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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하는 지혜 (왕상 3:1-15)

어린아이들이 보는 그림책 가운데 앤서니 브라운이라고 하는 사람이 만든 책이 하나 있습니다.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이라고 하는 책인데요. 이런 사람이 지은 동화책이고, 이 주인공들이 고릴라입니까? 원숭이입니까? 아무튼 세 아이가 있는 이런 그림책입니다. 이 세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이제 별로 재미가 없어서 텔레비전을 끄려고 하는 순간에 갑자기 요정이 나타나서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무엇이든지 요구를 하라고,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딱 세 가지뿐이고, 한 번 말하면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서 잘 말하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너무나도 신이 났어요. 소원을 이야기해서 가장 좋은 것을 얻고 싶은 그런 소망 가운데서, 무엇을 달라고 말할까? 무엇을 요구할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함부로 말하지 말고 신중하게 정말 좋은 것을 말해야 되겠다고 그렇게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배가 고파서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먹을 게,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속으로 생각을 한 거죠. 좀 “바나나가 큰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했더니, 자신들의 눈앞에 커다란 바나나가 탁 나타난 겁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이 깜짝 놀랐어요. “네가 소원 하나를 써버렸잖아! 그 소중한 소원을 왜 이런 데다 써버리는 거야?” 하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그것을 보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말을 해버렸어요. “그놈의 바나나, 네 코에 붙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러자 갑자기 그 바나나가 그 아이의 코에 달리게 된 거죠.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그 바나나를 떼기 위해서, 막 떼려고 하는데, “큰일 났다” 떼려고 하는데, 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자 마지막 아이가 이야기를 했어요. 저 바나나가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해서, 결국 그 세 가지 소원을 그냥 써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동화입니다. 그림 형제가 지은 “세 가지 소원”이라고 하는 그 동화에 착안해서 만들었던 동화인데요. 재미있고, 또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그림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달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소원 하나만 들어주겠다고 말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소원을 하나님께 말하고 싶습니까? 복권 당첨하게 해달라고 말할까요? 아니면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말할까요? 아니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건강의 문제 해결 좀 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라고 하는 왕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응답해 주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이야기가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다음에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는데요.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번제라고 하는 것은 천 마리의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을까요? 그것은 율법에 일천 번제를 반드시 드리라고 써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는 그런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죠. 그저 한 마디만 드리면 되는 것인데, 왜 솔로몬은 일천 마리의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감사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왕기상 앞에 1장과 2장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솔로몬은 사실 왕이 되기보다는 죽임을 당할 뻔한 상황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다윗이 이제 늙어서 죽게 되었던 그 상황에, 솔로몬의 배다른 형인 아도니야가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그렇게 모의를 해서 왕이 되었다고 선포해 버린 것이죠. 그래서 만일 그 아도니야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솔로몬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될 겁니다. 다윗이 그를 자신의 뒤를 이은 세 번째 왕으로 삼겠다고 했으니까, 이 솔로몬은 눈엣가시일 것이고, 결국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솔로몬은 죽을 수밖에 없는 목숨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잘하는 대로 어떻게 됐습니까? 아도니야의 그 반역은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나단이 나타나서, 그리고 그의 어머니 밧세바가 나타나서, 다윗이 결국 뒤집어버려서, 결국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왕좌의 위치에 올라가게 된, 그야말로 반전의 드라마, 아마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다고 하면,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는 드라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이 바로 솔로몬의 인생이었던 것이죠. 어쩌면 우리 한국 대표 축구 선수팀과 같아요. 90분 내내 지고 있다가, 90분이 넘어서 동점골을 터뜨리거나, 역전골을 터뜨려서 이기게 되는 그런 축구 경기처럼, 드라마틱한 그런 축구 경기처럼, 솔로몬은 죽을 뻔했던 인생이었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를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솔로몬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 겁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예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요. 예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감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죠.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왔는가?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솔로몬왕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 그날 밤, 하나님께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놀랍게도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 꿈일 겁니다. 아마 우리가 맨 정신이었다고 한다면, 위선을 떨 수도 있겠고, 거짓말할 수도 있겠고, 우리의 속마음과는 다른 말을 할 수 있지만, 어쩌면 꿈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 꿈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했을 때, 솔로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간절한 마음, 지혜를 달라고 하는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했던 것이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까지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조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꿈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런 도구가 항상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꿈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해주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씀해 주시는 이야기들이 꿈을 통해서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많이 읽다 보면,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가? 그러면 “나에게도 꿈을 통해서 말씀해 주실까?”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꿈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그렇게) 하실 때는, 그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이 될 수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꿈이 언제나 항상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 도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한 번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꿈에 의존하거나, 꿈을 꾸면서 어떤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꾸는 대부분의 꿈은 그냥 개꿈입니다. 그렇게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그 꿈속에서 지혜를 구했는데요. 놀랍게도 그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3장 10절에서부터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더니, 지혜를 주시되 최고의 지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까지 주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너무 부럽죠? 그림책 속에 나오는 이 꼬마 아이들은 세 번의 소원 가운데 하나도 제대로 된 소원을 말하지 못해 버려서, 그냥 날려버리고 말았는데,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간구하라고 말할 때,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런 기도의 제목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그 솔로몬을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지혜와 부귀와 영광까지 주셨다고 하니까, 이게 얼마나 행운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우리도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할까? “우리도 기도할 때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부귀와 영광까지 덤으로 주시겠다.”라고 생각하셨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하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솔로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나도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해야 되겠다. 나도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부귀도 주시고 영광도 주시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으나, 사실은 이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교훈이 무엇일까? 솔로몬이 드린 기도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서 무엇을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를 묵상해야 되는 것이죠.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을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이 솔로몬이 기도했을 때, 그 기도의 제목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가? 자신의 욕심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였다고 하는 점이 솔로몬 기도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세요. 하나님 제 IQ가 뛰어나게 해 주세요. 그래서 똑똑해지고 현명해지고, 세계 최고의 박사가 되게 해 주시고, 세계 최고의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되어서, 내가 성공할 수 있고, 내가 최고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지혜롭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한 게 아닙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이유가 있는데, 어떨 때 필요한 지혜를 구한 것이냐? 그것은 내가 재판하게 될 일이 있을 텐데, 재판을 하게 되었을 때 선과 악을 잘 분별하고 억울한 것과 억울하지 아니한 것을 잘 분별해서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고 하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당시 왕은 판사와 같은 역할까지 했어요. 그 당시에 백성들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면, 왕에게 나아가는 겁니다. 왕에게 나가서 “우리들 사이에 이런 분쟁이 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있는데,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달라고 왕 앞에 나아가면, 왕이 그 문제를 가지고 해결해 주는 거죠. 판결을 내리는 거죠. 그런데 왕이 지혜로워서 그 판결을 잘해준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거예요. 그러면 그 사회는 정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될 거예요. 정말 좋은 나라가 될 것이죠. 하지만 만일 그 왕이 판결을 잘못 내리면 어떻게 되나요? 왕이 엉뚱한 판결을 내려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공평하지 못한 판결을 내리면 어떻게 되나요?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거죠. 내가 잘못 판단해 버리면,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이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그런 무능한 재판장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문제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어떤 일들을 판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정의롭게 공의롭게 판단한다면, 모두의 마음이 속 시원하겠지만, 그러나 잘못된 판결을 내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 예가 우리가 흔히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축구 심판에 의해서 보는 거예요. 지난번에 중국 심판 마닝 심판은, (이번에 카타르전에서는 그렇게 안 하더라고요._ 그런데 우리 한국전을 심판을 보는데, 우리 선수가 조금만이라도 잘못하면 바로바로 옐로카드를 뽑아 드는데, 상대편 선수는 그거보다 더 심한 짓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고, 파울도 부르지 않고, 아무런 카드도 내보내지 않고 편파적인 판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마음속에 불만이 일어나고, 정말 화가 일어나게끔 그런 만드는 일들을 해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축구 경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의 모든 부분들 이곳저곳에 그런 역할들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잘못된 일을 하고 잘못된 행정을 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큰 고통과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된 겁니다. 아직 인생의 경험도 없는 이 솔로몬이 왕이라고 하는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한 민족을 자신이 판결하고 다스리고 결정해야 되는 이 상황 가운데서, 솔로몬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알았어요. 자신이 공부를 많이 했지만, 왕의 아들로서 왕자로서 최고의 학문을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올라가게 될 그 왕자에서 자신이 행해야 될 그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겁니다. “하나님, 제가 왕위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저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저는 제대로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그래서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할 수는 없으니, 하나님 지혜를 주셔서 잘 판결할 수 있는 지혜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를 하게 된 것이고, 그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사실은 백성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솔로몬의 마음속에 있는, 그 순수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겸손한 그 솔로몬의 마음을 보셨고 기뻐하셨으며, 솔로몬에게 필요한 지혜뿐만이 아니라 부귀와 영광까지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게 되겠는데, 무엇을 기도할까?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많이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 가운데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솔로몬만 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왕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영역이 있고, 우리의 백성들이 있는 것이죠. 솔로몬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그 백성들이 있었고, 이스라엘 땅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백성이 있고, 우리의 영역들이 있는 거예요.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자녀들이 우리의 백성인 것이죠. 자녀들이 우리의 영역인 거예요. 뿐만 아니라 왕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그 영역일 것이고, 교사라고 한다면 학생들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영역이고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을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만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한다면, 사마리아인이 만난 그 강도는 내가 다스려야 되고 내가 돌봐줘야 될 백성이 되는 것이죠. 그런 백성 앞에서, 하나님, 내가 무엇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사명이 있는데 내가 가진 그 사명을 내가 신실하게 잘 감당하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유익하게 될 수 있는데, 내가 사울과 같은 왕이 되어버리거나, 내가 악한 왕이 되어버린다고 한다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텐데,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셔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지혜를 주시옵소서.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요. 헌신의 기도가 바로 솔로몬의 기도였다고 하는 점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서 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나의 욕망을 위하여,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정욕으로 기도하는 그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분별하면서 기도해야 되는데요. 만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미워하는 사람이 패가망신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겁니다. 내가 성공해서 보란 듯이 내가 뻐기고 싶고, 보란 듯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내가 세계 최고가 되어서, 그래서 내가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하는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정욕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기도를 듣지 아니하실까요? 왜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고 우리에게 해롭다고 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소원을 들어주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파멸하게 만드는 그런 기도의 응답을 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죠. 솔로몬은 무엇을 기도했는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자신이 높아지고 자신이 최고가 되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그런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제가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왕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백성들에게 정말 은혜를 베풀길 원하고, 그들이 정말 바른 길을 행복한 길을 가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응답을 해 주신 것이죠. 왕으로서의 사명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정의와 평화를 얻게 만들기 위해, 그래서 자신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보시고 기뻐하신 것이죠.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영역이 있을 텐데, 그 영역을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 제가 아빠입니다. 하나님 제가 엄마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양육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에게 믿음으로 잘 양육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선생님이라고 한다면, 우리 반 아이들을 놓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한 아이도 낙오하지 않고 이 아이들이 정말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제가 이 아이들을 잘 돌봐줄 수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려야 되는 것이죠. 내가 만일 식당 주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이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가족들이 와서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어서, 그 가족들이 행복하고 회복될 수 있는 그런 도구가 되게 해 주옵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야 되는 것이죠. 의사라고 한다면, 하나님 내가 치료하는 그 환자가 건강하게 되어서,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의료로 잘 치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 우리를 왕으로 세워주셨는데, 그 왕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인 저는 우리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야 됩니까? 우리 교회가 전주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고, 교회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알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큰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기보다는, 하나님 저의 부족한 섬김으로 인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이 살아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잘못된 믿음의 길에서부터 돌아와서 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헛된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섬김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 성도들의 삶 가운데 사랑이 넘치고 용서가 넘치고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 가운데 소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 함께해 주옵소서. 그래서 정말 섬기는 그 사역을 통해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그 기도의 제목들을 우리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의미 없거나 전혀 해서는 안 되는 기도의 제목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한 기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병에 든 분이 있다고 한다면 병에서부터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또한 학생들이라고 한다면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무엇인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고통 가운데 있다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기도한 바 있고, 바울도 고통 가운데서 건져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한 바 있고,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필요를 놓고 기도했던 것이죠. 이번에 축구 선수들 보니까 크리스천들이 참 많아요. 조현우 선수도 그렇고 그러면서 아시안게임을 하면서 아마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 같은데, 그런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할 수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나의 정욕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내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하나님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하셨던 그 말씀을 내게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마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요.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7장 7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꿈에 나타나서 말씀하셔야, 그래야 진짜가 아닙니다. 어떤 우리의 신비한 상황 가운데서, 흥분된 상태에서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셔야만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구하라. 듣겠다.”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줄꼬? 너희는 구하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은혜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갑자기 꿈에 나타나고, 신비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향해서 내가 내게 무엇을 주고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신 줄 믿고, 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게 기억이 안 난다면 앞에 써놓으세요. “너는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미 우리에게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항상 구해야 되는 것인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림책에 나오는 요정과는 다른 하나님입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책에 나오는 그 요정은 짠하고 나타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들어준 요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요정은 실수로 바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 바나나 내놓고, 그게 코에 붙었으면 좋겠다고 하면 코에 붙고, 그냥 말하는 대로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지 나쁜지 상관하지 않고, 그냥 말하는 대로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요정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런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 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요정은 세 개의 소원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세 개 지나가 버리니까, 끝! 더 이상 기회가 없어버리는 요정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엄마와 같아요. 우리 아빠와 같아요. 항상 이야기하면, 언제나 들으시고, 언제나 가장 좋은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들어주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것이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는 공식이 아니에요. 오늘 우리가 이 열왕기상의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수학 공식을 찾듯이 기도의 공식을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면, 그러면 부귀와 영광까지 자동으로 따라오는, 그러니까 기도의 비결이 지혜를 구하는 거라고, 수학 공식처럼 생각하셨다고 한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기도는 수학의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것을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기도는 공식이 아니라 수학의 공식이 아니라, 사랑의 방식인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 품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고,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발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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