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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으로 하라 (롬 12:3-8)

우리가 계속해서 로마서의 말씀을 쭉 살펴보고 있는데, 로마서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했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는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11장의 말씀까지 말씀해 주었습니다.

12장부터 들어가서는, 그러면 그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그 구체적인 문제를 12장에서부터 다루고 있다고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죠?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살펴본 것이죠? 로마서 12장 1절, 2절 말씀 다시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재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는 게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막 아무렇게나 살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재물로 드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죽이는 제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로 드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재물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 몸을,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인 것인데, 과연 그 영적인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한 것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했으니까, 분별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분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분별했다고 한다면 그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이 로마서 12장 1절, 2절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말씀을 나누었는데, 이 말씀을 들으신 후에 여러분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묵상해 오셨습니까? 아마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질문이 하나 떠올랐을 겁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분별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가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과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그 모든 뜻을 순종하며 살 수 있을까?”라고 하는 질문이 떠올랐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인데, 우리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인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뜻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너무나도 많고 크고 웅장한데,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너무나도 미약한 사람이거든요.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그 온전하신 뜻을 다 행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뜻, 어마어마한 뜻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정말 많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어떤 뜻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지금 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전쟁을 하고 있는 이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하고 있는 이 상황 가운데서,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곳에 뛰어들어가서 싸우지들 마시고 평화를 추구합시다. 전쟁을 그치게 하는 평화의 사도의 역할을 해야 되는 것,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저 아프리카에 가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이 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가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우물을 파주고, 그리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는 것 하나님의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인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는다고 한다면 정말 많은 것들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해외 이야기만 했습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런 어마어마한 많은 분야의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우리들이 다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이런 연약한 사람이, 나와 같이 이렇게 미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모든 뜻들을 어떻게 다 수행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3절에서부터 8절의 말씀은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대답일 거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12장 3절 말씀에서는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가? 마땅히 생각할 만큼만 생각을 해야지,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사람들에게 주어진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양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내게 주어진 그 분량에 따라, 그 분량에 적절하게 생각하고, 그 분량에 따라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내게 주어진 분량이 이만큼인데, 그 분량을 초과해서 그것의 분량에 맞지 않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오늘 로마서 12장 3절 말씀까지 3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정말 많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해야 되는가? 선한 일이기 때문에, 옳은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다 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그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사명이 있고, 내게 주어진 분량이 있는데, 그 분량에 맞게, 나에게 주어진 그 사명에 맞게 감당하고, 그것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완벽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이 있고, 장소의 제약이 있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그 자원의 제약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하면 저것을 하지 못하고, 저것을 하면 이것을 하지 못하는 등, 우리에게는 제약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적절하게 행동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면 몸의 비유입니다. 로마서 12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구성이 되는가? 우리 교회를 종종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곤 하는데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이 되는가? 다양한 지체들로 구성이 된다는 겁니다. 마치 우리들의 몸이 여러 가지 지체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처럼,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고 손발이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지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능들이 각각 다 다른 겁니다. 눈의 기능이 있고 코의 기능이 있고 입의 기능이 있고 손의 기능이 있고 발의 기능이 있고 귀의 기능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역할들이 다 달라요.

그런데 그 각각의 지체들이 어떤 일을 해야 되는가? 귀는 무슨 기능을 하면 됩니까? 듣는 기능을 하면 돼요. 귀는 듣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귀가 손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코가 냄새 맡는 기능을 하면 되는 것이고 코가 입의 기능까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입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어떻게 건강하게 유지되는가? 각각의 지체들이 자신이 맡은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갈 때, 그 사람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지체가 각각 역할이 달라서, 눈은 보고 코는 냄새를 맡고 입은 말하고 먹고 귀는 소리를 듣고 손은 만지고 발은 걸어가서, 그래서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 모두가 다 보겠다고 말하고, 모두가 다 듣겠다고 말하고, 모두가 다 먹겠다고 말하면, 그러면 그 육체는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들이 있을 것인데, 그 일들을 우리가 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맡겨진 믿음의 분량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맡겨진 그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은사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라고 오늘 로마서 12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까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한 사람이 모든 사역을 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자신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모든 선한 일을 다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그 사명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것까지 내놓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것을, 그 맡겨 놓으신 그 은사, 그 사명에 따라 잘 살았는가를 주님께서 물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은사도 주지 않고 맡겨주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왜 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죠. 고린도후서 8장 12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2절 말씀이죠.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헌금을 독려하면서 썼던 말 가운데 한 구절인데요.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받으시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지, 없는 사람에게서 왜 헌금하지 않느냐? 없는 사람을 향해서 “그 없는 것도 내놓아야 된다.”라고 말하는 조폭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무엇을 찾는가? 맡겨 놓으시고 그것을 확인하시는 하나님이지. 맡겨놓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조폭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 그 상황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어떤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를 보신 주님께서 화를 내면서, 이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냐고, 그렇게 그것을 물리쳐 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어린아이의 그 작은 선물을 보시고 받으셨어요. 그것만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드린 것이고 그것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것이죠.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만 내놓으면, 주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래서 5천 명이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죠.

달란트에 비유해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맡은 종이 나오는데요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충성하지 않고, 그 돈을 땅속에 감추어 놓았다가 책망을 받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달란트의 비유 가운데 놓여 있는데요. 주인이 그 한 달란트 맡은 종을 향해서 책망했던 내용이 무슨 내용입니까? “네가 왜 다섯 달란트를 안 가지고 왔느냐?”라고 책망한 게 아니에요. 한 달란트를 맡겼던 그 종을 향해서, “쟤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는데, 너는 왜 못 남겼느냐?” 다섯 달란트를, 왜 다섯 달란트를 못 남겼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달란트를 줬으면, 그 한 달란트를 가지고, 그거 가지고 은행에 맡기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했었어야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이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라고 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선한 일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은 가능하지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은사를 맡기셨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것을 주셨는가를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해야 되는 것을 하는 것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순종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아, 저건 내게 주신 사명이 아니라고 그냥 외면해 버려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 정도 분량이야. 나는 이 정도 분량이니까, “저건 내 사명 아니야. 저건 내 사명 아니야” 하면서 너무나도 쉽게 내 사명이 아니라고, 그냥 내 팽개쳐도 정당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봐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그냥 아, 저건 내 사명이 아니라고 외면해 버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면서 저건 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죠. 저건 내 사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순간에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면서, 저건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질문을 던진 것이죠. “내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고 했을 때,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자리에 수술 도구를 가지고 가서, 강도에게 찔린 그 수술 부위를 꿰매면서 치료해 주고, 그래서 그 사람을 완벽하게 되돌려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의대 졸업하신 분이 아니에요. 그냥 여행객이었을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달려가서 수술을 해줄 수는 없었어요. 그 사람에게 가서 앰뷸런스를 불러서 앰뷸런스에 태워가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그 선한 사마리아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지고 있는 헌금으로 그 사람의 상처를 싸매줄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었던 것, 가지고 있는 포도주로 그 사람의 상처에 부어서 그 상처가 더 염증이 나지 아니하도록 알코올을 부을 수 있는 그런 일은 할 수가 있었던 것이고, 그 사람을 나귀에 태워서 여관에 데리고 가 부탁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지,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했다고 해서, 그냥 저건 내 일이 아니야. 저건 내 일이 아니야. 자꾸만 그냥 다 내팽개쳐 버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자꾸만 한정시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한 해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성실하게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자꾸만 늘어나게 됩니다. 마치 부모님들과 같아요. 이제 막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초보 엄마, 초보 아빠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아이를 기를 수 있을까? 한 번도 길러보지 않은 그 아이를 내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아무런 능력도 재능도 없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당황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돌보다 보니까, 어떻게 됐어요? 반절 의사가 됐어요. 아이의 아픔을 치료해 주다 보니까, 감기 걸리면 돌봐주고, 배 아프다고 한다면 그 배 아픈 걸 어떻게 치료해 줄까 하다 보니까, 엄마들이 다 거의 반 의사가 됐어요. 반 전문가가 됐어요. 아이를 어떻게 하면 잘 기를까를 생각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그 부모님들이 아이를 기르면서 반 전문가가 다 되어가는 그런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그 영역이 확장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눈이 코가 되거나 귀가 손이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은사들이 점점점점 확장되고 능력이 커져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29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은사가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자꾸만 하나씩 하나씩 키워 나갈 때 그때 우리의 영역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처음부터 기가 막히게 잘할 수 있게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없어요! 한 명도 없어요. 사진 잘 찍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사진기 잡자마자 잘 찍었나요? 아니요. 처음 사진 찍을 때는 초보 티가 팍팍 나는 겁니다. 하지만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찍고 또 찍고 하다가 사진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물감을 잡자마자 멋진 그림이 나옵니까? 아니요. 처음에는 망쳐요. 처음에는 못 그려요. 하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연습하다 보니까, 그림을 잘 그리게 되는 거죠. 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리 처음부터 그냥 잘했나요? 그게 아니라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이고, 디자인도 마찬가지고, 달리기 선수도 축구 선수도 모든 선수도 다 아장아장 컸던 시절서부터 시작해서 성장한 것이지 처음부터 잘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난 못한다고 하면서, 잘하는 사람을 보면서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을 길러 나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나는 이거 못해. 저것도 못해. 아무것도 못해.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미리 지레짐작하고 포기할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그러한 사명들을 감당할 때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그 감당할 때의 마음의 자세에 대해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로마서 12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사역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어떻게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어떻게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가운데, 그냥 마치 아무 의미가 없는 표현을 반복해 놓은 것 같은데, 8절에서만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성실함으로 할 사람은 구제하는 자로, 그리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 해야 될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경우에 언급해 주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긍휼 베풀 때만 즐거움으로 하고, 다스릴 때만 부지런으로 하고, 또한 구제할 때만 성실함으로 하면 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 한 분야에만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으로 해야 하는 것이죠. 성실함으로 해야 되는 것이죠. 근면함으로 해야 되는 것이죠.

기쁨으로 해야 되는데,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억지로 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구제한다면, 우리가 남을 돕는다면, 다스린다면, 긍휼을 베푼다면, 성실하고 근면하고 부지런하고 즐거움으로 해야 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 이유 사명이 축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셨거든요. 사도행전 20장 35절의 말씀에,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지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부지런함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사명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내가 도움을 받는 것보다, 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복된 이유가 무엇이에요? 주는 것은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지 못하고 받는 것은 하나님께 내가 못 받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누가 복된 자입니까? 주는 자, 사명을 가지고 실천하는 자가 복된 것이죠.

연말이 다가오면서 추수감사절과 그리고 성탄절을 다가오면서 우리가 매년 우리 이웃들에게,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라면 상자를 이렇게 나누어 주던 일들을 금년에도 또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우리 교역자들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해요. “목사님, 이렇게 나누는 것은 좋긴 좋은데, 부담스러워하는 성도님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좀 망설여져요. 너무 큰 부담을 주고, 너무 큰 어려움은 마음에 힘든 일들을 시키는 것이 참 망설여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민을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우리가 하는 게 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모아서, 그래서 전달하면 이것이 많은 힘을 주기도 하고, 이 사회가 따뜻하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교회가 참 사랑이 많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겠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 상자를 다 못한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금액만큼이라도 헌금을 해서 참여하든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냥 기도만이라도 하더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내 일 아니다 내가 할 수 없다. 이내 생각해 버리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가 보리떡 다섯 개의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쁨과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실 때에도, 주님께서 아무런 머뭇거림이 없이 우리를 위해서 주님의 몸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여행 계획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재정 사용 계획을 포기하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들을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내 일이 아니라고 그냥 길에 그냥 포기해 버리고, 그냥 이내 하나님의 사명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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