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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하고 기다리라 (시 37:1-11)

요즘 중국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알고 계십니까? 얼마나 좀 즐겨보십니까? 잘 챙겨보시나요? 저는 아시안게임 중에서 다 챙겨보지는 못하고 그래도 관심 있게 보는 종목이 있습니다. 축구하고 탁구. 다른 것들은 좀 재미가 없고요. 탁구하고 축구하는 경기를 보면, 그나마 재미가 있어서 보게 되겠는데, 오늘 밤에 우리나라와 중국의 축구 8강전이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기대가 되는데, 굉장히 우려가 많아요. 왜냐하면 심판들이 중국에게 편파 판정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인데요. 그러한 염려를 증폭시킨 것이 지난 북한과 우리나라 사이에 여자 축구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런 판정을 해서, 우리나라가 지고 만 것을 보면서, 그러한 걱정이 더 많이 생기게 됐습니다. 이렇게 심판이 공정해야 되는데, 심판이 바르게 판단을 해주어야 되는데, 이렇게 편파적으로 판정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모습을 볼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들이 생길까요?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죠.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참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의롭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고, 악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참 이 세상에 대한 불평의 마음들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도 생기는 것이죠.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의 마음까지 생기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이러한 마음들이 생기는 것, 나쁜 것을 볼 때 화가 나고 분노가 생기고, 그리고 때로는 불평하는 마음들이 생기는 것은 나쁜 것일까요? 괜찮은 것일까요? 혼란스럽죠. 사실은 엄격하게 말하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들이 생기는 것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이시죠. 정의의 하나님이시죠. 의로운 하나님이시죠. 그런 의로움이 우리들의 품성 가운데 있기 때문에, 불의를 보면 불편한 거예요. 나쁜 일을 보면 화가 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불평을 쏟아낼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생기게 되는 것, 그건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들이 그런 선한 의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불평해 버리고, 시기와 질투를 해버리는 것은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죄악들을 열거하면서, 이런 죄를 저지르면 안 된다. 이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중대한 죄라고 말하면서, 거기에 무엇을 집어넣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 불평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부터 이러한 불평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분노가 솟아오르고, 시기와 질투가 솟아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그렇게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런 마음들이 들 때 그 마음을 바르게 잘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7편은 다윗이 쓴 시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편 37편 1절 말씀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이 시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 시를 누가 들으라고 하는 시를 이렇게 불러서 짓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윗아,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고 불평하지 마라.”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시기하지 말라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불합리한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정말 억울한 일들을 만나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기도 하고, 불평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까지 생기게 될 텐데요. 그런데 이렇게 그것을 쏟아내 버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결코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가운데 처한 것이죠.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서, 골리앗과 더불어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다윗에게 어떠한 반응으로 반응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잘했다고 박수 쳐줘야 되는 것이죠. 칭찬해야 되는 것이죠. 인정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다윗이 맞닥뜨린 현실이 무엇이냐 하면, 사울 왕의 그 죽이려고 하는 그 살기등등한 모습을 맞닥뜨리게 된 겁니다.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서 도망가는 신세가 돼버렸어요.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 이스라엘을 노예가 될 수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건져냈던, 이 다윗이라고 하는 장군이 오히려 쫓겨나가는 그런 신세가 되었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신세가 되어서, 산으로 도망 다니고, 굴속으로 숨어 다니고, 미친 척하면서 도망 다녀야 되는 그런 아주 불합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 때, 다윗의 마음 가운데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짜증이 나고 분노의 마음들이, 불평의 마음들이 마음속에 솟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그런 감정에 따라서 분노해 버리거나, 불평해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다윗아, 너는 악인의 모습을 보면서, 불평하지 마라.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시기하지 마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왜 내 마음이 이럴까? 내 마음속에서 왜 불평의 마음이 솟아오를까? 왜 내 마음 가운데 이런 악한 마음들이 솟아오를까? 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살펴보면 이런 종류의 시편들이 꽤 많이 등장하는데요. 시편 42편 5절의 말씀에 봐도 이런 비슷한 시가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이 지은 시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 시편을 쓴 시편 기자는 자기 영혼을 향해서 말하는 겁니다. 왜 낙망하고 있느냐? 왜 절망하고 있느냐? 그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고 힘을 얻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우리들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종종 어떤 다른 종교에서는 그 종교의 목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런 상태까지 수련을 하는 것이 목표인 그런 종교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단련하고 수련하고 또 수련해서,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 내 마음이 평정심을 누리고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그 상태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있는데요. 사실은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목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는 로보트가 아닌 것이죠. 우리는 기계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감정들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기쁜 일을 만나면 기쁘게 되어 있고, 슬픈 일을 만나면 슬프게 되어 있고, 분노할 일을 만나게 되면 분노하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억울한 일을 만나게 되면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운 감정들이 우리들의 귀에서 솟아올랐을 때, 그 감정들을 계속해서 간직하면서 그 감정들을 계속해서 강화시켜 나가고, 그래서 더 심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그러한 감정들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눌러야 하는 것이고, 불평의 마음이 솟아올랐을 때, 그것을 누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되는 것이고,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을 눌러서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되는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솟아난 그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토로하며, 그래서 그것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그 감정을 지속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결코 우리들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평이 솟아오르고 분노가 솟아오를 때, 그 감정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게 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나요? 그러면 우리들의 기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정말 내 기쁨이 사라져 버리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로 가득 차 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노라고 하는 것은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와 같은 것이어서, 결국 우리는 사탄이 시키는 대로 끌려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분노의 마음들, 불평의 마음들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발전시키면, 결국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식어져 버려요. 내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되잖아요? 이웃을 향해서 사랑과 은혜를 베풀면서 사는 게 우리 성도들의 바른 자세인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까? 점점점점 내가 고립되어 가는 것이죠.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배로 돌려받게 되는 것이고, 받았기 때문에 또 사랑이 더 나가게 되는 것이고, 또 그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의 선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인데, 그런데 불평과 분노의 마음들을 계속 유지시키게 되면, 결국 우리는 외로워지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베풀지 않아서 결국 우리가 고립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솔제니친이라고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갈아먹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질투 때문에 자신을 완전히 망쳐버린 사람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사울 왕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그것을 보고 함께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될 그 사울 왕이 오히려 그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들었고, 결국 그 사울 왕은 좋은 왕이 되기보다는 나쁜 왕이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마음을 참 따뜻하게 만들기보다는 늘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기에 좋은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지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그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너무나도 행복하고, 정말 좋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상인가요? 불만과 불평이 나올 만한 그러한 환경 속에 우리가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그 세상은 정말 어려운 환경들이에요. 하지만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우리는 늘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런 환경 속에서도 우리들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종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자수성가한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어렸을 때 환경이 불우해서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고, 그리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아주 불우한 환경 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고 했어서 정말 자수성가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죠. 참 대단한 일을 했구나. 그런데 영적인 환경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영적인 환경은 좋은 환경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불평을 쏟아내기 좋은 환경, 우리가 원망하기 좋은 환경, 정말 우리가 절망하기 좋은 환경이 우리들 앞에 펼쳐지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럴 때 그런 환경에 굴복해 버려서 그냥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늘 시편 37편 1절에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들려주는 그 말을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원망하기보다는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다윗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불평하고 원망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솟아올랐을 때, 자기 자신을 향해서 노래하는 겁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평하지 마라.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잘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다윗이 영적인 거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의 마음이 전혀 유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좋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과 아주 똑같아요. 우리의 상황과 똑같아서 그래서 함께 넘어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새 힘과 용기를 얻는 가운데 승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야 하는 것이죠. 다윗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했는가? 시편 37편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지금 악인들이 잘 되고 있어요. 지금 악인들이 잘 나가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다윗이 바라본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이고, 그 공의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실 거라고 하는, 그래서 그들을 보면서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라, 시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며 나가라. 이것이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우리 당장의 현실만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실망하고 불평할 만한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그 결국이 망할 것이다. 악인들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셔서 망하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죠.

3절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이 순간에 하나님을 의뢰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4절 말씀에서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잠잠하고 기다려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이 벌어지고 있고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신경을 꺼버린 채 그냥 가만히만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겁니다. 우리는 바른 모습을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되는 것이죠. 악이 판치지 아니하도록, 선이 승리하는 사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되는 것이죠. 열심히 노력하고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이것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겁니다. 여기서 잠잠하고 기다리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나 그렇게 그 악을 이겨내고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평이 나오기 시작하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좌절감이 생기기 시작하고 시기와 질투가 생기기 시작하여서 결국 우리의 영혼을 망쳐버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해 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고, 결국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신다고 바라본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바라볼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상황이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불평 가운데, 시기와 원망 가운데가 아니라 늘 감사와 찬송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억울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서, 십자가 위에서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때문입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어떤 일이 하나 있었는데요. 중국 아시안게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아시아의 각국 선수들이 참여하게 됐는데, 이 경기에 참여하게 된 홍콩에서 온 12살짜리 여자 선수가 있었습니다. 유텐이라고 하는 선수가 있었는데요. 이 선수는 참 12살이니까 얼마나 어린아이입니까? 경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 아시안게임에 오게 됐는데, 이 선수는 체스를 두는 선수였어요. 체스 너무나도 기뻐서 개막식을 하는 그 광경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좋아가지고 휴대폰으로 찍고, 막 이렇게 막 개막식도 열심히 보고 너무나도 흥분돼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어떻게 됐냐면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휴대폰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이 휴대폰을 내가 어디다 놨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가방 속에 넣은 줄 알았더니 가방 속에도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아마 음식을 먹다가 그 음식, 그 봉투 속에다가 집어넣고, 같이 쓰레기로 버린 것이죠. 요즘 휴대폰 잃어버리면 위치 추적 기능을 해서 찾을 수 있는데, 마침 그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속상해했는데, 그 사실을 아시안게임 자원봉사자팀에다가 알려주게 되었고 그 사실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십니까? 자원봉사자들이 그 아이의 휴대폰 찾기 총동원이 됐는데 쓰레기봉투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만큼을 뒤졌는가? 축구장 73개 넓이의 쓰레기봉투를 수만 개의 쓰레기봉투를 뒤지기 시작해서 20시간 안에 드디어 찾아가지고, 그 아이에게 발견해 주었다고 하는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데 휴대폰 하나 찾기 위해서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됐는데, 사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들을 돌보시고 계시고,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불평과 원망스러운 일들이 많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현실만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러한 마음들이 솟아오를 때마다 불평의 마음이 솟아오르고, 분노의 마음이 솟아오르고, 여러 가지 쓰다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를 때, 오늘 시편 37편의 말씀처럼 나 자신을 향해서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마라. 악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건 해야 돼요. 해야 되는데,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무너져 버리고, 내 마음이 절망 가운데 들어가 버리고, 사랑에 대한 그 감정들을 다 잃어버리고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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