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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심판 (약 3:1-12)

오늘은 야고보서의 말씀을 가지고 “더 큰 심판”이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더 큰 심판이라고 하는 제목인데요. 심판에도 큰 심판이 있고, 작은 심판이라고 하는 게 있는 것일까요? 더 무서운, 더 큰 심판, 비교적 견딜만한 작은 심판이라고 하는 게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죄도 더 무거운 죄, 좀 가벼운 죄 그런 게 있을 것일까요? 잘못은 큰 잘못, 작은 잘못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습니까? 그것은 yes and no라고 대답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만한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모든 죄는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것만 무서운 죄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와 똑같은 정도의 무서운 죄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인 것이죠.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부터 22절 말씀에 보면,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여기서 “라가”라고 하는 것은 욕을 하는 겁니다. 바보, 천치, 미친놈 등등 할 수 있는 모든 욕들을 거기다 다 집어넣을 수가 있겠죠. 그런 “라가”라 하는 그런 욕을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가벼운 죄가 없는 것이죠. 모든 것이 다 무거운 죄인 겁니다. 내 마음 가운데 누구를 미워하면, 그것은 괜찮은 죄가 아니라, 사실은 살인죄랑 똑같다는 거예요. 살인죄만큼 아주 심각하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죄라고 하는 것은 무거운 죄가 있고 가벼운 죄가 있으며, 더 큰 심판이 있고 작은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는 다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 것이고, 모든 죄는 다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진노를 받을 만한 그런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점에 있어서 모든 죄는 다 똑같다. “모든 심판은 다 똑같다”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죄가 정말로 똑같은가 하면, 한편으로는 더 큰 죄가 있고 좀 비교적 가벼운 죄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죄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경중이 있는 겁니다. 무거운 죄가 있는가 하면, 그것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죄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죄가 훨씬 더 무겁고, 어떤 죄가 비교적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자면 마음속으로만 생각한 죄는 비교적 가벼운 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 마음 가운데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비교적 가벼운 죄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나쁜 생각을 우리의 실행으로 옮겨서, 그래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고 한다면, 행동으로 나타난 죄가 훨씬 더 무겁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행동하면, 더 큰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실제로 행동을 옮겨서 미수로 끝난 것과, 실제로 그 목적을 달성한 것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행한 것과 알면서도 행한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게 잘못인 줄 몰랐어요. 그게 범죄인 줄 몰랐어요. 그냥 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까 나쁜 짓이 될 수가 있는, 내가 모르고 범한 잘못이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이건 나쁜 짓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악을 행했다고 한다면, 그 악은 훨씬 더 큰 죄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잘못이 나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 잘못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잘못은 훨씬 더 큰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죄가 더 큰 죄가 될까요? 일반 사람들이 지은 잘못 보다 지도자에 있거나 선생이 되거나 아니면 성직자가 있는 그렇게 된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죄가 훨씬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성직자가 되어서, 목회자가 되어서, 그래서 저지른 죄는 그 영향력이 훨씬 더 크고 파급력이 아주 크기 때문에, 그 죄는 일반 사람들이 지은 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죄라고 하는 것은 경중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경중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누군가 이런 잘못을 했을 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징계하거나 아니면 벌을 준다고 한다면, 그 죄의 잘못 정도에 따라서 반응하게 될 겁니다. 누군가 마음속으로 죄를 짓는다고 하면, 그 마음속으로 짓는 죄까지 우리가 처벌할 수 있나요? 그건 못하는 거죠.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잘못을 해요. 게으르기도 하고 아니면 나쁜 짓을 하기도 하고 하는데, 부모님은 언제 훈육하게 되는 겁니까? 작은 죄를 저지를 때는, 작은 잘못을 할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죠. 그냥 참고 기다리다가 그러나 정말 심각한 죄를 짓게 된다고 한다면, 아주 큰 잘못을 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는 훈육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해서, 그래서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이것을 심각하게 다루어야 되는 그런 지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보통 우리 교회 내에서 잘못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런 일들이 있을 때,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많이 하냐면, “죄가 다 똑같은 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어떤 사람이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는가?” 하면서, 죄를 지어도 나쁜 짓을 해도 그냥 유야무야 지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모든 죄가 똑같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작은 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주 심각한 죄라고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죄가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아주 심각한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너도 나도 다 죄인이니까, 그냥 모른 척하자. 그냥 다루지 말고 그냥 지나가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고, 사실은 이 죄라고 하는 것이 큰 게 있는가 하면, 작은 게 있고, 그래서 다루어야 하는 죄가 있는가 하면, 참고 지나가야 할 만한 죄도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읽은 야고보서 3장 1절 말씀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절 말씀인데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선생님의 죄는 훨씬 더 크다는 것이죠. 선생님이 죄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어서 교사가 되어서, 혹은 성직자가 되어서, 잘못을 저지른다고 한다면, 일반 사람들이 짓는 죄보다 잘못 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에서 권면해 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많이 되지 말라.” 도대체 많이 되지 말라고 하는 그 의미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많이 선생이 되는 경우도 있고, 적게 선생이 되는 경우도 있나요? 도대체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냥 우리가 번역이 좀 약간 애매하게 됐는데, 그 얘기는 “서로가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너도 나도 자꾸만 선생의 위치에 가려고 하지 말라.”라고 하는 그런 권면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들의 그 심성 가운데는 늘 선생이 되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죠. 장기들을 두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장기에 대해서 옆에서 보면서 훈수 두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고, 축구 경기를 하면 3천만이 감독이 되는 것이죠. 이번에 말레이시아의 경기를 보면서, 다들 열불 나셨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갑자기 모두가 다 선생이 되어서 한 마디씩 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심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 3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은 우리가 선생이 되는 것이 그것이 아주 심각한 형벌을 받을 수 있는 심각한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너희는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라. 너희는 선생이 되지 말라 그렇게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한번 가만히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교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의미일까요? 선생님이 되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도 안 된다는 이야기일까요?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도 그것도 별로 권장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먼저 이 야고보서의 말씀도 지금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야고보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 선생님처럼 권면하고 있어요. 야고보 사도가 지금 권면하면서 선생님 노릇을 하면서, 너희는 선생님이 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얘기는 아예 선생님이 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성령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여러 가지 은사가 있는데, 그 여러 가지 은사들 가운데는 가르치는 은사도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르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사실은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로서 그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인 것이죠.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 2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안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여러 직분자들을 교회에 주셨는데, 선생님이 되는 건 나쁘니까, 교사를 안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교사라고 하는 직분을 교회에 허락해 주셨다고, 고린도전서 12장 28절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해 주시는 말씀이 자녀들은 부모님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니까 부모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배워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는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니까, 우리가 교사가 된다든가 가르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서 3장에서는 너희는 선생님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가 있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큰 책망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늘 교만한 마음들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생활하면서도 우리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솟아오르고, 또 내가 옳다고 하는 그런 생각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책망하는 일들을 종종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러한 태도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심판을 받을 만한 일이다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의 말씀인데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사람들은 누구가 되고 싶어 합니까? 랍비가 되고 싶어 해요. 내가 랍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내가 높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고, 그래서 신앙적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앞자리에 서는 것을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것이죠. 하지만 주님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희는 랍비가 되지 말라.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우리는 참된 선생님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배워야 할 그런 학생들이다. 우리는 다 배워야 될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교훈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며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책망하고, 그런 높은 자리에 올려가려고 하는 그런 교만함을 내려놓아야 된다고 하는 게 오늘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가 하는 그 신앙생활에 따라서 언젠가는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의 연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좋겠다. 저렇게 신앙생활하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굳어지게 되고, 확신에 차게 되면 사람들이 독선적인 사람이 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신앙인들 가운데 종종 만나게 되면 엄청난 자기 독선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법이에요. 교회에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야 돼요.” 하면서 자기가 법이 돼 가지고,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리고 자기의 그 신앙 방식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그런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 교회도 있나요? 다행히 우리 교회는 없어요. 근데 예전에 제가 목회하던 경험에서 보면은 정말 신실하신 분이고 정말 믿음이 좋아 보이는 분 같은데, 그런데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매 순간순간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늘 가르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늘 자기만 옳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있어서, 결국 그 사람이 교회를 흔들고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빠진 잘못이 무엇인가요? 독선에 빠진 것이죠. 자기만 옳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확신 가운데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내가 독선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자꾸만 판단하고 비난하고, 그래서 자꾸만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가르치려고 드는데, 사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더 이상 성장이 안 되는 거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더 이상 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완벽하게 섰다고 생각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사람은 발전도 없고, 계속해서 퇴보만 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 것인데요.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그렇게 선생이 되어서 남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2절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면서, 내가 선생이 되고 내가 심판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을 비판한다고 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내가 다른 사람들을 헤아리면 어떻게 된다고요? 바로 그 똑같은 기준으로 내가 비판을 당하고, 내가 헤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누구에게 비판을 받는다는 얘기일까요? 누구에게 헤아림을 받는다고 하는 얘기일까요?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비판한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 수동태로 사용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얘기. 우리가 남들을 비판하면 그 비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고, 우리가 남들을 정죄하면 우리가 정죄한 그 정죄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실 거라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는 것을 아주 힘들어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말할 때는 언제나 수동태를 사용해서 표현을 했어요. 그래서 너희가 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거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거라고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생이 되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심판의 이유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독선적이 되게 되면, 그러면 자기의 말로써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책망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만들면서도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혹은 책망하거나 비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아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인데요. 오늘 읽은 야고보서 3장 8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하는 그 말은 마치 화살과 같아요. 화살을 활시위에서 당겨서 탁 놓으면, 그 화살이 날아가서 무엇인가를 맞혀버리게 되는 거죠. 한 번 활시위를 떠난 그 화살을 쫓아가서 취소할 수 있나요? 취소가 안 돼요. 그 화살이 계속해서 날아가서 무엇인가를 마치기까지 계속 날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화살이 무엇인가를 맞춰서, 그것에 맞은 짐승이 죽는다든지, 피를 흘리고 쓰러진다든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가 판단하고 비난하고 책망하는 그 말이 결국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그리고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만드는 그런 일을 하게 되는데, 내가 만일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함부로 말을 하고 함부로 참견을 한다고 하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그런 악한 모습을 가져올 때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악한 의도가 없다고 하는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죠. 내가 함부로 한 그 말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죠.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옆을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한마디 하고 지나가면, 그 일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망가뜨리게 만드는 것이죠. 내가 선생 노릇을 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게 만드는 것이죠. 내가 독선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게 되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지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나님의 큰 심판을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저희들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셔서, 우리들이 하는 말로 사람들을 시험에 들고 상처받지 않게 해 주옵소서. 내가 선생질을 하고 꼰대질을 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들을 하면서, 그래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그런 악한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클리프라고 하는 성경 번역가는 말하기를 “혀에는 뼈가 없지만 이 혀로써 뼈도 부서뜨릴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 거죠. 우리 교회 내에서도 얼마나 수많은 말들이 사람들을 시험에 들고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또는 여러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 내 관점으로 자꾸만 지적하고 선생질 노릇하게 될 때, 그럴 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혀를 조심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망하고 비난하며 선생질하는 것은, 그것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한 입으로 저주의 독설을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면, 그렇게 한 입에서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찬양이 가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요한일서 4장 20절 말씀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독선으로 나쁜 말을 하고, 판단하는 말을 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독설을 퍼붓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겠느냐는 거예요. 그 사람이 믿음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거냐는 이야기죠. 한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도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책망하는 말을 한다면, 그 신앙은 가짜다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정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있는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선생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조심히 조심히 살펴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누가 제일 열심히 잘 들어야 될까요? 목사님이죠. 그래요. 정말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들어야 될 말씀이에요.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하고 누군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친다고 하면서, 제 마음 가운데 생기는 그런 독선과 위험이 언제든지 자라기가 쉽다는 거예요. 제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가게 됐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시작하는 그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 제 마음 가운데 자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리고 판단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이게 모든 신학생들이 가지게 되는 위험이죠. 그래서 내가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 올라갔다고 생각이 되면 안하무인이 돼요. 내가 영적으로 교만해져 버려요. 그래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성장도 없고 더 이상 영적인 발전도 없이 그냥 잘못된 길로 걸어가게 되는 그런 잘못된 일들이 얼마나 자주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이게 주님께서 늘 경고하셨던 내용이에요.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유대인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죠.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켰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정말 규정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는데, 그것을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점점 더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가운데는 교만함이 가득 차서, 자기보다 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난하고 정죄하고 가르치려고 들고 독설을 퍼부으면서, 그러면서 영적인 교만이 가득 차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그 바리새인을 보면서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화 있을진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수많은 신학도들이 목회자들이 이미 마음속의 교만으로 가득 차 버려서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비난하면서, 최고의 영적인 교만의 자리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면,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종 제가 느끼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 젊은 목사님들의 마음 가운데 이미 교만함이 가득 차 있는 그런 경우도 많이 보게 되어 버렸는데요. 그것이 목회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에게서 아주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래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그래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교회에서 잔뼈가 굵으면 굵을수록, 그래서 신앙생활에 자신만의 어떤 경지에 올라갔다고 생각이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보면서 책망하고 비난하고 또한 가르치려고 들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영적인 교만의 상태로 올라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진단해 보아야 돼요. 어떻게 진단해 보아야 됩니까?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솟아나고 있는지 스스로를 진단해 보아야 되는 것인데요. 혹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딴식으로 행동을 하지? 저 사람은 왜 믿음이 저 정도밖에 안 되지? 저 사람은 왜 집사라고 하는 사람이 권사라고 하는 사람이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저 정도밖에 안 되지? 그런 마음들이 들고 있다고 한다면 위험한 신호입니다. 우리 자신을 진단해 봐야 되는 거죠.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 마음 가운데 분노의 마음이 솟아오르고 있습니까? “왜 저딴식으로 밖에 행동을 하지 않는 거야? 왜 저 정도밖에 일하지 못하지?”라고 하는 그런 분노의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신호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행동하는 그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저 사람은 왜 저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할까? 사람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신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가득 차버리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선생질하려고 하는 그런 나쁜 심성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겸손하게 낮아져서 오히려 귀를 열고 이해될 때까지 들어야 돼요. 배워야 돼요. 분노하지 않을 정도까지 우리가 그 사람의 사정을 더 깊이 알아야 되고, 그 사람의 형 형편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서로가 서로를 돕는 가운데 믿음으로 함께 성장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분노만 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보고 그냥 진노하고 끝내버리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보다 온전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한다면 얼마나 우리가 더 부족하겠습니까? 완벽한 기준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얼마나 부족한 인생이겠어요?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우리들을 보고서 그 진노의 분노 가운데 우리를 심판해 버리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영적인 교만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가르치려고 들기보다는 겸손하게 더 낮아지고 더 낮은 자리로 들어가서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의 훈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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