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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깰 때라 (롬 13:11-14)

작년 11월 23일에 보도가 되었던 기사 내용인데요. 중국의 어떤 도둑이 물건을 훔치러 어느 가정에 들어갔습니다. 양 씨 성을 가진 도둑인데요. 그 사람이 그 도둑질을 하기 위해서 집 안에 들어갔는데, 그 집안사람들이 아직 잠을 자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잠을 안 자니까, 도둑질을 할 수가 없어서, 이 주인들이 잠잘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죠. 그러다가 그만 도둑이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이 방 안에서 잠을 자다가, 옆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니까, 이게 무슨 소린가 하다가도, 아마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겠지 하고 무시했었으나, 나중에 아기 우유 때문에 일어나서, 이렇게 움직이는 도중에, 그 코 고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데, 가까이에서 들리는 거예요. 다른 방에서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여주인이, 탕(Tang) 씨 주인인데, 그 사람이 문을 한번 살짝 열어봤더니, 세상에 낯선 사람이 자기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해서, 경찰에 신고해서 잡히게 되었다고 하는 참 우스운 이야기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잠을 자면 도둑이 활개 치면서 도둑질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나 깨어 있으면 도둑질도 못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잠을 자게 되면, 자신이 도둑질하러 왔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경찰에 잡히게 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쩌면 잠을 자는 것이 우리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3장 1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오늘 이 로마서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들을 향해서 권면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잠을 자다가 깨어날 때가 됐다. 더 이상 더 잠을 자지 말고, 깰 때가 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여기서 잠을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했을 때, 이 잠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잠을 자는 것을 의미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도대체 영적인 잠을 자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떤 상태가 영적인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잠에서 깬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서 영적인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바로 그다음 구절이 해답을 줄 수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로마서 13장 12절 말씀에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러니까 잠을 자는 것은 어둠의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은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면 좋겠는데요.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 깨어나야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다시 한번 돌려서 표현하기를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으니까, 이 잠을 잔다고 하는 것은 악한 일을 하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더러운 인생을 사는 것,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좋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그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는 것을 가리켜서, 그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악한 일을 하거나 어둠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영적인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잠에서부터 우리는 어떻게 깨어나는 것인가? 악한 일을 버리고 중단해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잠에서부터 깨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로마서 13장 13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둠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이 로마서 13장 13절에서 14절 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단정한 삶을 살지 않는 모든 것을 가리켜서 잠을 자는 것이다. 단정하지 못한 삶을 사는 그 모든 것을 가리켜서 그것은 어둠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방탕한 삶을 산다든지, 방탕한 삶이 무엇입니까? 아무런 목적이 없이, 사명의식 없이, 그냥 되는 대로, 될 대로 돼라 하면서, 그냥 사는 것을, 흥청망청 사는 것이 방탕하는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술 취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음란한 삶, 호색하는 삶, 다투고 싸우는 삶,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그런 모습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어둠의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여기에 기록된 것 가운데 하나라도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둠의 일이고 영적인 자매에 취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주 어둠의 삶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깊이 되뇌고 또 되뇌면서, 내가 혹시 이렇게 방탕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채, 그냥 아무런 의식 없이 목적 없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술 취한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술을 아예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 같아요. 물론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한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러나 여기서 금하고 있는 것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죠. 술 취해가지고,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그냥 방탕하게 살아가는 그런 술 취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술에 취하는 것을 자주 하고 있다고 한다면, 오늘 이 말씀을 일 주간 내내 기억하면서 “내가 그러한 술 취한 삶을 끊어야 되겠다. 내가 이러한 방탕한 삶을 살지 않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란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난 잘못된 성적인 일들을 하는 모든 일들이 음란한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만일 우리들 가운데 여전히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악한 일이오. 어둠의 일이오. 영적인 잠에 빠진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다투며 분쟁하고 있다고 한다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어둠의 잠을 자고 있는 것이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그러한 악한 마음들을 다 내버리고, 오히려 사랑하며 선을 베풀며 은혜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답게, 우리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갈아먹는 것이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간다고 한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다고 한들, 시기와 질투 가운데 빠져버리게 되면 불행한 인생이에요. 그 삶은 기쁨이 없어요. 오히려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내가 사랑을 베풀면서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그런 놀라운 기쁨들을 받아 누려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들 가운데 이러한 삶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그 순간에 완전히 변화되어서, 완벽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늘 유혹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의 욕심, 또는 명예의 욕심, 여러 가지 잘못된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을 자꾸만 장악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게 될 텐데, 그때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다 거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나가서, 주님 도와주옵소서. 주님 저는 할 수 없나이다. 저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며 빛의 갑옷을 입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믿음의 길은 혼자 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래요. 혼자 하면 어떻게 되나요? 늘 넘어지는 거죠. 늘 실패하는 거죠.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또 선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북돋어줄 때, 내가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힘을 내서 용기를 내서 선한 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금년에 우리 교회가 성경 읽기를 함께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성경 잘 읽고 계십니까? 잘 읽고 있어요. 옛날보다 옛날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읽다가 레위기에서 멈췄는데, 레위기도 지나고 민수기까지 왔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단톡방에서 서로 “내가 읽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내가 읽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극을 받고, 읽어야지, 잊었다가도 읽어야지 하면서,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면서 함께 읽어나가니까 가능한 것이죠. 기왕이면 금년 말까지 성경 말씀을 일독을 다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에 제가 필리핀을 다녀왔는데요. 지난주에 다녀온 건 알고 있습니까? 사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남윤정 선교사님을 이번에 만나서, 남윤정 선교사님이 사역하고 있는 필리핀 따갈로어를 쓰는 사람들의 교회를 다녀올 수가 있었습니다. 제 옆에 있는 분이 남윤정 선교사님이죠. 생긴 건 좀 그렇게 생겼는데, 사역을 정말 잘하셔요. 또 그다음 사진을 보시면, 선교사님들 모인 곳에서 제가 그 선교사님들을 재교육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들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됐습니다.) 그래서 필리핀에 잘 기도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오게 되었는데, 언제 출발했냐면 지난 주일 오후 예배 마치고 인천공항에 갔어요. 그런데 인천공항까지 가는 데 4시간이나 버스가 걸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천공항에 늦게 도착해서 지금 출국하는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시간이 모자란 거예요. 30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출국하는 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가지고, 그래서 줄이 엄청나게 길어요.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면서, 내가 이거 제대로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조금씩 조금씩 진전하는데 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마음 가운데 좀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런데 제가 먼저 앞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하면서 부탁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용기가 없어서, 얘기를 못하고,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제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오면서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제가 좀 앞으로 가면 안 될까요? 보니까 나보다 10분 뒤에 여유가 더 있는 사람이 그래요. 그런데 그분한테 가시라고 하면서 보니까, 그 집에 아기 아빠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 여자분이 앞에 가면서 죄송합니다. 좀 앞으로 가면 안 될까요? 시간이 얼마 안 되고 그러면, 제가 그 뒤에 따라가면서 마치 그 집 아빠인 것처럼 따라가는데, 그 아주머니가 가다가 계속 앞으로 나가야 되는데, 얘기를 못해요. 좀 인상이 더럽게 생긴 분이 한 분 앞에 있으니까, 얘기를 못하는 겁니다. 더 진전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뒤에서 그랬죠. “계속 가세요.” 그러니까 그분이 용기를 얻고 또 앞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또 뒤에 따라가면서, 혼자는 안 되는데 둘이 하니까 되는 거예요. 새치기도 혼자는 못하겠는데, 여러 명이 같이 하니까 되더라고요. 악한 일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가 서로 신앙생활을 같이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혼자 하면 넘어지기 쉽고 중단하기 쉽고 함께 갈 수가 없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성경 읽으니까 나도 읽고, 옆에 있는 사람이 선한 일을 하니까 나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격려가 되면서 같이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가르치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야고보서의 말씀 가운데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음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죠. 옆에서 그렇게 믿음의 길을 잘 가는 사람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힘과 용기를 얻으면서 함께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그 믿음의 길을 혼자 가고 있다고 생각이 되면, 그게 참 힘들어요. 그래서 그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영적인 우울증 가운데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을 물리친 그런 능력의 종이 엘리야 선지자였는데, 하루는 그 이세벨 왕비가 자기를 죽인다고, 죽이려고 한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심각한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고 영적인 우울증에 빠지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내 영혼을 거두어 가주옵소서 하면서, 했던 말이 열왕기상 19장 10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뺏으려 하나이다.” 혼자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될 때 영적인 우울증이 찾아온 것이죠. 하지만 그런 엘리아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소망의 소식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 명의 사람들을 남겨놓았다. 너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동지들이 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듣게 될 때, 다시 한번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죠.


저도 아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신학교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 신학을 배운 것을 가지고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한국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회자들이나 교회가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과는 완전히 괴리가 있는 겁니다. 차이가 있는 겁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고 있고, 잘못된 종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 보였어요. 그래서 너무나도 외로웠던 것이죠. 그래서 제 마음 가운데 생각되는 것이, 과연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것인가? 모두가 다 이 길로 가고 있는데, 내가 가지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이게 맞는 것인가? 외로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서 아주 큰 유익을 얻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큰 유익이었지만, 그곳에서 정말 가르친 대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말씀대로 제대로 목회하는 목사님들을 만나게 되면서 힘과 용기를 얼마나 얻었는지 몰라요. 복음을 제대로 말씀해도 되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가 있구나! 그런 교회들을 바라보게 될 때, 얼마나 기쁨과 그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학부모들도 마찬가지잖아요. 학부모들도 우리 자녀들을 가르칠 때 과외를 안 보내도 될 것 같은데, 모든 부모님들이 다 과외시키니까, 나만 과외에 안 보내면 부모의 역할을 못하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염려가 되는 그런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 인생들은 누군가 나와 같은 동지가 있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믿음의 길을 어떻게 가는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음의 길을 가는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는 사람이 위로를 얻고, 그 사람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 내가 힘과 용기를 얻게 되는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거예요. 무엇인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앉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아니 저기 떨어져 앉아 있어만 해도 힘과 용기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종종 우리 연세 드신 어르신들께서는 무슨 얘기를 하냐면 아이고 이제 빨리 천국 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들 말씀하시는데, 제발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할머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요. 할머니가 기도하는 그 모습만 봐도 힘과 용기를 가져요. 그 어머니가 없어서, 그 아버지가 없어서 슬퍼하는 자녀들이 있잖아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방 안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같이, 아니 저곳에 있다고 하는 것이 생각만 들더라도 힘과 용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믿음의 길을 서로가 함께 걸어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13장 11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주의 구원이 처음보다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깨야 되는가? 주님의 구원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더 주목해 보아야 할 표현이 있다고 한다면, 로마서 13장 12절의 말씀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밤이 깊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죠. 지금 깜깜하기만 해 보이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생각이 드냐면, 절망적인 생각이 들어요. 악이 판치고 있고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악한 사람들이 판치고 있는 그런 어둠의 일들이 계속 펼쳐지고 있을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들기가 쉬운 것이죠. 하지만 오늘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밤이 깊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절망할 이유가 아니라, 낮이 가까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더욱더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특별히 악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정말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악에 투항하는 사람들도 하나씩 둘씩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밤이 깊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곧 낮이 된다는 거예요. 곧 해가 뜬다는 겁니다. 해가 빨리 뜹니까? 천천히 뜹니까? 굉장히 빨리 뜹니다. 동해에 가서 해가 뜨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 한 번 가서 본 적이 있었는데, 동해에서 저 바다 건너편에 불그스름하게 해가 뜨려고 하는 그 순간에, “야, 이제 해가 뜨겠구나. 사진 찍어야지. 뭐 해야지.” 하고 있는데, 보니까 벌써 해가 다 떠버렸어요. 왜 이렇게 빨리 해가 뜹니까? 보니까 지구 자전 속도가 몇 킬로미터인가요? 혹시 아십니까? 시속 1670km로 지구가 자전한대요. 그러니 해가 얼마나 빨리 뜨는지, 공전은 태양 주위로 우리 지구가 몇 킬로로 돌고 있습니까? 시속 11만 km로 돌고 있대요. (하나도 안 놀라시네요.) 이렇게 빠른 빨리 움직이는 세상에서 잘 살고 계십니다.

아무튼 밤이 깊으면 새벽이 다가오는 것처럼,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한 세상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이 오고,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악한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즉 잠에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잠에 있을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깨어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빛의 갑옷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둠의 일에 대해서는 어둠에 대해서는 어둠의 일이라고 표현한 반면에, 그것과 반대되는 빛의 갑옷에 대해서는 갑옷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안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이 안전한 겁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안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악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다면, 영적인 잠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면, 영적인 잠을 자면서도 “괜찮은가 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네. 괜찮은가 보다.” 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결단을 하고, 영적으로 깨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 있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고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보통 이단 종파나 신비주의 집단에서는 말하기를 이제 종말이 가까이 왔으니까, 여러분들이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기도원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금식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그렇게 잘못 가르칩니다. 그것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찬송하는 거야 좋겠죠. 예배하는 거야 물론 좋겠지만, 그러나 깨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일들 종교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준비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홍수가 나기 전까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홍수가 올 때 모르고 망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그 이야기는 그러니까 먹는 것도 중단해야 되고, 마시는 것도 중단하고 결혼하는 것도 중단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 것은 노아의 패밀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아의 패밀리와 이 세상 사람들과의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고 알지 않은 것이 아니라 노아의 식구들은 방주를 만든 거예요. 노아의 식구가 아닌 사람들은 그냥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가 비가 올 때 죽게 된 것이죠.

오늘 로마서에서의 말씀 가운데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어둠의 일을 벗어버려라.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방탕한 삶을 중단해라. 우리가 악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악한 일을 중단해라. 술 취하는 삶을 살지 말고 이제는 단정한 삶을 살아라. 음란한 삶을 살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라.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라고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이러한 교훈이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전체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이 로마서에서 이 모든 것들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냥 우리가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전에는 사탄을 모시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술취하며 살았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미워하며 살았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악을 행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라고 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은 옵니다. 하루에 시작이 있었으면 하루에 끝이 있고, 일주일의 시작이 있었으면 일주일에 마지막이 있고, 한 달에 시작이 있으면 한 달에 마지막이 있고, 1년의 시작이 있으면 1년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 무슨 날도 있어요? 죽는 날도 있습니다. 인생의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든지, 우주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든지 우리는 어차피 끝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될 텐데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오늘 밤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럴 때 우리가 지금처럼 어둠에 잠을 육신이 육신의 일들을 도모해 가며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했던 모든 잘못들을 중단해 버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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