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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하나님의 말씀 (마 15:1-9)


오늘은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먼저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라고 하는 게 좋은 건가요? 나쁜 것인가요? 전통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애매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태복음 15장 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전통에 따라 살고 있다고 하는 점을 예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것이죠.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런 장애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런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의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켜라.”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카 교우들을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그 내용 가운데,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해준 그 전통이 있는데, 그 전통을 어떻게 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지켜라.” 전통을 버리지 말고, 전통에서부터 떠나지 말고, 전통에서부터 곁길로 가지 말고, 그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전통이 왜 좋은 것인가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이단에 빠지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제안해 주는 그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이 전통에 관해서 두 가지 표현이 나와 있기 때문에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전통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데, 전통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은, 또한 동시에 전통을 버릴 것이 아니라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한편에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한편에서는 저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혼란스러울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통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전통 그 자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서, 그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전통은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벗어나 있다고 한다면, 그 전통은 나쁜 겁니다. 그러니까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전통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생활의 최고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의 최고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라틴어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고 이야기를 해요. 솔라(sola)라고 하는 말은 “오직”이라고 하는 말이고, 스크립투라(scriptura)라고 하는 말은 성경이라고 하는 말인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되는가? 오직 성경만이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성경이 기준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고 하는 원칙이,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고 하는 원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해 나갈 때 우리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목사님이 해주신 말씀대로 잘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해오는 것이 그것이 좋은 것인가요? 그게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 대로 따라 하면 되는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이 하고 싶은 그 대다수가 말하고 있는 것이 기준인가요? 그것도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로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목사님의 말씀이 성경 말씀과 일치한다고 한다면 들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 성경 말씀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면 따라가야 되지만, 그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있다고 한다면 버려야 하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한다면, 귀 기울여 들어야 되겠지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인 것이고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 말씀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권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과 일치하느냐? 잘 반영하고 있느냐? 이것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우리 성경의 말씀 가운데 세워져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예배에 아주 큰 중요한 부분을 설교라고 하는 시간이 있겠는데요. 이 설교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그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일 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가르쳐주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과 어긋나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이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해서 전해준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죠.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그냥 먹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왜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고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겠죠. 지금까지 우리가 이런 전통을 가지고 신앙생활 했는데, 그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제자들을 두둔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전통으로 거역하고 있는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너희들의 전통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고 지적해 주시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시간에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전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내려오는 그 전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전통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집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 것이 전통으로 굳어져 우리들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했을 때, 기본적으로는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해봤어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그 가운데 “이게 제일 좋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 전통이 되는 겁니다. 실수해 봤어요. 시행해 봤어요. 많이 해보고 해 봤는데,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이렇게 하는 게 제일 좋았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전통으로 굳어져서 우리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오는 것이죠. 이러한 옛사람들의 경험, 옛사람들의 지식, 축적된 그런 지식들을 우리가 존중해야 됩니까? 무시해야 됩니까? 존중해야 되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어도, 내가 아직 하지 않았어도, 이전의 사람들이 실패했고, 이전의 사람들이 성공했던, 그 경험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류는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가? 우리 인류의 발전은 이런 선조들의 경험을 배울 수 있었고, 전통을 기반으로 해서 발전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들은 아주 엄청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역사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처럼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있는 시대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불과 몇 년 전을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이런 시대가 없었어요. 요즘 우리가 핸드폰을 가지고 뭐든지 잘하는데, 그러다가 예배시간에 소리도 울리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핸드폰을 아주 잘 사용하고 있는데, 그런데 불과 몇 년 전엔 그런 기능들조차 없었어요. 옛날에 뭐가 있었습니까? 삐삐 갖고 살던 시대예요. 삐삐 그전에는 그것도 없었어요.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어떻게 했는가? 전화하려고 하면, 막 돌리면, 그러면 신호가 가서 전화 교환원이 “누구에게 바꿔줄까요?” 얘기해서 꽂아주면, 그쪽으로 전화하던 그런 시대에서 우리가 살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놀랍게도 어디서든지 휴대폰으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고, 자동차도 요즘 무슨 차가 나옵니까? 버튼만 딱 누르면 알아서 주차해 줘요. 처음 듣습니까? 요즘 자동차를 보면 어떻게 해줘요? 버튼만 누르면 손 놓고도 알아서 가요. 제 딸이 그런 차를 사가지고,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엄청난 그런 기술의 발달이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축적해 왔던 지식을 무시하지 않고, 그 지식에 또 지식을 더하고 축적된 지식에 또 지식을 더하고 축적된 지식에 또 지식을 더했기 때문에 이런 발전이 가능했던 겁니다. 전통 위에서 또 다른 지식을 더했기 때문에 이런 발전들이 가능해진 것이죠.

그런데 동물들은 왜 발전이 없어요? 똑같이 이 지구상에서 함께 사는데, 우리 인류의 우리 인류는 막 발전하고 있는데, 왜 동물들은 그냥 그대로 똑같습니까? 동물들은 선조들의 실패와 지식으로부터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거죠. 새로 시작하는 건, 언제나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지식이 축적이 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고,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지식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전통이 되어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이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수많은 선조들의 지혜들이 모아진 것이 전통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좋은 신앙의 전통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유익입니다. 우리는 장로교 전통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이 장로교 전통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잘 설명해 주고, 요약해 주고 정리한, 그 교리의 틀 속에서 우리가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단으로 빠지지 않는 거예요.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조들이 만들어 놓았던 그 전통을 무시해 버리고, 내가 지금부터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해서, 새로 연구하기 시작해서, 새로 교리를 내가 정립해야 되겠다고 한다면, 과거의 모든 전통들을 버린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 잘못된 길로 가게 될 위험성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있고,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이 있고, 우리 교단 헌법에 12 신조가 있고, 여러 가이드라인들이, 안전한 전통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믿음 생활을 잘 안전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바울 사도는 자신들이 전해준 그 전통을 버리지 말고 잘 지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이 100% 완벽한 기준이냐면, 기준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서 취지와 목적은 사라져 버리고, 희미해져 버리고, 그저 방법론만 남고 스타일만 남아서 결국 우리들에게 맞지 않는 옛날의 옷을 입혀버리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어버릴 가능성들이 언제나 있는 것이 이런 전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전통의 장점과 단점들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금까지 우리들이 해왔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것인지 맞지 않는 것인지, 늘 살펴보고, 그래서 그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가 있었다고 한다면 라틴어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라고 하는 라틴어입니다. 이 말이 너무나도 좋아서, 제 방 뒤에다가 착 붙여놨는데요. 그 말의 뜻이 무엇이냐 하면 개혁교회는 “에클레시아 레포르마타” 개혁교회는 항상 “셈페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세쿤둠 베르붐 데이” 개혁되어야 한다 “레포르만다 에스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꾸만 개혁하고 또 개혁하고 또 개혁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개혁자들의 그런 모토와 같은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이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늘 살펴보지 아니하면, 원래 좋은 뜻으로 만들어졌던 그 전통이 때로는 우리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천여 년 전, 1500년 전 그때 교회는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너무나도 멀어져 있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던 것이죠. 우리가 오후 시간마다 중세 교회사를 배우고 있는데요. 중세 교회의 모습을 보면은 성경적인 모습의 교회가 아니라,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왜 이렇게 타락해 버렸을까요? 그들은 성경을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성경을 읽지 않아서 성경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요. 왜 중세시대 때 사람들은 성경을 안 읽었을까요? 안 읽은 것이 아니라 못 읽었습니다. 왜 못 읽었는가? 왜냐하면 자신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된 성경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한국말 성경이 다양하게 나와 있어요. 우리가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개혁 개정판 성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쉬운 성경도 있고 우리말 성경도 있고 현대어 성경도 있고 표준 새번역도 있고 새 번역도 있고 대한민국 성경도 있고 별별 성경이 다 나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중세시대 때 성도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 사람인데 독일어로 된 성경이 없었어요. 프랑스 사람인데 불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 사람인데 영어로 된 성경조차도 없었던 겁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은 무엇인가? 라틴어로 된 성경뿐이었어요. 이미 사어(死語)가 돼버려서, 더 이상 실생활에서 쓰지 않는 라틴어로만 된 성경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읽을 수도 없었고, 깨달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는가? 성경을 보면서 신앙생활한 것이 아니라, 신부가 알려주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가 결정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그 성직자가 알려준 그 가르침이 과연 성경에 부합하는 말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결국 삼천포로 빠지게 된 것이죠. 성직자들은 라틴어를 읽을 수 있었는가? 아니에요. 그 당시 중세 시대 때 신부들도 성경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라틴어를 배워야 되는데 라틴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는 성직자가 성도들을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 것과 같은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 6장 39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당시 성직자들은 성경 말씀을 전혀 몰랐고, 성도들도 성경을 몰라서, 함께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고, 단순히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것만 따라서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마틴 루터나 장 깔뱅이나 쯔빙글리나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읽고 히브리어, 아람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성경을 연구하면서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니까,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성경의 가르침은 그게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이 종교 개혁인 것이죠. 특히 당시의 성당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었는가? 당시의 천주교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었는가?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우리의 헌신으로, 우리의 공로로,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헌금을 많이 하면 그 헌금이 헌금함에 떨어지면서, 쨍그랑 소리가 울리는 그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던 당신의 부모님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서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그 면죄부가 소 3마리의 값이라고 했고 월세 6개월치에 해당하는 그 금액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면죄부를 사야만 했었던 것이죠.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마틴 루터나 장 깔뱅이나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 잘난 것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선을 행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보혈의 피로 우리가 값 없이 그저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이제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내려야 될 결론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마음속에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야 될까요? 안 읽어도 될까요? 읽어야 됩니다. 이번에 우리 청년들하고 성경 공부를 같이 하면서, “여러분, 성경을 매일매일 읽죠?” 그랬더니 대답을 못해요. 안 읽는데요.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신앙에 의존이 예배 시간에 예배드리고 그냥 목사님이 말씀하는 거, 말씀을 듣고 하는 것에만 의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명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지도자가 만일 잘못된 가르침을 주었을 때, 우리가 그 말씀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지 않고 따라갔다가, 결국 맹인이 인도하는 구덩이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그 원칙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스스로 읽고 묵상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잘 안 읽고 계셨던 분들이 있다고 한다면, 매일매일 성경을 한 장씩이라도, 아니 한 장이 아니면 그저 단 몇 절이라도, 한 단락 이름만이라도 매일매일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냐면 사실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그 말씀을 읽어도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그 말씀을 스쳐 없애버리고 “이런 말씀이 있구나” 하고 넘어가 버리는 거죠. 성경 읽었습니다. 내가 성경을 얼마큼 많이 읽었습니다만 생각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고,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 말씀에 비추어서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변화하고, 내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기준이 되어버려서, 지금까지 해왔던 전통이 기준이 되어버려서 그것이 우선이고, 성경 말씀은 저 밑에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전통으로 성경을 재단하고 판단해 버리고 무시해버린다고 한다면 성경을 읽는 것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죠. 이런 위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많이 알면 알수록 위험해요. 누가 제일 위험해요? 목사님이 제일 위험해요? 신앙생활을 오래 했던 분들이 위험해요 왜?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인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는 그 마음의 자세가 없으면 아주 위험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서지 아니한다고 한다면 읽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어린아이 사무엘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불러주셨어요. 그때 어린아이 사무엘은 엘리 대제사장이 나를 부르는가 해서 엘리 제사장 앞으로 가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불러주셨지만 내 생각이, 내 생각에 제사장이 나를 부른다고 생각하고 제사장 앞으로 달려가게 된 것이죠. 그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다음번에 들리거들랑,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님께 말씀하라고 이야기했고, 사무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비로소 그때 무릎을 꿇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게 될 때 주여,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치유하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나 생각들이 나를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변화시키지 못하게, 방어막을 치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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