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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주로부터 (롬 11:33-36)

어제 축구 봤습니까? 저는 설교 준비하느라고 잘 못 봤는데요 참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야구도 이기고, 배드민턴도 이기고, 다 이기고, 좋은 소식들을 듣게 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정말 그렇게 좋은 소식들로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전혀 없이 정말 행복하고 좋은 소식들로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쟁도 없고 서로 싸우는 일도 없고 서로 상처 주는 일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서로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일들도 없고, 죽음도 없고, 질병도 없고 모든 일이 좋은 것만 우리 앞에 펼쳐질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좋은 소식들, 좋은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들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통과 아픔, 슬픔과 외로움, 미움 등등, 여러 가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정말 행복하고 저 사람은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고, 저 사람은 너무나도 좋겠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알고 보면,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큰 슬픔과 아픔들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가운데 이렇게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도대체 고난은 왜 오는 것이고 아픔은 왜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가 따져본다고 하면, 그 이유는 정말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이유,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그 고난의 이유들, 아픔의 이유들을 우리가 따져본다고 한다면, 정말 많은 이유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이유들을 어떤 하나로만 너무나도 단순화시켜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편의상 그 많은 어려움들, 고난들의 이유를 두 가지로 편의상 구분해 보려고 해요. 이렇게 다 구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이유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운 것이겠지만,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서 두 가지로 구분해 본다고 한다면, 내가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것과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겪게 되는,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내가 잘못해서, 내가 나쁜 선택을 해서, 내가 실수를 해서 우리에게 고난이 오고 아픔이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예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경우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둘째 아들은 어느 날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 부족함이 없고,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 사랑이 넘치고,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 행복할 것인데, 이 둘째 아들은 어느 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죠.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의 삶 가운데 아주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비참함으로 이어져 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결국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 그 이유를 따져본다고 한다면, 결국 내가 잘못해서 내가 실수하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라고 우선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 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죠. 바른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른 선택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는데요 이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법칙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한 그 은혜를 누리며 살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칙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우리가 산다면 행복하겠지만, 하나님의 법칙을 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법칙을 버리면 무슨 법칙이 되나요? 사탄의 법칙인 것이죠. 그냥 중립적인 법칙을 우리가 선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탄의 법칙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게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과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물을 우리 주변에 뿌리게 된다고 하면 우리 주변이 우리가 뿌리는 그 사랑의 물에 의해서 푸른 초장으로 둘러싸이게 될 것이고 우리는 정말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손에 손을 내밀어서 사랑을 베풀면 그것이 내 것이 빼앗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내게 되돌아오는 것이죠. 사랑을 베풀고 우리가 은혜를 베풀면 그 사랑의 효과를 내가 맛보게 되는 것이죠. 내가 사랑의 말을 해주면 그 사람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나도 행복해지는 사랑의 선순환의 경험들을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닌 사탄의 법칙,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면, 금세 우리는 고통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탈취하려고 하고 부당하게 취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해 버리면, 그러면 그 결과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말을 하고 험담을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면, 그러면 결국 그 쓰다 쓴 열매들을 우리가 따먹게 되는 것인데, 어느 순간 우리가 광야 한가운데 나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외로움 가운데 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면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내 고통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선택, 내가 잘못된 판단, 내가 실수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했던 면이 어디에 있었을까? 이러한 고통을 가져오게 만든 나의 잘못된 행동과 선택이 무엇이었을까를 판단해 보고, 그래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그러한 것들을 고쳐나가는 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탕자에 비유해 보면 둘째 아들이 이런 비참한 상황 가운데 빠졌을 때 그는 그 순간에 자기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우리 아버지의 집에 가면 종들도 하인들도 배불리 먹는데, 나는 지금 그 풍성한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지금 이런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지금 무슨 선택을 한 것인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즉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개의 결단을 하게 된 것이죠. 결국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게 될 때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환영해 주며, 다시 아들의 위치로 회복시켜 주고 원상태로 돌려주는 그런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이러한 자기가 실수하고 잘못 선택하고 잘못 행동해서 고난이 왔을 때, 그럴 때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원망할 대상을 찾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속담 가운데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고 고난을 겪게 되면, 그러한 아픔 가운데서, 고통 가운데서 화낼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가? 내가 왜 이렇게 아픔을 겪는가? 그 이유가 누군가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찾는 거죠. 누구에게서 찾아요? 남편에게 찾는 거죠. 당신 때문이야! 아내에게서 찾는 거죠. 당신 때문이야! 사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께서 묶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힘들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래서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힘을 얻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인데,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우리들은 힘들 때 도움이 되어야 될 바로 그 배우자를 향해서 원망을 해버리기 시작하는 거죠. 당신 때문이야! 당신 옛날에 그렇게 잘못하고, 당신이 이렇게 잘못해서, 그래서 우리 가정이 이렇게 힘들어졌다고 하면서 분풀이 대상을 찾고, 내 화를 쏟아낼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분풀이 대상을 누구로 찾습니까? 엄마를 찾는 것이죠. “다 엄마 때문이야!” “엄마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못된 거,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그때 나한테 좋은 말 해줬으면, 엄마가 그때 나한테 사랑의 말 한마디만 더 해줬으면, 그러면 내가 이렇게 나쁘게 되지 않을 텐데, 엄마 때문에 내가 다 이렇게 됐다고, 엄마 탓을 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죠. 이게 다 아빠 때문이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 다 다른 사람들의 탓을 하면서, 원망하면서 비난하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원망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큰 아픔과 더 큰 고통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닌 겁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고,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이것이 모두가 다 내 탓이로소이다.” 나 자신의 아픔과 내 자신의 잘못된 선택들을 되돌아보며, 그래서 내가 어디서 잘못된 선택을 했는가? 어디서 잘못된 일을 해버렸는가? 돌아보고, 그래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바른 선택이지, 더 나쁜 선택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편 탓을 하고 아내 탓을 하고 아빠, 엄마 탓을 하는 것보다도 더 나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런 사람들은 누구냐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못된 이유가 뭐냐? 이거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하나님을 향해서 분풀이하는 것이죠.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는 믿을 수 없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이렇게 정말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예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하나님이 나를 이 모양 요 꼴로 만들었냐고 하면서,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 보셨습니까? 저는 많이 만났어요. 신앙생활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느냐고,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느냐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은 자신이 악을 행하여 나쁜 선택을 했고, 자신이 그렇게 나쁜 선택을 한 결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 모든 탓을 하나님 앞에 돌려버리면서,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자신이 그렇게 타락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가 이렇게 행복한 에덴동산에서의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이렇게 벌거벗은 것과 같은 이 상태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여자를 붙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던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통 을 주시기 위해서 사역,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으로, 뜻대로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우리를 고통 가운데 처넣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복과 생명의 길을 펼쳐주시고 엄청난 은혜를 우리들 가운데 선택할 수 있도록 내어주셨는데 그런데 우리에게 자유 의지로, 그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시해 놓았는데, 자기가 그 상을 걷어 차 놓고, 자기가 나쁜 선택을 해놓고, 자기가 악한 일을 해놓고, 나중에 와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만나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부터 1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이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부터 15절의 말씀 가운데 시험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해 놓았지만, 사실은 여기서 시험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해 놓는 것보다는 고통이라고 하는 말, 어려움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해 놓는다고 한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13절부터 다시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렇게 번역을 하면 훨씬 더 이해하기가 편할 겁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을 때에, 고난을 받을 때, 참 사람이 정말 힘든 일을 겪을 때에, 내가 하나님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을 주었다고 하지 말지니,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넣었다고 말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의해서 시험을 받는, 고통을 받는 분도 아니시고, 하나님은 아무도 고통 가운데 너는 하나님이 아니시니라. 14절 말씀. 오직 각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이유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에 따라 살다가, 그래서 미혹되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자신이 선택한 잘못된 그 욕심이 결국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내가 잘못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은 그 사악한 욕심이 우리를 이런 절망의 상태 가운데로 넣는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이유가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면 제일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제일 급선무일 것인데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없느냐 하면, 있어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죠. 어떤 경우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까? 길을 가는데 강도를 만나는 것 그건 내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요? 그 시간에 나간 게 잘못인가요?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강도 만난 건 내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내가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거, 그거 내 잘못 아니에요 내가 신호 위반한 거 아니고, 내가 잘못 운전한 거 아니고, 상대방이 잘못해서 내가 고난을 당하는 일들이 현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악한 행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그 나쁜 일 때문에,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요? 이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을까요? 그때도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1장 36절 오늘 읽은 말씀인데요. 로마서 11장 36절 말씀 가운데서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새새에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로마서 11장 36절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을 아주 잘 표현한 성경 구절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만물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만물이 어떻게 움직여요? 우연의 연속으로 움직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불신자들은 이 세상이 우연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거예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는 일 만나고, 어쩌다 보니까 이런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고, 어쩌다 보니까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된다고 불신자들은 이야기할 겁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컨트롤 아래에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한다면,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이 그냥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우리에게 고난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한다면, 그냥 살다 보니까 정말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고, 만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움직인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이 말을 하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왜냐하면 이 말을 듣고 첫 번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가끔 가다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이렇게 나쁜 짓을 했다고? “그런 하나님 안 믿어” 하면서, 당장 신앙을 중단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생겨요. 그래서 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정말 너무너무 조심스럽고 너무너무 참 기도하면서 이 강단 위에 서야만 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통 가운데 살게 만드시는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을 겪게 만드시는가? 우리는 항상 내 잘못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근데 어떤 경우에는 정말 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생기는 아픔들이 있을 때, 그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해요. 하나님 왜 왜 접니까? 왜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있습니까? 왜 나는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부터 살아야만 합니까?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그 마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오래전에 나왔던 영화 가운데 <브루스 올마이티>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봤을 건데요 텔레비전에서 많이 해줬어요. <브루스 올마이티>이라고 하는 “짐 캐리”라고 하는 영화배우가 주연한 영화를 보면, 어느 날 그 하나님이 이 브루스에게 하나님을 대행하도록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브루스가 하나님의 권한을 능력을 갖게 된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이라면 이랬으면 좋겠다고 싶은 일들을 막 합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는가 자기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은 기도를 빨리빨리 응답을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올라온 수많은 기도 제목들을 보더니만, “모두 다 YES” 다 허락해 준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대로 다 허락해 준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세상이 왔을까요? 좋은 세상이 오지 못했어요. 갑자기 기도한 대로 키가 커졌습니다. 갑자기 기도한 대로 모든 사람이 날씬해졌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식이 3배로 뛰어버렸습니다. 복권을 샀는데 복권의 1등 당첨이 됐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1등 당첨을 잘해서 그 회 복권 1등 당첨자가 40만 명이 나오는 바람에 1등 해봤자 당첨금은 17불밖에 못 받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1등이 나왔기 때문에. 사랑 애인과 분위기 있는 좋은 시간을 연출하기 위해서 달을 끌어다가 좋은 배경을 만들어 놓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좋은 환경을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 달이 옴으로 말미암아 지구 반대편에서는 해일이 일어나고 고난을 당하는 거죠.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데 문제 해결이 안 되고 엉망진창이 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에피소드가 그 영화 가운데 들어있는데요.

우리의 마음은 그냥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저 행복하고 그저 사랑이 넘치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살고 싶은 게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섭리와 계획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죠. 오늘 읽은 로마서 11장 33절, 34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하나님에게 카운슬러가 되었느냐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그것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거죠. 마치 마치 바둑을 두는데 바둑을 두는데 고수의 바둑 두는 그 자리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거기다 놓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어떤 어떤 분이 한 예화인데요. 조개가 조개가 인간을 보고 인간을 이렇게 바다 생물들한테 묘사를 했습니다. 내가 인간이라고 하는 생물체를 봤는데 말이야. 그 인간은 말이야 껍데기가 없어. 아 그리고 물속에 안 살아. 어떻게 영양 공급을 받지? 그리고 흐물흐물 거리는 마치 그런 이런 그런 해조류 같아. 조개 입장에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뜻과 계획과 섭리를 우리의 머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의 태도는 무엇일까? 내게 일어나는 내가 나쁜 선택을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고통스럽지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바른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뻐해야 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갈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어요. 열심히 일을 했지만 오히려 감옥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갈 때 이 일이 왜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삼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일어났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몰랐어요. 하지만 하나님께 원망한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겁니다. 욥기 23장 10절 말씀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는 몰라요.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아오리라.”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찬송과 기도를 한 것이죠.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는 바로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우리를 짓밟아 버리기 원하는 악마가 아니고, 그분은 우리와 상관없이 자기 길을 바쁘게 재촉하며 가버리는 나은애가 아니고, 우리의 신음소리조차 귀 기울이시며,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 원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그러기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서 내어주신 그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하나씩 만지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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