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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어가라 (눅 5:17-26) 이국진 목사

지난주에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그에 연이어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뇌졸중이라고 하나요? 스트로크(stroke)로 인해서 몸을 사용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서 고쳐주어, 그 사람이 걷게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이 중풍병자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쳤다. 예수님께서 이런 병자를 고치시고 저런 병자를 고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중풍병자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자신의 병도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고,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나도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소망 가운데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이 사람의 문제는 자기의 힘으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방법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고침을 받는 것인데, 지금 현재 나의 상황이 걸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움직일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무엇인가 은혜를 얻을 수가 있겠는데, 자신의 모습이 걸을 수 없는, 중풍으로 인해서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문제를 해결합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그들을 그를 도와주었을까요? 아니면 형제들이 그를 도와주었을까요? 아니면 이웃집 그 이웃들이 이 사람을 도와주었을까요? 누가 그를 도와주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들것에 매고, 예수님에게로 인도해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람의 중풍병이 고침을 받게 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영적인 질병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중풍병자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중풍병에 걸려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영적인 질병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면 해결함을 받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은혜를 입을 수 있을 것인데, 주님 앞에 나올 수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사람을 들것에 뉘어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와서,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 주변에 영적인 중풍병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 주님을 만나야 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 앞에 나아오는가? 자기의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소망을 얻을 수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그 사람들을 들것에 매어 예수님 앞에 인도한 이 친구들처럼, 이 이웃들처럼 우리도 그런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영적인 친구들이 되어주고, 영적인 인도자들이 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 말씀에 보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영적인 환자들, 영적인 중풍병자들이 우리 옆에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우리 가족일 수도 있겠고, 우리의 친척들일 수도 있겠고, 우리의 직장 동료일 수도 있겠고, 우리 이웃집 사람들일 수도 있겠는데, 우리가 가다가 만나는 사람들일 수도 있겠는데, 이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오는 그런 귀한 사명을 오늘 이 시간 깨달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중풍병자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참 어려운 그런 장애물이 있었는데, 첫 번째 장애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걸어갈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두 번째 장애물이 이 사람 앞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온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 사람들을 뚫고 그 앞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기가 어려웠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데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 사람들을 뚫고 그 예수님 앞에 나아갈 방법이 별로 없었다고 하는 것이 이 사람이 맞이한 두 번째 장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과 아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데,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있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이 분명한데, 그런데 사람들이 왜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없는가?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 주변에 몰려 있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쩌면 이게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닐까 싶어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싶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주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인들이 싫어서 못 나가겠다는 거예요. 교인들 꼬락서니를 보니까, 내가 교회 가기 싫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는 것이죠.


최근에 제가 어떤 청년 하나와 연결이 되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문자로 얘기를 나눌 수가 있게 되었는데요. 제가 대구에서 있을 때 그때 알게 되었던 한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어느 날 문자를 보내왔어요. 목사님 유튜브로 말씀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유튜브로 계속 예배를 드리면서 지내왔는데, 그런데 제가 그동안 교회를 나가지 못했어요. 아니 교회를 못 나간 게 아니라 안 나갔어요. 교회가 보여주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싫고, 성도들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싫어서, 교회에 나갈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교회에 나가려고 하니, 예수님 앞에 나가려고 하니 사람들이 싫어서, 그래서 교회에 나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나 이제 교회에 다시 나가고 싶어요”라고 하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물론 이 청년의 생각이 바른 생각은 아닐 겁니다.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옳은 것이고,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교회가 아니고, 교회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이 모인 것이에요. 나와 똑같은 죄인들이 모인 곳, 불완전하고 성격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고 완전하지 못한 흠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우리들이 장애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이런 장애물을 뛰어넘어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혹시라도 나 때문에 시험받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내가 불편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까?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고 싶었던 중풍병자는 그 주변에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막혀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내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혹시라도 내가 장애물이 되고, 내가 방해거리가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마음을 바꾸고 변화를 받고, 주님 앞에 더 온전히 나아가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 사람을 보니 내가 교회를 나가고 싶다,” “저 사람을 보니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러한 선한 도구가 사용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고 하는 그 난관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그래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에 줄로 달아 내려서, 예수님 앞에 가게 만들었다고 한 것이죠. 이해가 좀 됩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생각해 보면, 과연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어떻게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을까?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주인이 가만히 있었을까? 먼지 날리는 것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얻어야 될 영적인 교훈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어떤 교훈을 얻어야 될까요? 영적인 그 열정을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되겠다. 내 앞에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힘들구나 하고 포기하고 돌아갈 게 아니라, 만일 이 중풍병자가 만일 이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면 못 고치는 거예요. 예수님을 못 만나는 거예요.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것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그 사람을 달아 내려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그래서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만나게 되어서, 결국 병이 고침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포기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위해서 더욱더 힘쓰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다른 일을 하는 데는 얼마나 열정적인지 몰라요. 조그마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는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는 반면에, 그러나 영적인 일들에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이죠. 얼마 전에 본 게 하나 있는데요. 2023년에 만들어진 영화 “플레이밍 핫”(Flaming Hot)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2023년에 나왔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아무도 안 보셨군요. 디즈니에서 상영하는 그런 영화로 작년에 나온 영화인데요. 리처드 몬타네스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 사람은 프리토레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스낵 과자 회사에 취직한 사람인데요. 프리토레이라고 하는 회사 아세요? 치토스는 아세요? 예, 치토스 만드는 회사예요. 이 사람은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민자인데 멕시코에서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아니한 저학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어요. 직장을 얻는 것도 학력이 부족해서 직장 얻는 것도 너무나도 어려워서, 여기 가서 면접 봐도 떨어지고 저기 봐서 가도 떨어지는데, 어느 날 이 프리토레이라고 하는 회사의 청소부로 취직하게 된 거죠. 청소부 학력 그렇게 필요하겠나 싶어서, 이 사람이 그 회사에 들어가게 됐는데, 청소부지만 청소를 하면서 과자 만드는 거 스낵 만드는 것을 이렇게 쭉 보면서 관심을 가지고 막 쳐다보는 겁니다. “왜 과자가 타나?” 하면서 하면서,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됐냐면, 치토스를 아주 매운맛 치토스를 만들면, 멕시코 사람들은 매운맛을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그것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회장님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 겁니다. 그 청소부가 회장님하고 통화를 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쉬운 일이 아닌데 통화를 해냈고, 그 회장님을 잘 설득시켜서 매운맛 치토스를 만들게 된 거예요. 팔립니까? 안 팔려요. 왜 그 위에 있는 임역원들이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하고, 청소부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서, 그러면서 광고도 하나도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포기했느냐? 포기한 게 아니라, 그 만들어진 제품을 그 사람들하고 다 싣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다 나눠준 겁니다. 이거 한번 맛보라고, 광고 하나 때리지 않았는데, 이것을 다 나눠주면서 결국 사람들이 이것을 찾기 시작해서, 결국 엄청난 매출 실적을 올렸고, 이 사람이 어떻게 됐는가? 나중에 프리토레이 회사의 CEO로, 사장으로 되기까지 성공한 놀라운 실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한번 보시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 하나로 성공하기 위해서 열정을 다해서, 사람들이 무시하고 안 된다고 하고 해도, 끝까지 그것을 실천해서 결국에는 성공해 내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얼마나 큰 감동이기 봤는데요.


우리 믿음의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가? 조그마한 어려움에 좌절하고 포기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물들을 겪어내고 이겨내고 승리해서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장애물들이 얼마나 많아요. 성경 읽기 하면서 장애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런데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한 번 못 읽으면, 한 번 빠졌으니 안 되겠다. 포기하자. “금년 포기”라고 벌써 하신 분 계십니까? 절대로 그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비 오는구나. 교회 가는 거 포기. 오늘은 피곤하네. 졸리네. 오늘은 오후 예배드리는 거, 포기. 그렇게 하지 마시고,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과 그 장애물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더라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들이 하나하나 더 성숙해져 나가,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제 자리인가요? 목사님 제 믿음이 왜 안 자라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님 지금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는데 왜 제 믿음이 제 자리입니까?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분이 있는데 이유는 간단해요. 포기해 버려서 그래요. 장애물들을 이겨내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그 환자를 내려서 예수님 앞에 만나게 하는 그 열정을 가지고, 그 사람의 질병을 치유했던 것처럼,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고 조그마한 장애물이 있어도, 그냥 포기해 버리고 그냥 중단해 버릴 것이 아니라, 또다시 일어서고 또다시 그 장애물들을 이겨내면서, 우리들의 믿음이 하나하나씩 더 성장해 나가는 우리 예수비전교회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붕을 뚫고 구멍을 내어서 중풍병 환자를 내려놓는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는데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에 앞서서, 먼저 내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해 주신 것이죠. 이 죄 용서를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속으로 “이것은 무슨 일인가? 예수님이 지금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는데요. 사실 우리들도 좀처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병을 고치러 온 사람에게 왜 예수님께서는 죄 용서의 선언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그리고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선언해 주신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죄 용서를 선언해 주신 것일까요? 이 사람이 뭘 잘했다고 죄 용서를 해주시는 것이죠? 무슨 근거로 이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냥 이 사람은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데리고 와서 이 자리에 나온 것뿐입니다. 뭔가 회개했다던가? 무엇인가 죄 용서를 받을 만한 무슨 일을 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것보다도 죄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보셨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을 고치러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병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문제예요? “죄가 더 큰 문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다.”라고 진단하고 계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병원에 열이 있어서 갑니다. 그러면 해열제 먹고 돌려보내나요? 아니요. 그 열이 나게 만드는 그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속에서 어떤 질병이 있고 속에서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열이 나는가를 그걸 진단하고, 그 속의 문제를 해결해야 그게 명의 아닙니까? 그냥 해열제 주는 게 의사가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의 문제를 보면서 이 사람이 지금 중풍병에 걸려 있는 이 모습, 그것이 우리 겉으로 나타나는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 큰 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문제인 것이고, 그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죄의 문제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먼저 우리가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영적인 현주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때로는 가정의 문제가 때로는 재정적인 문제가, 때로는 부부간의 문제가 때로는 여러 가지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을 텐데, 그런데 그것이 우리들의 보이는 문제라고 한다고 하면, 사실은 영적인 문제가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진단해 봐야 되는 거죠. 영적인 MRI를 찍어봐야 됩니다. 영적인 초음파를 검사해 봐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해결해야 될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주님 앞에서 치료받고,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항상 우리의 질문들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주님 제가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이 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선언의 말씀을 들었던 주변 사람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불편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죄 용서를 선언하는 그 모습을 보고서 불쾌한 것이죠. 그래서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신성 모독을 하는가? 왜 함부로 하나님이 하는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가?” 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오히려 질문을 던지신 말씀이 누가복음 5장 23절 말씀에 기록돼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죄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하는 게 쉬운 겁니까? 일어나 걸어가라 말하는 게 쉬운 겁니까? 어느 게 더 쉬운 거죠? 1번 2번 어느 게 더 쉬워요? 학자들이 이걸 가지고 연구하면서 어떤 학자는 죄 용서를 선언하는 게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병을 고치는 게 어렵다. 서로 의견이 분분한데, 사실 정답은 둘 다 어려운 겁니다. 죄 용서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적어도 그 당시는.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는 신성 모독을 한다고 따지지 않았던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죄 용서한다고 하니까 불편해하는 거죠.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 거예요. 병자를 고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죄 용서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구나, 우리의 구세주가 왔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주님이 오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아니하고, 오히려 비난하고 욕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시는 거죠. 죄 용서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그러면 병 고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느냐?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왜 내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나오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계시는 것이죠.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병을 치료받기도 하고 죄가 용서받기도 하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 받아서 온전해지는 사람들이 바로 자기 옆에 있는데, 그러한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시는 분이 주님이 바로 우리 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고, 아무런 은총도 아무런 축복도 얻지 못하는 그런 불쌍한 인생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인 것이죠.


혹시 그게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하고 같지 않아요. 이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편안해질 거다. 수고하고 돌을 닦고 열심히 수련하면 그러면 경지에 올라갈 거다. 차범근 선수처럼 공을 탁 차면서, “이렇게 차면 골이 들어가는 거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게 문제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한다면, 그냥 그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서성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문제들을 내어놓고 나의 영적인 문제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고침을 받는 그런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치유함 받고 회복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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