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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기도 (약 5:13-18)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은 무엇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찬송과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찬송이 나오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신앙의 두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무엇할 것이오?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무엇할 것이라? “찬송할지니라.” 아주 간단한 말씀입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그렇게 낙담해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즐거운 일을 만났을 때, 교만할 것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만났을 때 뻐기고 무시하고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한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찬송하고,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는 기도해야 된다. 찬송과 기도가 우리의 신앙의 삶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두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난도 아니고 또 좋은 일도 아니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는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즐거운 일이 있는 자는 찬송해야 된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고난을 당할 때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 기도하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도하면, 그 고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약속해 주시기를, 네 후손이 저 이방 땅에서 종노릇 하다가, 그래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을 언제 하나님께서 이루셨는가? 출애굽기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셨다고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하고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고, 우리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편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한나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한나에게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기를 허락해 주신 것이고요. 히스기야가 병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신 것이고, 이 성경 말씀을 보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그 고난의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기도한 대로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들의 기도와는 정반대로 응답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이것이 제일 좋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이 더 좋다고 여기시면,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때가 있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기도하면, 기도한 대로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고, 우리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쉽고, 우리가 소망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연약해져서 흔들릴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이 무너져버려서 절망할 수도 있고 낙망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힘을 얻고 다시 한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타격이 클 겁니다. 견딜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소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는 것이고, 인내해야 또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인데, 고난 중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한다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젊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아직 기회가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남아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요? 물론 그것이 소망의 이유가 될 수도 있고, 감사의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너무나도 나약한 것이죠.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겁니다. 진정한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 있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소망이 될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가 기도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하나님과 연결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우리는 기도하는 것조차도 힘들어집니다. 평상시에는 기도를 잘하다가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조차도 힘이 나지 않는 것이죠. 정말 가장 기도가 필요할 때, 오히려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정말 많이 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 앞에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되는데, 오히려 예배의 자리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들을 정말 많이 보아왔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정말 힘든 일이 우리들에게 생겼을 때,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그 순간에 더 기도해야 되고, 그 순간에 더 예배해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때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더 어려워요. 부부싸움하게 되면은 예배하러 나오기가 어려워요. 내가 좀 근사하고 내가 뭔가 잘 나가고, 사람들 앞에 보여줄 게 있으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기도 쉽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도 쉽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도 있는데, 오히려 기도가 더 필요한 순간에, 오히려 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더 필요한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는 아이러니가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예배의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비난하지는 않을까?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사람들 앞에 보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어서, 그런 자신감이 없어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고난을 당하면 그냥 쓰러져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해야 된다는 거예요. 엎드려야 된다는 거예요.


기도한다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인데, 예배의 자리로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힘든 일이 있으면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힘든 일이 있으면 두문불출하지 않고, 그냥 쓰러져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 오히려 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더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나아가는 것이 그게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할까? 그게 두려워서 나오지 못하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때로는 모른 척해 줄 필요도 있어요.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모른 척해 줄 필요가 있어요. 그냥 나와서 기도하고 있으면, 기도하나 보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면 기도하나 보다. 울부짖나 보다. 모른 척하고 그냥 그냥 지나칠 때가 필요한 거죠. 때로는 아는 척하는 것도 필요하고, 때로는 모른 척해 주는 것도 필요해요. 안타까운 것은 늘 반대로 해서 늘 문제인데요. 그러나 그런 순간에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 혼자 있을 게 아니라, 무너져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회복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대로 즐거운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일이 있으면 교만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결론은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야고보서의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데, 좋은 일이 있다고 한다면 찬송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되고, 그 깨달은 대로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 나가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고난 가운데서, 특별히 오늘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은 우리가 병에 들었을 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오늘 야고보서 5장 14절의 말씀 가운데는 교회의 장로님들을 청해서, 그래서 그 장로님들이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것을 부탁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왜 교회에 장로님들을 청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목사님을 청하는 게 아니고, 장로님을 청하라고 하는 말씀인 것일까요? 여기서 도대체 장로를 청하라고 했을 때, 장로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약 성경에서 장로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직제와는 좀 다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장로, 성경에 나오는 집사의 역할과 그 맡은 분야가 무엇이냐면, 오늘날의 장로 오늘날의 집사의 역할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신약 성경에 나온 집사의 역할이 오늘날 우리들의 집사의 역할과는 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장로님들의 역할도 성경에 기록된 장로의 역할과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장로의 역할이 좀 다를 거라고 생각이 금방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성경에서 나오는 장로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영적인, 교회의 영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분들을 의미합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을 다 통칭해서 의미하는 것이겠죠. 영적인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의 신앙을 돌보고 그리고 가르치고, 그리고 여러 가지 그 교회의 모든 문제들을 관할하는 그런 영적인 지도자들을 초청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여기서 왜 병들었을 때 장로들을 초청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병들었을 때, 장로님들이 기도를 하면, 내가 기도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더 효과적으로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장로님들을 초청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사실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병에 들었다고 한다면, 누구를 찾아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가요? 의사를 찾아가야 됩니다. 병에 낳고 싶다고 한다면 장로들에게 나갈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에게 나갈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찾아가서 그 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찾아갈 만한 의사가 부족했고,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쓰였던 말씀이기는 합니다마는, 아무튼 장로님들을 찾아가서 장로님들을 초대하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장로님들이 무슨 병을 고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장로님들을 청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로님들이 기도하면 내가 기도한 것보다 더 기도가 잘 응답될 수 있기 때문에 장로님들을 청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왜 그러면 장로님들을 청하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병들게 되면, 우리들의 믿음이 약해지고 흔들리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병에서 낳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음을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서 낳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겁니다. 목회자의 영적인 목회자의 그런 1차적인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닌 것이죠. 병을 치료하거나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지금 골치 썩고 있는 우리 자녀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의 모든 문제들을 목회자가 장로님들이 해결해 주는 것이 1차적인 사명이 아닌 것이에요. 물론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면 도와줄 수 있겠지만, 목회자의 장로님들의 가장 1차적인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육신의 병에서부터 해결되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적인 질병으로부터의 해결, 영적인 병이 들기 쉬운데, 그러한 믿음이 연약해지는 것을 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장로님들을 초청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고,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영적인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그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어려운 순간에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두도록, 그렇게 기도하기 위하여,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며 영적으로 더 건강해지게 만들기 위하여 장로님들을 초청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앞에 바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는,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어떤 기도가 응답이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인가?   야고보서 5장 15절의 말씀에서는 믿음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도대체 믿음의 기도가 무엇일까요? 도대체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그 믿음의 기도를 가리켜서, 그다음 절인 5장 16절 말씀에서는 의인의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그러니까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병든 자를 일으키고, 의인이 간구하면 그 의인의 간구는 역사함이 크다 능력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도대체 믿음의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의인의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장로님들을 초대하면 나보다는 믿음이 더 좋을 거니까. 목사님을 초대한다고 하면 그 목사님은 나보다도 더 믿음이 좋을 거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는 기도보다는 목사님이 하는 그 기도를 훨씬 더 잘 듣고, 훨씬 더 잘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게들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가 기도하면 더 잘 들을 거다.”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에요. 주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기도하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누구든지 구하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한 게,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하고, 나보다 더 능력이 많고 나보다 더 믿음이 좋은 분들이 기도하면 더 응답이 잘 된다고 하는 게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든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는 게 성경의 약속입니다.


특별히 야고보서 5장 17절, 1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이르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에 대해서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요. 엘리야가 기도할 때, 비가 오지 않기도 하고, 엘리야가 기도할 때, 기근으로 있었던 그 땅에 다시 비가 내리기도 하는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게 됐는데, 엘리야가 우리랑 다른 사람이라는 얘기입니까? 우리랑 똑같다는 얘기입니까? 성경 말씀에? 우리랑 똑같아요. 엘리야가 나보다 달라서, 엘리야는 선지자니까. 엘리야는 하나님과 직통 계시를 주고받는 사람이니까, 엘리야는 영적인 차원에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 그러니까 까불지 마라. 너희들은 기도해 봤자 소용없다. “엘리야 정도 돼야, 그래야 기도가 응답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성경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엘리야가 누구냐?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와 똑같은 성품, 나처럼 실수도 많고 나처럼 잘못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그 똑같은 나와 똑같은 사람,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어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나 그런 영역이 있는 그런 사람들이 기도할 때, 더 기도가 잘 응답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어떻게 와라? “다 내게로 와라.” 다 오라고 그랬어요. 다! “넌 안 돼. 너는 어디 어디 껴? 너 말고, 네 엄마 오라고 해.”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라, 다 오라. 그냥 우리가 가면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받아주시겠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라고 하는 이야기는 뭔가? 영적인 단계에서 좀 고상한 단계 높은 단계에 올라가 있는 어떤 성직자나 어떤 기도의 권사님이나 어떤 기도의 능력 있는 장로님이나 이런 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 의인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하는 얘기인데요. 믿음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그럼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사실은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가 기도한 그대로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이게 가장 좋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것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한 그대로 응답된다고는 믿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거라고 하는 그런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5장 16절의 말씀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사실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죄의 장벽입니다. 죄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나아가기가 어려운 것이죠. 이사야서 59장 1절 2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는데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의 죄악이 너희와 너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죄가 가득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드리는 기도인 것이고, 의인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게 의인의 기도예요. 뭔가 대단한 믿음의 사람, 대단한 의인이 기도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드리는 기도를, 의인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고, 믿음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이 가득한 채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겠느냐 이 말이에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 가득한 상태에서, 악한 마음이 가득한 상태에서 악한 것을 도모하면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냐는 말이요.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다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해주신 비유의 말씀 가운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적인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갔지만, 교만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런 죄악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던 것이죠. 하지만 누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까? 놀랍게도 세리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는데요. 그게 바로 믿음의 기도요. 의인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죄를 나의 잘못을 공개 석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백해야만 된다. 자아비판을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어떤 교회는 그렇다고 생각해서 예배 시간에 혹은 기도 집회를 하면서, 서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만드는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회들이 있고, 그런 선교 단체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기는 하는데, 그런 의미의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서로의 죄를 서로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나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잘못을 다 까발리고 다 드러내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니에요. 물론 내가 어떤 사람과의 잘못된 관계가 있고, 내가 저 사람에게 잘못을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 앞에 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당연하고, 그런 경우에는 서로서로 자백하면서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너무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러나 모든 죄를 다 드러내야 되는 것은 아니죠.   우리의 죄를 잘못 고백해야 되는 것인데, 물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이 때로는 병에 걸린 것들이 다 죄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고난의 이유들은 정말 다양하기 때문에 그래요.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기도할 때는 우리 자신이 회개할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에게서부터 내가 떠난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간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던 죄의 닮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던 커다란 죄의 담을 부수시고 우리의 기도에 귀를 응답해 주고 있는데요. 원하기는 저희들의 삶 가운데서 늘 찬송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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