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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탄생 (눅 2:1-7)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왕궁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축복하는 가운데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 그리고 어느 한 초라한 그곳에서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장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초라하게 탄생했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용은 뭐죠?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부터 베들레헴으로 왔는데, 베들레헴에서 머물 수 있는 그런 집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여관을 찾지 못해서,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어느 마구간에 들어가서, 거기서 잠을 청해야만 했었고,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흔히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한번 제가 설명을 해드린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누가복음 2장 7절 말씀에 근거해서 많은 사람들이 상상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죠.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번역해 놓았으니까, 이것이 헬라어 원문에서부터 번역할 때, 영어도 inn이라고 번역을 해놓았고, 한국말도 여관이라고 번역을 해놓아서, 여관을 찾으려고 했지만, 여관을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굿간에 들어갔고, 거기서 아기를 낳은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이해를 많이 해 왔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 여관이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사실은 여관으로 번역하기보다는, 다른 말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헬라어 단어 카탈루마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이 카탈루마라고 하는 단어는 여관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방, 침실, 거처, 객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맞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누였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물고 있었던 그 집의 방에 그 아이를 뉘일 만한 마땅한 다른 장소가 없어서, 구유, 여물통에 뉘인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낳은 번역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고요.


여관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판도케이온”이라고 하는 단어가 여관이라고 하는 그런 단어인데요. 선한 사마리아인에 비유해 보면,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돌보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관은 그런 “판도케이온”이라고 하는 단어가 여관이고, 카탈루마라고 하는 것은 방을 의미하는 겁니다. 객실을 의미하는 것이죠. 따라서 누가복음 2장 7절의 말씀은 여관에서 잠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를 놓을 만한 방 안에 마땅한 장소가 적절치 않아서, 가장 좋아 보이는 곳 여물통 속에 넣어두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객실에 있을 곳이 없었다고 하는 말은 누가 있을 곳이 없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 카탈루마의 방에 그들이 있을 곳이 없었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셉과 마리아가 아예 집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면 집 안에 살고 있었지만, 그 집 안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아기가 태어나니까 그 아기를 따로 더 뉘일 만한 곳이 없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두 가지 의미가 다 가능해요. 다 가능하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부터 와서 베들레헴에 와서 잠을 채워달라고 부탁을 한다고 한다면, 베들레헴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두 다 거절하고 재워주지 않았을 거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까? 그 가운데 어떤 집은 환영하고 받아주고 재워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까요? 1번? 번, 이느 것이 맞을 것 같아요? 2번이 맞을 것 같아요. 만일 여러분들의 집에 누군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 내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인데, 길거리에 서 있을 수 없으니 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재워주시겠습니까? 쫓아내시겠습니까? 예! 재워주죠. 그게 사람의 인지상정이에요. 심지어 조폭의 동네에 가서 채워달라고 해도, 조폭들도 채워줄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그런 출산이 임박한 여인이 머물 곳이 없다고 한다고 하면, 아무리 평상시 나쁜 짓을 많이 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그냥 매몰차게 나도 모르겠다고 쫓아내 버리기보다는 받아주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뉴스를 한번 본 적이 있는데요.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이야기입니다. 2022년 12월달에 한국인 관광객이 9명이 미국으로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9명이 나아가라 폭포도 구경하고 신나게 재미있게 잘 놀면서 지내고, 그래서 이동하는 가운데,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린 겁니다. 눈이 내렸는데 눈이 얼마큼 내렸는가? 1m가 내린 거예요. 그런 거 보셨습니까? 저는 미국에서 굉장히 많이 봤어요. 매년 50cm 1m 그렇게 내리는 그 눈을 늘 경험하면서 지냈는데요. 이 여행객들이 지나가다가, 눈이 그렇게 많이 쌓여서 차가 막 미끄러지고 하면서 한 곳에 처박혀버린 거예요.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 상황 가운데서, 할 수 없이 제일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리고 지금 우리 차가 빠졌는데 삽 좀 빌려주시면 좋겠다고, 그래서 눈을 치우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호텔로 가려고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그 집의 주인이었던 캄파냐 부부라고 하는 분이 그 9명 운전사까지 10명 해서 그분들을 자기 집으로 모셨어요. 뉴스 들어보셨습니까? 너무나도 따뜻한 이야기이죠. 그 가정이 10명의 사람들을 2박 3일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주고, 그래서 눈이 다 치워진 다음에, 그들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하는 아주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우리도 그럴 것 같아요. 누구든지 그럴 것 같아요. 매몰차게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환영해 주는 것이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군다나 2천 년 전 유대 사회는 어떤 사회였는가? 유대 사회 가운데서 가장 최선의 미덕이 무엇이냐 하면,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융숭하게 대접해 주는 것이 가장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던 사회가 유대 사회였습니다. 지금도 그 풍습이 남아서 이스라엘의 시골 마을에 가면, 중동지방의 시골 마을에 가면,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면 재워줄 뿐만 아니라, 아주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고 융숭하게 대접해서 보내는, 그런 풍습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에 왔을 때, 잠자리를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깝게도 그냥 마구간에 들어가야만 했던 그런 상황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그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동네는 어떤 동네였는가? 베들레헴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씨족사회인 거죠. 씨족사회여서 그 마을 전체가 요셉과 마리아의 일가친척들이 다 포진하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에서 오래간만에 돌아온 그 요셉과 마리아를 아주 환영해 주면서 받아들였을 거라고 상상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아기를 언제 낳았을까요? 도착하자마자 낳았을까요? 오랫동안 좀 머물고 있던 상태에서 아기를 낳았을까요? 생각을 해보세요. 언제 낳았을 것 같아요? 도착하자 낳았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베들레헴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가운데, 아기를 낳았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6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거기 있을 그때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해산할 날이 차서’ 해산할 날이 가까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적어도 출산이 임박했다고 한다면 여행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래서 아마도 여행을 했다고 한다면, 아직 출산할 날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나사렛에서부터 저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하였을 것이고, 그리고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있으면서 호적도 하고 여러 가지 처리해야 될 일들을 처리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아기를 낳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데요. 그곳에 지금까지는 잘 지낼 수 있었지만, 아기를 낳아서 그 아이를 뉘일 만한 그런 여유가 그 집 안에 없었던 것이죠. 특별히 출산한 여인을 따로 좀 멀리해서 격리시켜서 지내야만 했던 당시의 문화에 따르자고 한다면, 그런 것이 모두가 어려운 상태였을 것인데요.  

당시 집의 구조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면, 집이 있는데, 방들이 있고, 카탈루마가 있고, 그리고 그 집에 축사가 있는데, 그 축사에 있는 짐승들이 머리를 내밀고 약간 올라가 있는 방에 설치되어 있는, 여물통을 통해서 그 여물을 먹게 되는 그런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이제 그림으로 한번 보자고 한다면, 저렇게 소나 말이나 염소들이 자기들이 그 방 안에 있는 그 여물통에 머리를 들이밀고, 그렇게 여물을 먹게 되는 그런 구조로 집들이 마련되어 있었을 텐데, 그 짐승들은 다른 집으로 옮겨버리고, 그리고 그 여물통을 깨끗하게 씻어서, 아이를 놓았을 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그런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것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은혜가 되기는 해요. 왜냐하면 아무도 받아주지 않고 아무도 잘 자리도 없는 그렇게 힘든 상황 가운데서, 그래서 그 마구간에 들어가 짐승들과 함께 지내다가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그리고 정말 참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지금 제가 설명드린 것은 케네스 베일리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학자가 연구한 결과인데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서양에서 연구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직접 중동에 가서 몇십 년 동안 거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모든 것들을 다 알아보고 난 다음에 이 사람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설명을 해도 예수님의 탄생이 초라한 탄생이었을까요? 아주 화려하고 멋있고 웅장한 탄생이었을까요? 그래도 초라한 탄생인 것이죠.


예수님이 어디에서 탄생했는가? 저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모든 사람들이 축하하고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된 상태에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 저 베들레이라고 하는 시골 마을에서, 그리고 그 아이를 누일 만한 그런 마땅한 곳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긴박하게 여물통을 씻어서 거기에다가 자리를 마련하고 그래서 누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여전히 초라한 탄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왕의 자녀는 어디서 태어납니까? 왕궁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죠. 최고의 시설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죠.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태어나게 될 겁니다. 요즘에는 다 태어나는 게 왕자들 같고 공주들 같아요.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자녀들 보면 정말 좋은 시설에서 다 태어났습니다. 예수님보다 몇십 배 몇백 배 좋은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정말 누추한 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오늘 누가복음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낮고 천한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만나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악에 빠진 우리들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저 하늘의 영광과 저 하늘의 아름다움을 다 포기해 버리시고,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초라한 탄생을 선택하셨던 것이죠. 신분이 높은 공주님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을 만나줄까요? 안 만나주죠. 신분이 높은 공주님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다가가면 “아이고 더러워” 하면서, 몸을 비킬 거예요. 악수하자고 하면 아마 장갑을 끼고서, “아이고, 그 더러운 손 만지기 싫어” 하면서 장갑을 끼고 만질지도 모르죠. 왜냐하면 너무나도 고귀한 신분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경호원들이 나타나서 접근하는 것조차 막을 것입니다. 어디 약속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냐고 하고 막고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시면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서,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그래서 누구나 다 만날 수 있게 우리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 보면은 저를 만나기도 굉장히 두려워하세요. 제 방에 오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들어오시는데, 그렇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저는 그냥 만나셔도 됩니다. 그런데 조금만 뭐 하면, 사람들이 만나기 어려워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초라한 모습으로 베들렘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53장 2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700년 전에 예언해 놓았는데,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정말 고귀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그냥 다 무장 해제해 버리고, 화장 다 지워버리고, 그리고 우리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낫고 천한 자리로 오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한번 제가 말씀을 드렸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잘 알고 있는 어떤 미국에서 같이 교제하던 목사님이 있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한테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모범생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까?” 왜냐하면 그분이 정말 훌륭하신 분이에요. 정말 훌륭하신 분이고, 팀 켈러 목사님과 같이 동역하기도 하고, 정말 뛰어난 목사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 물어봤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아주 모범생으로 그렇게 보내시다가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아이고 말도 마세요. 제가 학창 시절에는 완전히 문제아였어요.” 그렇게 얘기를 해요. 아주 문제아였는데, 왜 문제아였는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겁니다. 그 사춘기 때 이민을 가버렸으니, 이민을 가서 그 낯선 땅에서 학교에서 공부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어요? 아이들이 인종차별을 하는 겁니다. 은근히 욕하고 왕따 시키고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거기다가 말도 잘하지 못하니까, 영어를 배우긴 배우지만 여전히 떠듬떠듬거리고, 그리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정말 학교 다는 것이 학교를 다니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죽을 것만 같은 그런 고통 가운데서 학교를 다니니까, 더군다나 이 사춘기에 이 아이가 학교에서 너무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가지고 문제아가 된 겁니다.


아이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면 때리고, 아이들이 뭐라고 하면 욕하고,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니까, 교장 선생님이 그 목사님을 불러서 어린 시절의 그 목사님을 불러서, 충고를 하는 거예요. “얘야, 네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네가 열심히 착하게 살고, 공부도 하고, 열심히 해야, 그래야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지내니?”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그렇군요.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되는군요. 착하게 살아야 되는군요”. 하면서 열심히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아니요. 뭐라고 얘기했냐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나 그런 거 되고 싶지 않아요. 내게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내가 망치면 어때요?” 그러면서 교장 선생님한테 화를 내고, 전혀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할 수 없이 이야기를 한 겁니다. “네 어머니를 좀 학교로 오라고 해라. 어머니랑 얘기 좀 해야 되겠다.”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서 아빠 엄마는 낮에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때 들어와서, 아이랑 “학교에서 어땠니? 좋은 일이 있었니?”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얘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엄마한테 툭 말을 던졌어요. “엄마, 학교에서 그러는데, 엄마, 학교에 한번 오래.” 엄마의 마음이 철커덩. 애가 무슨 학교에서 사고를 쳤나? 걱정이 돼서, 마음이 그래서, “그래, 그러면 내일 몇 시에 학교에 갈 테니까, 네가 나와서 나를 교장실로 데리고 가라.” 해서 그다음 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날씨가 시카고의 날씨가 어떤 날씨였는가? 아주 추운 매서운 추운 날씨 가운데, 학교 문 근처에 서서, 엄마가 오기를 그 학생이 기다린 거예요.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엄마가 저기서 버스에서 내려가지고, 학교로 오는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하이힐을 신고 그 추위 가운데, 추운 몸 벌벌벌 떨면서, 학교로 오는 그 모습을 그 학생이 봤어요. “엄마가 나 때문에 여기에 오는구나. 내 문제 때문에, 엄마가 나를,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그 추운 날씨에 내려오는구나.”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너무나도 힘들더라고. 그러고 나서 이 사람이 그때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그리고 이제 좀 태도가 바뀌어져서, 그래서 결국 나중에 아주 좋은 목사님이 되기까지 그런 과정을 사춘기에 아주 힘든 과정을 겪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에요. 죄는 우리가 지었고, 잘못은 우리가 했고, 우리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악한 일들을 했을 때, “이 쓸모없는 놈들” 하면서 내 팽개쳐버리고, “너는 그냥 지옥에 가버려” 하고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영광을 다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이 성탄의 계절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외면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1등을 기억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잘 나가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대단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찾으셔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시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났기 때문에, 효용 가치가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어도 하나님이 사랑하셔요.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어도 사랑하셔요. 아들로서의 자격이 없어도 사랑하셔요.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흙의 손에 흙 묻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낮고 천한 것으로 짐승들의 여물통까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 것을 기억하며 오늘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며 이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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