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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 (고후 8:8-15)

2020년 11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이번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교회에서는 마음 나눔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을 진행했는데요.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물품을 모아서, 그리고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셔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 가운데 몇몇 가정에게 전달을 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하나의 영적인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마음 나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그 물품을 받으신 분들은, (아마 대부분이 못 받았을 것이고 소수에게만 드렸으니까요. 소수에게 아주 몇몇 소수에게만 전달을 했는데), 그것을 받으신 분은 자기가 신앙생활을 몇십 년 동안 했는데, 교회에서 이런 선물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정말 기뻐하고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습니다.

그렇게 너무나도 좋아해 주시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물질을 받아서, 선물을 받아서, 금전적인 이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 선물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값어치라고 하는 것은, 많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으면서, 우리 성도들의 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정말 기쁘구나. 정말 따뜻한 정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런 계기가 되어서, 받으신 분이 정말 기뻐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년에는 짧은 기간에 공고를 해서 많이 참여를 하지 못했고, 그리고 많은 분들에게 나눠줄 수는 없었지만, 내년도에는 좀 미리 광고를 해서, 더 많이 참여가 이루어지고, 또 더 많은 분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기쁨이 좀 확산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느끼게 됐습니다. 제가 이런 보고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마 마음 나눔에 참여해 주신 분들이, 내가 참여했던 일이 참 의미 있었던 일이고, 그 마음 가운데 기쁜 마음이 들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오냐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기쁨이 생기기도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때 그 기쁨은 훨씬 더 큽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한없이 퍼주면서도 정말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셰프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내놓을 때, 손님들이 그것을 맛있게 먹어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기쁜 것처럼, 정말 우리가 조그마한 마음을 이렇게 베풀었는데, 그것을 좋아해 주는 것을 보면, 받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준 사람의 마음도 너무나도 기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마음에 참 기쁨이 넘쳐요.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내가 그렇게 기분이 언짢아요. 화를 내고, 기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면서, 마음이 기뻐하지 헤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손길을 내밀면, 내가 기분이 좋은 것이죠.

저는 운전을 하면서 다 양보합니다. 다. 누가 내 앞에 끼어들려고 하면, 다 양보하는데요. 왜 이렇게 양보하느냐? 양보하고 나면, 기분이 그렇게 좋아요. 저 정말 차선을 잘못 들어가지고, 차선을 옮기고 싶은데, 옮기기 힘들어하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내 앞에 들어가서 차선을 안전하게 들어가고, 그리고 누군지 모르는 뒤 차를 향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제 마음이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요.

사랑을 베풀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것이고, 내가 만일 다른 사람을 향해서 악하게 하고 나쁘게 하고 비난하고 욕하면, 결국 내 마음이 쓸쓸하고 외롭고, 그리고 내 마음이 너무나도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일은 정말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이 선하고 기쁜 일에는 그냥 다 같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드는 것은 당연할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헌금에 동참하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요.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헌금을 좀 하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선한 일에 참여하고, 우리들의 물질을 사용해서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게 된다고 하면, 그 기쁨이 마음 가운데 넘쳐나기 때문에, 그런 일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여러분, 헌금하세요.”라고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을 말하면서, 바울 사도는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헌금하는 것을 원하는가?”라고 하는 이런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신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헌신과 우리들이 헌금을 드리거나, 우리들이 헌신을 해야 되거나,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주어야만, 우리가 하나님께 돈을 드리거나, 우리가 헌신을 하거나 우리가 무엇인가 노력을 해서 하나님을 도와주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헌금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부터 25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우리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받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받으실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것을 받아야만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시고자 하면, 어떻게 하시면 됩니까?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돼요. 천지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지으셨다고 우리가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생겨나고, “물이 갈라지라” 하니까 물이 갈라지고, 하나님께서는 손을 움직이실 필요도 없고, 그냥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 우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아무런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이 전혀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을 하는데, 물론 영광을 받으시기는 하시지만, 그런데 그 받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영광을 안 받으시고, 하나님의 모습이 초라해진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충분히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자체로 영광스럽고, 그 자체로 충분히 영광스러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연예인이 다른 점이죠. 연예인은 어떻게 존재합니까? 연예인은 연예인이 혼자 잘났다고 연예인이 될 수 있나요? 아니요.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팬덤이 있어야 돼요. 팬들이 좋아해 주고, 팬들이 찾아주고, 팬들이 열광해줘야만, 그때서야 연예인은 비로소 연예인으로서의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죠. 얼마 전에 제가 프로그램을 하나 봤는데요. 혹시 여러분들도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유재석이 하고 있는 <환불 원정대>라고 하는 것을 혹시 보셨습니까? 물론 안 보셨겠죠? 조청자 권사님? 성경만 보시니까요. 그런데 이 환불 원정대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니까 우리 전주 출신 “화사”하고 해가지고, 여성 이렇게 가수 4명이서 꿈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그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코로나로 인해서 실제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런데 연예인들은 그 팬들의 함성 소리, 공연을 했을 때 팬들이 떼창을 하면서 환호해주고 열광하는 그게 너무나도 배고픈 거예요. 그런데 지금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그런 공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의 가수들이 여자 가수들이 열심히 연습을 해가지고, 그래서 무대 발표 마지막 발표를 하는 순간이 됐습니다. 발표를 해야 되는데, 누구 앞에서 해야 되는가? 그 공연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튼 공연장을 마련해 놓고, 공연을 아무도 없는 그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방송국에서 무엇을 했냐면, 마치 관객들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형광봉들을 의자에다가 다 묶어놓고, 그래서 형광봉을 반짝반짝이게 만들어 놓고, 그리고 음악을 틀어서 떼창을 마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 가수들이 노래를 할 때 옆에서 떼창을 막 불러주니까, 이 4명의 가수가 막 공연을 하다가, 공연을 못하고 펑펑 우는 거예요. 펑펑 울어. 이 관객들이 떼창을 부르면서 환호해 주던 그 마약과 같은 그 느낌을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외로이 있다가, 마치 공연을 진짜로 하는 것처럼 관객들이 함성을 질러주는 것 같은 소리를 듣게 될 때, 정말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리는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연예인이 뭐냐면 연예인은 그냥 혼자 예쁘게 생기고, 혼자 노래를 잘 불러야 연예인이 아니라, 같이 떼창을 불러주는 그 사람들이 있어야만, 그 연예인이 연예인이 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우리가 없어도 스스로 영화로우시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으시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드려야만 그때서야 겨우 만족해 할 수 있고, 하나님 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어느 것이 없어도, 그 자체로 완벽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이죠. 우리가 전도를 해야만, 하나님의 구원받는 백성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헌금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내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완벽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 그 자체로서 아무런 필요가 없으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은 그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 사역을 하는 일에, 성도들로 하여금 동참하기를 원하시고, 헌금하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헌금을 하라고 오늘 고린도후서 8장에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게 될 텐데요. 마치 주님께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거짓처럼, 나는 돈이 없으니까, “너희들이 돈을 좀 내서, 이 일을 해라.”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고 아무런 팔도 다리도 없어서, 아무런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나 대신에 너희들이 일을 하고, 너희들이 수고하고 애써서, 하나님의 일을 너희들이 하라고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그런 도움도 필요가 없으신 바로 그 하나님인데, 우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가진 바로 그 물질을 가지고 주의 일에 참여해야 되고,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재능을 가지고 주의 일에 참여해야 되고, 주의 일을 하는 일에 너희들의 삶과 모든 것들을 다 바쳐서 주의 일에 참여하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님은 그야말로 다 가지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으신 부요하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냐면, 나는 아무런 재산이 없는 것처럼, 내 재산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물질을 사용해서, 가난한 자들을 돕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물질을 이용해서 선교 사역에 돕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고,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하고 그 모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는 말하기를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좀 되십니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시킵니다. 꼬마 아이에게 “너, 이거 가지고, 엄마 갖다 줘.” “너, 이거 좀 청소 좀 해.” 그 꼬마 아이들에게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님들이 우리 꼬마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그래서 좀 편해보겠다고 하는 그런 한 얄팍한 마음에서 그렇게 시키는 것이죠? 그게 아니에요. 부모님은 자녀를 위해서라고 하면 다 해주고 싶어요. 부모님을 위해서 부모님은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걸 다 희생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 부모님이 그 꼬마 아이에게 “네가 이걸 가져다가 엄마 좀 갖다 줘라.” 말하고, “네가 이거 청소 좀 하라”고 말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시키는 이유는 우리 자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부모가 좀 더 편해 보려고 하는 속셈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온전하고 건전한 아이로 성장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 아이를 바보같이 만들기를 원치 아니하고, 우리 아이가 그래도 정말 잘 자라는 아이로 만들어 보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역으로 부르시고 또한 헌신하도록 요구하시고, 또한 헌금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우리들에게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은 온 세상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이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엄청난 확장에 이르게 되는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도 바울을 선택한 것은 정말 사도 바울이 뛰어나고 아주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이 없어도 괜찮아요. 사도 바울이 없으면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요한이나 빌립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셔도 괜찮아요. 아니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역을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도, 그렇게 사도 바울을 선택하셨지만, 사실은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그 사도바울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사람을 온전히 빚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빚진 사람이라. 누구에게 비쳤는가? 헬라인에게 빚졌습니다. 야만인에게 빚졌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빚진 자입니다. 왜 빚졌는가?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이 사람들 때문에 나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이 사도 바울은 나는 빚진 자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거나 지혜를 주셨거나 물질을 주셨거나, 그 어떤 장점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한다면,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에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장점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망각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했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너희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이 이스라엘 민족들이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선택해 주셨는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면서, 그들을 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내보내야만 하는 그 사명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야. 너희는 아니지.” 하면서, 교만해버리고, 배타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대통령으로 뽑아줬더니, 대통령으로 뽑아준 그 목적은 정말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배만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될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시는가?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기쁨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하고,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하는 사실,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그것이 어떠한 헌신이든지 간에 기쁨으로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니 두 가지만 살펴보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헌금을 하는데 어떻게 해라? 지금 해라. 지금 해라. 고린도후서 8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말씀해 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해라. 이 말입니다. 지금 해라. 사실은 이 고린도 교회가 예전부터 헌금을 하겠다고 약속을 바울 사도에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미루어지고, 또 미루어지고, 미루어진 상태입니다. 그때 이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너희가 하려고 했던 그것을 “이제는 해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냐면,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는 있어요. 우리의 머리에는 있어요. 그런데 문제가 뭐죠? 머리에서부터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아주 지난주에 제가 아주 좋은 얘기를 들었는데요. 가장 먼 거리가 어디라고 하죠? 머리에서부터 손까지의 거리가 제일 멀다고 해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손으로 직접 행동으로 옮겨지는 그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는 것, 우리들의 문제는 마음에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은 있지만, 머리에는 있지만, 그 머리에 있는 그 생각을 마음에 있는 그 생각을, 우리의 손으로 옮기는 데, 그렇게 당장 실천하는데, 그것이 약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근데 그게 무슨 누구의 전략인가? 바로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마음에서부터 선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그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이 쓰는 작전이 무엇이냐 하면, 나중에 하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겁니다.

지금 할 때가 아니라, 나중에. 지금은 내 코가 석자니까, 나중에 하라고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인데요. 아주 유명한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고 하는 책을 보면, 이 책은 필독서니까 꼭 읽어보시면 좋은데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제일 첫 번째 장에 보면 사탄이 어떻게 어떤 한 사람을 영적인 관심에서부터 멀어지게 했는지 그 전략이 기록돼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도서관에서 영적인 신앙 서적을 읽습니다.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영적인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어요. 믿음을 가지려고 생각을 했어요. 그때 이 사탄은 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나님 없어. 영적인 것 생각하지 마. 이렇게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탄은 다른 전략을 썼습니다. 뭐라고 생각했냐면, “지금 점심시간이야. 밥 먹어야 돼.” 영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 괜찮아. 그런데 지금은 그걸 생각할 시간이 아니라, 점심시간이란 말이야. “밥 먹어야지”라고 하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책을 덮어놓고, 지금은 밥 먹어야 되겠구나 하면서,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겁니다. 밥을 먹는 것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밥을 먹는 그 순간에 그 사탄은 또 그 사람에게 무엇을 보여주냐면 지나가는 신문 파리 소년이 석간이 나왔다고 외치는 그 장면을 보여주고, 그리고 저 앞에서 73번 버스가 지나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 빨리 집에 가서, 내 할 일 해야 되겠구나.” 그 길로 빠져들게 만들어서, 사람을 영적으로 무너뜨린 그 성공의 이야기를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역시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저 문을 나서는 순간에 사탄은 우리들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오늘 은혜 많이 받았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내게 와닿았어. 그런데 오늘 지금은 점심 먹어야 돼. 지금은 우리 자녀들의 가장 필요한 이것을 해야 돼. 우리에게 좀 더 시급한 실질적이고 실질적이고 우리들에게 다급한 문제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주일날 들었던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만드는, “나중에 하지”라고 하는 그 작전에 우리가 날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넘어가고 있는 것인데, 오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말하냐면, “이제는 해라.”라고 말씀하고 즉각성이 필요하다 마음에 있는 것을 성취하고 머뭇거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고린도후서 8장 1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까지 가져와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만 쓰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요.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다른 점입니다. 이 세상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목적은 착취에 있고, 이 세상의 목적은 빼앗아 가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더 큰 것을 바치고 더 큰 일을 하는 것을 칭찬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내가 조금 한 것은 인정도 받지 못하고, 어마어마하게 해야만 박수를 받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냐면, 사랑이 목적이고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들을 받으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병이어를 받으셔서 5천 명을 먹이신 것이고, 100만 불짜리 무엇인가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엽전 두 닢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네가 바치는 그 조그마한 것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런 재능들은 하찮은 것이고,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헌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기쁨 가운데 참여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내게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와 상관이 없이,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축복의 사명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시는 그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첫 번째 우리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미적거리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하지 뭐.”가 아니라, 우리가 죄악 가운데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 하나 떼어주면서, “옛다. 먹고 떨어져라.”가 아니라, 생명을 바쳐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물과 피 한 방울 마지막까지 흘려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 모두가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어떠한 사명으로 주셨는가를 기억하면서, 내게 주신 그 사명에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어떠한 사명을 주셨는지 분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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