로 권력으로 사람들을 누르며, 그리고 악착같이 탐욕을 부리며 살면서 돈을 많이 벌어가는 그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의 방법으로 내 것을 나누어 주고, 사랑을 베풀며, 누군가 나를 때리고 나의 것을 취한다고 할지라도, 누구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을 갖다 대면서, 피해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 그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서 이 사탄이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천국 시문으로 살아가는 그런 귀한 결단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므이가 와서 다윗 왕 앞에 엎드렸을 때, 그 모습을 본 다윗의 일행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특별히 아비새라고 하는 사람은 그 시므이를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솟아올라서 그 시므이를 당장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도망갈 때 피난길에 오를 때 다윗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먼지를 일으키면서 조롱하고 욕하고 비난했던, 어쩌면 가장 다윗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이 시므이가 다윗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므이를, 시므이가 와서 그 다윗 왕 앞에 엎드렸을 때, 이 시므이를 살려둘 것이 아니라 죽여버리자고 아비새가 제안을 합니다.

사무엘하 19장 21절의 말씀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까 하니라.” 아비새는 너무나도 화가 났습니다. 저 시므이가 지금 와서 엎드리고 있는 그 모습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제안합니다. 저런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순간에 다윗은 원수였던 그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고, 그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약속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참 아주 놀라운 모습인데요. 다윗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고 자신에게 원수가 되었던 그런 사람들을 원수를 갚아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힘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사람들을 원수를 갚아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로 삼고 나의 편을 만들고, 포용 정책을 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다시 한번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도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누구를 포용한 것을 살펴봤죠? 아마사를 포용한 걸 살펴봤죠. 한 주 지나서 다 잊어버렸습니까? 아마사. 아마사가 누구냐면, 바로 압살롬의 군대 지휘관 역할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쿠데타 세력의 핵심 중에 핵심인 거예요. 그런데 바로 쿠데타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 아마사를 다윗이 죽여버린 것이 아니라, 아마사를 자기편으로 포용하면서 약속하기를, 내가 너를 차기 군대 지휘관으로 삼겠다고 약속하면서, 자신과 적대했던 사람을 포용하고 자기편으로 만들고 자기의 군대 지휘관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우리가 적을 삼으면, 우리가 사람들을 적을 삼으면, 결국 그 피해는 누가 당하냐면, 고스란히 나 자신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면, 결국은 그 적을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냐면, 나 자신이 외톨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을 적을 만들면 결국 손해를 누가 보는가? 누가 본다고요? 내가 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울 왕의 방식 아니었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다윗과 함께 황금 콤비를 이루어서, 엄청난 유익을 누릴 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죽이려고 들었기 때문에 다윗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결국 사울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런데 그를 친구로 삼으며,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만들면 결국 유익한 것은 누군가? 내가 유익하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삶의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 사람을, 나를 반대하던 사람이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손을 내밀고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말하고, 선물 있으면 선물도 주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나의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들을 우리가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 그런데 지금 다윗에게 아비새가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친구로 만들지 말고 죽여버리라는 겁니다. 시므이를 죽이라고 말하는 이 아비새의 이 말은 좋은 말입니까? 잘못된 말입니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잘못된 말이죠. 엄격하게 말하면 어떤 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탄의 음성과 같은 것이죠. 그런데 그 사탄의 음성과 같은 소리가 누구에게서 들립니까? 바로 다윗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을 가장 위한다고 하는 포장을 쓰고서 어떻게 전달이 되나요? 사탄의 말이 전달이 되는 거죠.

이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자주 발생하는 겁니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 나를 가장 위하는 사람, 내 마음을 가장 알아주는 바로 그 나의 친구가, 나의 아내가, 나의 남편이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들의 입에서, 나를 위해서 해준다고 하는 바로 그 말이, 사실은 나를 위하는 말이 아니라, 사탄의 음성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아비새는 누굽니까? 다윗에게 평생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충성스러운 신하의 입에서 다윗을 살리는 조언이 나온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사탄의 길을 가게 만드는 그런 잘못된 충언을 하는 거죠. 잘못된 조언을 하는, 그러면 그 말을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말,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그 말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인지, 아니면 사탄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말을 했던 사람이 누군가요? 베드로예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무슨 조언을 합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지 마십시오. 죽지 마십시오. 희생하지 마십시오. 그런 조언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런 조언을 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예수님에게 조언을 하는데, 그 조언이 정말 좋은 조언이 아니라, 무슨 조언이에요? 이건 사탄의 음성인 겁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분별해야 될 것은, 누구의 말을 분별해야 되는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말을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 아내의 말을 분별해야 되고, 남편의 말을 분별해야 되고, 자녀와 부모의 말을 분별해야 돼요. 과연 이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선하신 뜻인가? 아니면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는 사탄의 음성인가를 분별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윗은 놀랍게도 그 순간에 아비새의 달콤한 그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9장 22절에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사람을 죽이겠느냐? 오늘 이스라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오?” 다윗은 이 아비새의 말을 분별해서, 이것이 나를 사랑하는 충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충성스러운 말이 아니라 사실 원수가 되는 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별해낸 것이죠. 그리고 그 말을 거절하면서, 시므이를 죽이라. 저 시므이, 나쁜 놈이니까 죽여버리라고 하는 그 사탄의 음성에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그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결정하고, 그리고 그 말에 자신의 말에 따르는 것이죠.

다윗은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결정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다윗은 어떻게 이 순간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생각보다는,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그 사람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한 번 더 참을 수 있고, 두 번 더 참을 수 있으면 훌륭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것이죠. 한 번 용서하고 두 번 용서할 수 있겠지만 세 번째도 용서가 가능할까요? 내가 인격이 뛰어나다고 한다면 한 번 용서해 줄 수 있고, 두 번 용서해 줄 수 있지만, 아무리 인격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세 번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을 용서해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그래도 나는 너보다는 나은 놈이다. 너는 나를 배반하고 나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비난했지만, 나는 너랑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는 너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그 정도의 인격이 있고, 내가 너보다는 훌륭하다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용서한다고 하면, 그 용서는 오래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용서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용서를 엄청난 용서를 할 수 있었는데, 원수를 용서하고 자기편으로 삼고 할 수 있었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떻게 다윗은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요? 다윗의 고백을 다시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무엘하 19장 22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오?” 이게 다윗의 고백이에요. 기다려봐라. 지금 오늘이 어떤 날이냐? 내가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날이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 말이 무슨 의미인가요?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 그 고백 속에 담겨 있는 그 내용이 뭡니까? 내가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 그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그 고백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내가 누구냐? 나는 주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왜 다윗은 파렴치범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한 아내를 한 사람의 아내를 겁탈하고, 그 우리아를, 그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서 죽여버린 파렴치범 중에 파렴치범 중에 파렴치범인 이 다윗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짓밟아버리고, 당장 지옥에 처넣고, 그리고 완전히 목숨을 빼앗아버려도 아무런 항변할 수 없는, 너무나도 사악한 존재가 바로 다윗인데,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다시 왕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거예요.

심판받아야 마땅하고 죽어야 마땅한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왕으로 복권시켜 주셨다. 그 사실 때문에 다윗은 죽일 수가 없는 거예요. 용서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내가 너보다는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에서 나오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일 뿐이고, 그것은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용서는 어디에서 나오냐면 내가 죽일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해 주셨고,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왕으로 복권시켜주시는 사실, 압살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고 완전히 박살이 나야 마땅한 나를 하나님께서는 나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그래서 왕의 자리로 다시 올려주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내가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만 데나리온의 용서를 받은 사람인데, 어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그 죄를 내가 추궁할 수 있겠는가?

다윗은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가 왕이 되었으니, 나 같은 놈이 왕이 되었으니, 어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으며, 어찌 내가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사실 내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 이 말은 두 가지 방향으로 결론을 낼 수 있는 말입니다. 이제는 내가 왕이 됐으니 이제는 내가 내 맘대로 하겠다. “이제는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니 내 뜻대로 하겠다.”라고 하는 결론을 낼 수도 있는 말이 내가 왕이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나 같은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고,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하는 겸손의 말로도 사용될 수가 있는 것인데, 사울은 그 전자와 같은 표현으로 반응을 했다고 한다면, 이 다윗은 후자로 나와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 너무나도 고마워 그 생각으로 시므이를 바라본다고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허물이 많고 죄악 투성이인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아무런 항변할 수도 없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보혈의 피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삶은 늘 감사의 삶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웃을 향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감사하며 매 순간순간마다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당연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주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