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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탐대실 (왕상 2:36-46)

지난 시간에 우리는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처형한 이야기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다윗의 여자였던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요청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아도니야는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고, 아비아달 제사장에 대해서는 제사장 직분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도록 해버리고 추방해 버린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 지난 시간에는 솔로몬이 요압 장군을 처형한 이야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아도니야가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이 요압 장군은 도망을 가서 제단 뿔을 잡았지만 하지만, 그 제단 뿔이 그를 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시므이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다윗이 피난길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향해서 욕을 하면서, 흙먼지를 날리고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비난하고 저주했던 사람이 바로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저 시므이를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분노하고 있었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고 그를 살려두었는데요. 그런데 다윗이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던 겁니다. 시므이를 내가 용서해 주기는 했지만, 그 시므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어야 될 것이며, 이 시므이는 언젠가는 처단해야 될 사람이다. 그냥 살려둘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이 평안하게 제 수명대로 살게 놔둘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언젠가는 죽여야 될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유언을 솔로몬에게 남겨두었었습니다.


그 유언을 들었던 이 솔로몬이 당장 솔로몬을 시므이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왜 솔로몬이 시므이를 당장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첫 번째는, 다윗이 시므이를 용서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이 있었지만 다윗은 그 시므이를 용서했거든요. 그러니까 용서했는데,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 시므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처럼, 이 시므이가 솔로몬 왕과의 약조를 깨버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라고 하는 동네까지 나가서, 자기의 종들을 되찾아 가지고 온 그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을 때에, 결국 이 솔로몬이 시므이를 죽이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죽이지 않고 있다가, 시므이가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기다렸다는 듯이 시므이를 처형한 이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솔로몬은 왜 이런 식으로 시므이에게 대응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축구 이야기와 한번 빗대어서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축구 경기를 하다 보면 선수들이 심판의 눈에 좀 거슬리지 않게 슬쩍슬쩍 반칙을 합니다. 혹시 축구 보셨습니까? 어제 황희찬의 울브스가 이긴 것도 아십니까? 근데 축구 경기를 하다 보면 선수들이 반칙을 합니다. 반칙을 하는데 반칙할 때마다 심판이 옐로카드 꺼내고, 레드카드를 꺼내게 된다고 한다면, 그 축구 경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도 빈번하게 부딪히고 빈번하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마다 레드카드, 그때마다 엘로우 카드를 내미는 그런 심판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축구 경기 정말 재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축구 심판은 어떻게 하는가? 반칙이 있어도 대체로 관대합니다. 대체로 그냥 눈 감고 지나가요. 정말 저 반칙은 위험한 반칙이다. 저 반칙은 정말 옐로카드를 줘야 되고, 레드카드를 줘야 될 만한 반칙이라고 생각될 때에만, 그때의 반칙 카드를 꺼내는 것이지, 웬만하면 그냥 그냥 지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선수가 반칙을 저질렀는데, 그 경계가 애매모호한 겁니다. 일본 말로는 아리까리한 거예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축구 심판이 그 선수를 부릅니다. 불러서 내가 옐로카드는 주지 않겠지만, 다음에 한 번 더 그가 또 똑같은 짓을 하게 된다고 하면, 그때는 지체하지 않고 옐로카드를 주겠다고 경고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선수가 축구를 하다 보면 심판이 자기에게 했던 구두 경고를 망각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공을 막아야만 했고,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저지해야 되기 때문에, 그때 무리하게 태클을 걸다가, 결국 그런 힘든 반칙을 하게 되었을 때, 그때 축구 심판은 뛰어가서 옐로카드를 쫙 꺼내버리는 것이죠.


어쩌면 솔로몬 왕이 시므이에게 보여주었던 그 반응이 그런 축구 심판이 보여주었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시므이는 한번 엄청난 반칙을 저질렀어요. 다윗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날리고, 그런 엄청난 일을 했는데, 놀랍게도 옛날 심판 다윗은 그것을 눈 감고 지나가 버렸어요. 옐로카드뿐만이 아니라, 레드카드를 줘야 되는데, 그 카드를 꺼내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린 겁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 예전에 카드를 안 줬으니까, 솔로몬이 심판이 됐으니까 무조건 카드를 내미는 것이 아니라, 구두 경고 한번 갔으니까, 다음번에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자고 예의주시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 시므이가 솔로몬 왕과의 맺은 약조를 깨버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가드까지 나갔다 오게 되는, 그런 약조를 깨뜨리는 반칙을 저지르게 되었을 때, 그때 레드카드를 내밀게 된 것이죠.


시므이에게 했던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시므이를 향해서 솔로몬 왕이 말을 하는 겁니다. 네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에서만 살아야 되는 것이고, 만일 네가 이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게 되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면, 그때는 내가 심판을 내리겠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옛날에는 제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이게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런데 이번 2월에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나니까, 예루살렘 기드론 시내, 이게 생각이 막 나면서, “여기가 그곳이구나” 생각이 나는 거예요. 예루살렘, 예루살렘 성이 있고, 그 주변에 깊은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 동쪽으로 놓여 있는, 그 계곡이 바로 기드론 시내라고 하는 계곡이 놓여 있는 것이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 기드론 시내를 지나서, 다른 편으로 가게 되면 거기가 어디냐면 올리브산이에요. 우리나라 말로 감람산이라고 번역된 바로 그곳입니다. 거기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셨던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잡히시고, 그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한 그곳을 한 번 지나가 보니까, 오늘 이 말씀이 그림이 그려지는 거예요. “이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며, 이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며, 기드론 밖으로 건너가지 말라.” 저 감람산 올리브산 쪽으로 가지 말고, 아무튼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해 준 것이죠.


왜 솔로몬은 이 시의에게 주거지를 제한하는 그런 그런 일을 했을까요? 왜 가택연금같이 주거지 제한하는 그런 요구를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이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사울 왕이 탄생한 것이고, 그 사울왕 대신에 사울왕이 죽고 난 다음에, 사울 왕의 자손들이 왕이 되어야 되는데, 베냐민 지파가 왕조를 계속 이어가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은 사울 왕은 제거해 버리고, 이제는 베냐민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에서, (다윗이 유다 지파잖아요?) 그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을 세웠기 때문에, 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던 이 시므이는 유대 지파 출신인 이 다윗이 싫은 겁니다. 그래서 도망갈 때, 피난 갈 때, 그래서 욕했던 것이고, 그래서 저주했었던 것인데, 이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만일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유다에 속한 땅이니까, 이 유다에 속한 이 땅을 떠나서, 자신의 출신지인 베냐민 지파로 가서, 거기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과 모의를 하고, 반역을 도모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솔로몬을 향해서 반역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므이에게 절대로 예루살렘 유다 지역을 떠나지 말라고 얘기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그 말에 이 시인은 예루살렘에서만 머물겠다고 하는 약조와 더불어서, 이곳에 있었을 것인데요. 그런데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3년 뒤에 시므이의 두 종이 도망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들이 어디로 도망갔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드 지방에 있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므이는 어떻게 했는가? 솔로몬의 솔로몬 왕과 약속했던 그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잊어버렸을까요? 알고 있으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서 나갔을까요?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슬쩍 가드까지 가서 종들을 데리고 돌아오게 됐습니다. 이 시므이가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에요. 이 시므이가 솔로몬과 대적하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에요. 그냥 “종들만 데리고 올 수 있겠다. 이 종들만 데려오면 괜찮겠다.”라고 생각을 해서 갔는데, 결국 그것이 레드카드를 받게 되는 아주 심각한 위반 태클이 되어버린 것이고, 결국 시므이는 생명을 잃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시므이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시므이는 솔로몬의 은총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는 사람들 중에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첫 번째는 그 은총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계명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그런 선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오해해 버려서, “내가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네? 내가 악을 행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네?” 생각하고 착각하면서, 자꾸만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테스트해 버리고, 하나님을 자꾸만 건드리면서, 그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죠.


우리 꼬마 아이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을 향해서 부모님들이 규율을 정해놓는 것이죠.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우리 꼬마 아이들이 그 부모님의 말씀을 그냥 그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규정을 슬쩍슬쩍 어기면서, 이럴 때 엄마가 아빠가 어떻게 반응하나, 혼내나 혼내지 않는가를 테스트하는 거죠. 한 번 살짝 어겨보고 “괜찮아?” 그럼 한 번 더 어겨보고, 그러면서 자꾸만 어기는, 그런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감사하면서 살기보다는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그 계명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테스트해 보는 겁니다.


거짓말했는데 하나님이 나 심판하지 않네? 내가 악을 행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심판 내리지 않네? 내가 헌신하지 않고, 내가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도, 그냥 이 세상 탐욕을 향해서 살아도 괜찮네? 미워하며 살아도 괜찮네?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네? 탐욕을 가지고 사기치고 거짓말해도 괜찮네? 남의 것을 탐욕적으로 내가 취해도 아무 문제없네? 하면서, 계속해서 죄악을 저지르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는 솔로몬 왕의 그 규례를 어기고 가드까지 갔다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생명을 잃게 되었던 시므이 예를 우리가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의 테두리 안에 있는 우리가 그 규례를 벗어나서 악을 행하는 길로 갈 게 아니라, 하나님의 그 계명 가운데 말씀 가운데 순종해 나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는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종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득을 얻기 위해서인 것이죠. 그런데 무엇이 과연 유익일까요? 무엇이 과연 이득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유익을 추구하는 게 유익입니까? 이 세상에 유익을 취하다가 결국 우리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유익입니까?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그것이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하겠는가? 마태복음 16장 26절 말씀 가운데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시므이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종을 취하기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은 시므이처럼, 이 세상에 알량한 그 썩을 양식을 위해서, 정말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위해서,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내어버리는 소탐대실하는, 그런 시므이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일을 저지를 때, 우리가 항상 어떤 일을 할 때, 잠깐 멈추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이죠. 지금 내가 예루살렘을 떠나 저 두 종을 찾으러 가도 괜찮을까? 거기까지만 질문하면 안 되고, 그 내가 종을 찾으러 저 가드라고 하는 것까지 갔다 오면, “내 목숨을 잃을 수 있구나”를 생각하시되, 죄악을 저지른 것에 대한 결과까지 생각해야, 우리가 조심해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결과까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다가 소탐대실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시므이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또 기억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 옛날 다윗이 시므이를 죽이려고 달려들지 않았었던 것이 정말 옳은 판단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가는 길에 시므이가 나타나서 다윗을 저주하고 욕했죠. 사무엘하 16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시므이는 다윗의 가슴을 후벼 파는 엄청난 사악한 짓을 행했던 것이죠. 그때 부하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들어서, 저 시므이를 당장 죽여버려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 부하들이 다윗을 향해서 충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충언이 아니라 사탄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그때 놀랍게도 다윗은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시므이를 죽여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다윗은 그 시므이를 향해서 악을 악으로 갚은 것이 아니라, 시므이를 용서해 준 것이죠.


오늘 아침에 우리가 살펴본 말씀, 로마서 12장 17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우리가 복수한다면, 그래서 성공한다면 그건 성공이 아니라 진 겁니다. 사탄에게 져버린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선으로 악을 갚아야 되는 것인데, 놀랍게도 다윗은 구약시대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바울의 그 메시지를 듣기도 전에, 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그 하나님의 마음대로 원수를 용서하는 그런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죠.


더 나아가서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욕하는 그것을 회개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시므이가 나를 욕하는 것은 어쩌다 보니까 욕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나쁜 사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욕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저 시므이를 통해서 나의 죄악을 들추어내고, 저 시므이를 통해서 나의 악행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회개의 기회로 삼은 것이죠. 선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회개의 기회로 삼았을 때, 오히려 시므이 의해 그 욕하는 것은 불평과 원망의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원수 갚지 못했으니까, 시므이는 승리한 것이고, 다윗은 진 것일까요? 다윗은 아무런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 된 것일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다윗을 왕궁으로, 내가 원수 갚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신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justice)예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것이죠. 그런데 다윗이 모든 정의를 다 보았느냐? 아니요. 돌아온 것까지는 절반의 정의죠. 또 하나의 정의가 반절 짜리 정의가 또 남아 있습니다. 그 반절 짜리 정의가 무엇인가요? 시므이를 심판하는 게, 하나님의 정의라고 말할 수 있죠. 근데 다윗은 그 시므이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죽었어요. 시므이가 아직 멀쩡할 때, 다윗은 죽어버리고 만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살아있는 동안에 절반의 정의만을 얻고서 죽었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내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죠. 솔로몬을 통해서 이 시므이 악행이 심판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정의를 맡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일이고, 선을 베푸는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악이 판을 치고 있어도, 그냥 무방비 상태로 놔둬도 괜찮다. 될 대로 돼라 하면서, 체념하면서 살라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맞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폭력적이 돼버리기 쉽고, 우리는 평화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무기력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한번 이런 말을 했는데요. 그림을 한번 봅시다.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폭력적이 되기 쉽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불의 앞에서 무기력해지기 쉽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폭력적이 아니라 평화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쉽지 않아요. 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요. 우리는 늘 한 편의 극단으로만 가는 거죠. 그게 제일 쉬워요. 그 쉬운 길은 넓은 길이고, 그 넓은 길은 사탄이 우리를 초대하는 길이죠. 하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좁은 길이고, 그 좁은 길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총을 기억하면서 은총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로서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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