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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마 1:1, 17)

우리가 지난주에, 지난주가 아니라 지난번에도 같은 본문을 가지고 한 번 말씀을 전한 적이 있는데요. 지난번에도 마태복음 1장 1절 그리고 17절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이 땅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것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다행입니다. 기억이 나니까. 그런데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제2탄으로, 예수님께서 이제는 “다윗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함께 같이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게 된 것이, 특별히 많은 조상들이 있는데, 그 수많은 조상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그리고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특별히 언급해 가면서, 이분들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헬라어 원문은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요약함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인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동시에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표현해 주고 있고요.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이 족보를 3 등분하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까지, 각각 3개 구분을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 17절의 말씀이죠.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더라”라고 이렇게 요약해 주고 있는데요. 여기서 이렇게 14대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 숫자 14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데 그것을 좀 파악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숫자를 통해서 뜻을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방식을 가리켜서, 전문 용어로 “게마트리아라”라고 합니다. “게마트리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름이나 단어 구절에 숫자를 할당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히브리식 방법을 가리켜서 “게마트리아”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알파벳에 숫자를 하나씩 하나씩 부여합니다. 우리나라 철자라고 한다면, 기억 니은 디귿 리을 할 때, 1, 2, 3, 4 이런 식으로 숫자를 할당하는 것인데요.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은 3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DVD로, 그런 3개의 철자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데, 자음만이죠. 그래서 이 “달렛”이라고 하는 철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네 번째 나오기 때문에 4라고 하는 숫자를 숫자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철자인 “바브”라고 하는 철자는 여섯 번째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6이라고 하는 숫자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요. 다시 달렛이라고 하는 것에서 4, 6, 4를 더하면 14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윗의 이름은 14라고 하는 숫자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에서부터 예수님까지 14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의 후손으로 왔다? 다윗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법이 바로 이 마태복음 족보에 나오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에야 이게 무슨 뭐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숫자라고 하는 게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요?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2천 년 전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숫자로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왔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정말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열네 대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일 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점을 오늘 함께 우리가 같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과연 다윗의 아들로 왔다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라고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짓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라 7장 12절에서부터 1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예언이 하나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오.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하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들려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는 것이죠. 언제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해주셨나요? 혹시 그 상황을 기억하십니까? 이런 때였어요. 어느 날 다윗이 왕궁을 거닐다가 하나님의 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을 바라보니까, 성막이, 자신은 지금 왕궁을 멋있게 지어서, 이스라엘의 왕궁에, 정말 화려한 왕궁에 살고 있는데, 그 왕궁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바라보니까, 그 성막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 겁니다.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이것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함께 있으면서 있었던, 그 성막이었고, 그것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기 때문에, 이 성막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이 낡아져 버려서, 보기에도 칙칙하고 정말 멋있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그런 마음이죠. 정말 선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나단 선지자는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그렇게 하시라고, 정말 그 마음이 너무나도 귀하다고 하면서, 그 성전을 짓는 것을 동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에게 성전 짓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다윗은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인데, 나를 위해서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성전을 짓지 말게 하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이 다윗이 그 말을 듣고 그 계획을 멈추었습니다. 내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렸는데요. 그런 다윗을 향해서 주셨던 말씀이 조금 전에 읽었던 사무엘하 7장 12절에서 13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그냥 지을 수 없지만, 그러나 네 아들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해 주겠다. “네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이다”라고 예언해 주셨고, 그 아들을, 그리고 이 다윗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여러 가지 그 성전 재료들을 많이 모아놓고 죽었고, 결국 솔로몬이라고 하는 다윗의 아들이 일어나서 멋있는 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십니까? 솔로몬이 너무나도 멋있는 그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심각한 단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단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는 단점이에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었는데, 거기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계속 죄를 지으면서, 회개할 마음도 없으면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싫어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솔로몬의 성전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성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면서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솔로몬을 통해서 그런 아름다운 성전을 짓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 1차적으로 성취된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의 아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정한 성전을 짓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으신 성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지으신 성전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는 성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죠. 성전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런 건물로 성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드려서, 영원한 번제를 드려서,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죄의 담을 무너뜨렸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지으신 것이고, 그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에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번제로서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짐승의 피로 갚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드렸던 그 제사가 진정으로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막혔던 담이 뚫리게 되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성전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그 성전이 타락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데, 예배를 드리는 것은 뒷전이고, 사람들이 거기서 장사를 하면서 장사꾼의 소굴이 돼버린 거예요. 강도의 소굴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파는 물건들을 다 뒤집어엎어버리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와서 따진 겁니다.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느냐?”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2장 19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3일 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건물을 짓겠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전의 기능이 작동하게 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윗의 아들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나게 하는,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그 길을 열어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다윗의 아들이니까 다윗 왕의 아들이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의 왕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왕이 우리들에게 오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왕을 우리들의 마음의 왕으로 모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셔야 되는데,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가짜 왕을 쫓아내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지금 누가 자리 잡고 있습니까? 가짜 왕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면, 그 가짜 왕을 쫓아내 버려야 되는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누가 왕인가 독재자가 왕인 겁니다. 폭군이 왕인 겁니다. 그래서 그 독재자가 우리들의 마음의 왕이 되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폭군이 우리들의 왕이 되었고, 독재자가 우리들의 왕이 되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감언이설로 우리를 속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는 정말 그 왕이 좋은 줄 알고 투표를 했어요. 우리가 표를 줬어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왕으로 자리 잡은 것이죠. 폭군 독재자가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오면서, 우리들에게 했던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 성공을 주겠다, 번영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에 왕으로 자리 잡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 왕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것은 그가 약속했던 행복과 번영, 성공, 자유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억압을 당하게 되었고,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피폐하게 되었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게 되어버린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만들어버린 것이죠. 그런 독재자, 그런 그 폭군이 누구일까요?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잘못된 폭군이요 독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폭군으로 섬기는 그 가짜 왕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돈이라고 하는 왕이죠. 돈이라고 하는 왕은 우리들에게 화려한 약속을 합니다. 돈의 위력을 보여주면서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고 돈만 있으면 편안할 것이고 돈만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온갖 약속을 하면서 돈을 섬기라고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돈이 최고인 줄 알고 그 돈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거기다 다 갖다 바쳤는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돼요? 쫄딱 망하게 된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건강만 잃어버린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사이만 틀어진 거예요. 우리의 삶을 정말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로 우리를 집어넣어 버린 것이 돈이라고 하는 우상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공이라고 하는 우상,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내가 행복할 줄 알았는데, 결국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괴롭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 이 세상 가짜 왕이 우리들에게 화려한 약속을 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피폐한 나라가 되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왕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참된 왕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성탄의 시즌에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선생님으로 생각을 해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모욕하지는 않지만, 아주 위대한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무슨 이야기가 많이 들리냐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제자 훈련을 하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교회 내에서 정말 많이 듣습니다. 그게 나쁘다고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지금 도덕적인 붕괴를 하고 있는 그런 참담한 현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삶, 고귀한 삶을 우리가 따라가고 배우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매력적인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주님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주님을 따라 배워 나가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일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선생님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게 아니에요. 그게 충분한 게 아니라, 그게 목적이 아니라 이 말이에요.

왜 선생님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왜 선생님 예수님이 우리의 선생님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선생님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선생님 출신들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왜 능력이 없느냐? 아무리 대치동 족집게 훌륭한 엄청난 강사 선생님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우리 아들을, 우리 딸을 대학에 들여보내 주고, 입학시켜 주나요? 예? 아니요! 그게 안 돼요. 아무리 훌륭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거장이 우리 선생님이라고 하면, 내가 저절로 거장이 되나요? 아니요. 그게 우리의 문제예요. 안 되는 게 문제예요. 좋은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를 맡기기만 하면, 그러면 우리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가 아니에요. 그게 안 된다고 하는 게, 그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그 말씀, 그 가르침 그 교훈이 우리가 따라야 될 것이지만, 그리고 반드시 따라야 하고, 우리가 반드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되고, 그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하는데 문제인 것이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옳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다 알지만 그럴 것을 행할 만한 능력이 내게 없는 게 문제고, 아무리 정답을 알려줘도, 그 정답대로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은 길을 가르쳐주어도, 우리가 따를 수 없다고 하는 데 문제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한번 해봐. 그러면 잘 될 거야.” 그렇게 가르쳐주고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참된 왕으로 이 땅 위에 내려오신 것이죠. 그리고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의 더러움을 예수님에게 그대로 묻히시고, 그 아픔과 슬픔들 주님께서 다 지셔서, 우리를 저 사탄의 종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었던 줄로 믿습니다.

이 성탄의 시즌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게 만드는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시는 다윗의 아들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영적으로 타락해 버린 우리들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주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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