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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소서 (사 6:1-8)

2020년 12월 6일 주일예배 설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인데, 만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이죠.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에 빠져버리고, 율법주의에 빠져버리고, 그리고 기쁨도 없고 타성에 젖은 종교 생활만 했었던 것이지,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에서는 늘 하나님을 이야기했고, 그들은 늘 하나님께 기도를 했고, 정말 그들의 삶 자체가 정말 종교적인 것 같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그들은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위선적인 그런 신앙이었고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그 모습은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까지라도,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자신의 열정을 다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느 날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가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타나 주셔서, 그 사도바울을 만나주시게 되었을 때, 그 사도 바울의 삶은 180도로 변화가 됐습니다. 전에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겁니다. 전에는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이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는, 그런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런 엄청난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원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야말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이사야라고 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그런 신비한 경험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목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어전회의를 하고 있는 그 광경을 바라보게 되는 그런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되었고, 결국 그 경험을 통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자원하게 되는 그런 놀라운 결단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말씀드리는 요지가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우리들도 모두 여기에 앉아 계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가 다 이렇게 이사야처럼 초자연적인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그런 어떤 신비한 경험들이 다 있어야만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다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본다든가 십자가를 붉은 십자가를 본다든가, 이런 어떤 영적인 그런 강력한 체험을 우리 모두가 다 해야만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던 이런 체험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알고 보면 아주 특별하게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예외적으로 있었던 아주 특별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를 통틀어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다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불러주셨던, 그리고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예외적으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그런 몇몇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이지, 오늘날 성경이 완성된 이 시대에 우리들도 똑같이 이런 식의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경험을 누구나 다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하는 것은 맞습니다. 방식은 초자연적인 방식이 아닐지라 할지라도, 그러니까 이사야가 하나님을 체험한 방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경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방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사람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그 방식이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 방식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은 맞는 것인데요.

오늘날 주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게 되냐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마음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주로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을 풀이해주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가슴이 뜨거운 그런 경험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어떤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우리가 그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체험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느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는가라고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이사야와 같은 그런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닙니다. 이것은 방법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방법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이런 초자연적인 경험들을 해야만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는가를 알 수 있는 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요. 어떤 신비한 체험이 기준이 아니라, 더 확실한 기준이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로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로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경험이 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태양이 떠오르게 되면, 우리가 그 태양의 빛에 의해서 사물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죄악이 드러나게 될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 앞에 물건들을 우리 앞에 있는 사물들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냐면, 나의 부족함, 나의 연약함, 내가 정말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는가 만나지 않았는가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그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다른 내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면 나는 인생을 참 의롭게 살았고,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정말 정당한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자기 교만으로 가득 차 있게 되는데, 그 사람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만 만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방 안이 정말 청소를 깨끗하게 해서, 다른 어떤 방보다도 훨씬 더 깨끗하고 정말 아주 번쩍번쩍하게 그 방을 청소했다고 할지라도, 햇빛 한 줄기가 그 방 안에 비치면, 그 방 안에 온갖 먼지들이 떠다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 안에 있는 그 더러운 죄악들이 드러나게 되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간증하는 사람이 있는데,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더러운 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리고 오히려 교만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종교 사기꾼일 가능성이 정말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 5절 말씀입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하나님 반갑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사인 한번 해주세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가서 사인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 너무나도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서, 그 앞에 설 수가 없는, 자신의 죄가 온전하게 다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벌거벗고 서 있는 것 같아서, 그 앞에서 부끄러워서 설 수 없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사의 선지자가 누구냐면, 조폭이 아닙니다. 불량배가 아닙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런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영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예수님을 만나게 된 그 베드로는 너무나도 기뻐하면서 좋아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직 피상적으로 주님을, 주님이 베드로 앞에 서 있기도 하고, 주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만남이 아직 피상적일 때에는 예수님과 그냥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내가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피상적으로, 피상적으로만 만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통해서 고기를 낚는 그 엄청난 체험을 한 뒤에는, 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게 됐어요. 진짜로 만나게 된 그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이냐면, “주님, 나랑 동업합시다.”가 아니에요. “주님, 우리 ‘베드로 예수 수상 유한회사’ 세워서, 떼 돈을 벌어봅시다.”라고 말한 게 아니에요.

그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서 고백하는 겁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자신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만 같아서,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만났는가 만나지 아니했는가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죄인인가를 확실하게 발견했는가 발견하지 못했는가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만나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누가복음 18장 11절 12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은 첫 번째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일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이제 망했구나.” 자신의 더러운 죄를 발견하면서, 이제는 나는 망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메시지를 선포해 주셨습니다. “너 같은 죄인은 나가 죽어라.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이사야 선지자를 향해서 그 용서의 선언을 해주시는 것이죠. 그때 스랍 중에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재단에서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 입술에 대면서, “네 죄가 사해졌다.”라고 선언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용서의 체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꾸만 가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내 의로움을 자랑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죄를 가리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지를 떠벌리고 다니고,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우리 조상 때부터 이렇게 열심히 몇 대에 걸쳐서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인가를 자꾸만 이야기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가를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를 자꾸만 감추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왜냐하면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이 너무나도 창피하고 더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마치 우리들의 부모님과 같아요. 우리 부모님과 같아서 우리 자녀들의 문제가 있으면, 감싸주려고 하고, 회복시켜주려고 하고,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만들까를 생각하는 그런 부모님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으로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책망해 버리고 지옥에 보내버리고 끝내시는 그런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회복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나아가야 되는 거예요. 의사들 앞에 가면, 자신의 그 질병을 그대로 이야기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의사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는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이사야 선지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명을 일깨워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 앞에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라고 하는 그 음성을 들려주셨고,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고백을 합니다.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이 그냥 그냥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메시지는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그 사명에 동참하기를 원하셔서, 그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 그 순간에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더러운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만나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말하자면 아무것도 도움이 필요 없으시고, 어떠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아무런 사람의 힘이 필요 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맡겨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죠? 그것은 우리들의 재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사명의 자리로 오라고 불러주시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명의 현장으로 불러주실 때, 우리는 못한다고 뒤로 물러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 제가 아직 할 만한 상황이 안 됩니다. 제 코가 석자입니다. 나중에 돈 벌면 그때 충성하겠습니다. 나중에 집이라도 장만한 다음에 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라도 다 키운 다음에 하겠습니다. 주님, 예전에 헌신하고 예전에 주를 위해서 정말 헌신하고 수고했는데, 수고한 결과 얻은 것은 뒤에서 수군수군거리고, 비아냥거리고, 욕하는 그런 이야기만 듣고 더 이상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다시는 이제는 교회에서 헌신하지 않겠다. 주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겠다. 그냥 예배만 살짝 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핑계대를 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금 당장의 헌신을 요구하고 계시는데요. 그렇게 지금 당장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당장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이사열을 사용해 주시는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명의 현장으로 불러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사역을 하면서 이러한 사명에 순종해 나가는 그 일 가운데 우리가 영적으로 더 성숙해져 나가고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그런 영적인 방법과 길이 되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시는 것이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 있던 그 어린아이에게서 예수님께서는 그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괜찮으니, 이리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것이 없어도 다 먹이실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엄청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죠. 만일 그 순간에 우리들은 뭐라고 대답합니까? 만일 우리들에게 그런 요청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대답을 합니까? 주님, 오병이어로서는 불가능하니까, 제가 지금부터 다시 돌아가서 지금부터 열심히 장사해가지고 열심히 돈 벌어가지고, 5천 명을 먹일 만한 돈을 만들어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때 그만큼 능력이 되면 그때 헌신하겠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겠습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에게 완전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너희들이 다 모든 것을 다 먹일 수 있도록 그렇게 먹일 수 있어야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작은 것 나에게 있는 그것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그걸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기적에 참여하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그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동참하기를 원하시게 만들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헌신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다 다 성직자가 돼야 되고 모두가 다 목사가 되어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선교 사역에 동참해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교회 일을 전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사명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실은 가정이 우리들의 사명의 현장이에요. 남편을 사랑하고 연약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이고, 우리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도 하고, 우리가 일터에서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명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냥 우리가 지나쳐 버릴 일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필요한데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옆을 지나게 하게 하신 이유는 그 사람을 도우라고, 나로 하여금 이 옆을 지나가게 만들어주셨구나를 깨닫고 도와주는 것, 그것이 사명이에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때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가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마실 것을 주었느냐? 옷을 입혔느냐? 나를 돌보았느냐?”라고 그렇게 질문을 던지시는 거죠. 무슨 말씀입니까? 그때그때 우리들에게 주어지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만나는 그런 현장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나로 하여금 바로 이 자리에서 저 사람을 만나게 했고,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 가정을 허락해 주셨고,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만남을 허락해 주셨는가를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그때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주소서. 나를 보내소서.” 헌신하고 다가가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이것은 내 사명이 아니라 너희들이 지은 죄 너희들이 책임져 버리라 하고 외면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이 낮고 천한 땅으로, 베들레헴의 말구유 간으로, 낮고 천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그 엄청난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저와 여러분들이 받았다고 한다면, 오늘은 그것을 기념하는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될 텐데 “주님, 나를 보내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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