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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죄인의 친구 (눅 5:27-32)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고 하는 한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한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시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몇몇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 레위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당시 살고 있던 유대 사람들은,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바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또 베드로가 게바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이 여러 이름들을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오늘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레위라고 하는 사람은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라고 하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똑같은데 이름만 다릅니다. 그 이름이 다른 것은 서로 다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같은 인물이지만 한편에서는 레위라고 부르고, 한편에서는 마태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도 적었다가 저렇게도 적었다가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누가복음에서는 레위라고 하는 이름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이 레위라고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거두는 세리로 있다고 하는 그 장면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그 장면이 참 너무나도 모순적이다. “아이러니하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레위라고 하는 그 이름이 어떤 이름입니까? 아주 선택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킬 때, 레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이 레위라고 하는 사람은 레위 지파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는 자기 지파에서 뛰어난 사람들의 이름을 자기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주로 사울이라고 하는 이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유대 지파 사람들은 다윗이라고 하는 이름을 많이 가지고 이름을 짓는 겁니다. 근데 레위 지파 사람들은 레위라고 하는 이름으로 이름을 많이 짓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정말 레위 지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들이 가능성이 많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 레위 지파에 속한 이 사람이 다른 거룩한 일, 정말 의로운 일, 하나님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리가 되어서 악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적인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날에야 세무공무원들 좋은 일이죠. 세무공무원이 된다고 하는 것은 축하받을 만한 일이고,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분들이니까, 좋은 분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하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금을 거두는 이 세리들은 민족의 반역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악랄한 범죄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정부에게 돈을 주고 그 세리라고 하는 그 자리를 사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가 세리가 되면 이 유대민족으로부터 마음껏 세금을 거두어 드리는 겁니다. 로마 정부에서는 세금을 얼마나 걷어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걷든지 간에 로마에게 바칠 만큼의 세금만 제때제때 바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세리는 유능한 세리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당시 로마 사람들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기 민족들로부터 피를 빨아내고, 고혈을 빨아내는, 그런 악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세리였기 때문에, 정말 이름에 걸맞지 않은 나쁜 일을 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레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서 세리 그러면 치를 떤 것 저 사람은 지옥의 아랫목에 가도 시원치 않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아주 혐오의 대상이 세리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그 세리로 있는 레위를 만나셨고 그 레위를 향해서 “나를 좇으라” 말씀해 주신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리 특별히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세리를 뽑아서,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셨다고 하는 이 사실이 좀 납득이 되십니까? 이해할 만하시다고 생각이 들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모습을 본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당장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너무나도 기뻐서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고, 그리고 그 잔치 자리에 수많은 세리들이 같이 와서 먹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죠. “예수님이 죄인과 어울리고 있다,” “예수님이 세리와 어울리고 있다.”라고 비난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성경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바리새인 서기관 그러면, 이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사실은 이런 반응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입니까?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참 선한 사람들이에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고, 서기관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누구였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이고, 죄악을 저질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 사람들이 훨씬 더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세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아주셨습니까? 그리고 왜 세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렇게 잔치를 버리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셔서 저 천국의 잔치를 맛볼 수 있게 해 줄 거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잔치를 많이 버리신 것이죠. 저 하나님 나라의 잔치 가운데 세리들도 참여할 수 있다. 죄인들도 참여할 수 있다. 연약한 사람들을 불러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잔치를 벌이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랍비라고 하면서,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왜 세리들과 어울리느냐? “왜 죄인들과 어울리느냐?”라고 하는 이 강력한 비난에 사실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31절에서 3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때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그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내가 온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는가? 이 세상이 죄인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죄인들을 불러서 회개시키고, 그 죄인들을 건강하게 만들고, 의롭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들로 바꾸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더 좋아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인이면 예수님께서 안 찾으니까, 죄인이 돼야 되겠다. 죄를 더 많이 지어야 되겠다. 그런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을 하나님을 떠나버린 그 절망적인 그 사람들을 주님께서 살리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 본문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만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 게 아니고,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난하는 것과 같은 그런 비난을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이 듣는 비난은 무슨 비난이죠? 교회에 가면 의로운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까, 다 똑같더라. 아니 오히려 더 불신자보다 더 나쁘더라. 텔레비전의 뉴스를 보면, 종종 아주 우리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뉴스들이 방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뉴스들이죠? 아무개 목사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더라. 그루밍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더라. 돈을 횡령했다더라. 교회에서 서로 싸우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더라. 그런 안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고 있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 비난하는 것이죠. 저런 더러운 교회들, 저런 더러운 목사들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비난을 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럴 때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그런 비난이 있으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죠? 그건 잘못된 소수의 사람들이야. 교회가 그렇게 나쁜 게 아니고, 저 목사는 잘못된 목사야. 저 장로는 잘못된 장로야. 저건 이단들이 그러는 거야. 나쁜 목사들이 그러는 거야. 그런데 우리 예수비전교회 목사님은 안 그래. 그렇게 대답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그런 잘못된 목사들도 있지만, 사실은 잘못된 목사가 있는 것은, 그것은 그 사람이 정말 소수의 나쁜 사람이고, 사실 교회가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 교회가 정말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고, 교회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고, 우리 교회도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해마다 늘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래서 교회가 수많은 교육 사업도 하고, 선교 사업도 하고, 구제도 많이 하고 하는 그런 선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러한 것들은 전혀 보도가 되지 않는 반면에, 누군가 하나 예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그것은 확대되어서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뉴스에 많이 방영되고 있지만, 사실은 교회에 가보면 좋은 게 많이 있고, “우리 교회는 괜찮아”라고 그렇게 대답하고 계십니까? 많이들 그렇게 대답하고 계시죠?

하지만 그런 대답은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닙니다. 그런 비난들을 받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대답해야 되느냐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맞아요. 아 저런 나쁜 일을 했구나. 저 목사도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유혹을 받아서 재물을 탐욕하게 되는 그런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되었고, 그리고 잘못된 판단으로 그런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구나.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구나.”라고 공감해 주면서, 그런데 그게 그 사람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교회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나에게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그런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들어가게 되면, 나도 도둑질할 수 있고, 나도 나쁜 짓 할 수 있고, 나도 미워할 수 있고, 나도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그러한 똑같은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교회는 좋은 사람들이 깨끗하고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사실 우리 목사님이 얼굴이 그렇게 인지하게 생겨 보이지만, 사실은 나쁜 일을 벌이게 된다고 하면, 벌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분이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죄를 범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인생이 완벽하지 못하고, 언제나 넘어지고 언제나 죄를 짓고, 언제나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더러운 인생들이기 때문에, 내 힘과 능력으로는 거룩하게 되어서 완벽하게 되어서 하나님에게 나갈 수 없는, 그런 너무나도 무능한 영적으로 더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죄인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그 의인들만 골라서 우리를 천국의 의인들만 골라서 데려가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죄인도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는 복음의 진리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친구들을 향해서 참 저 사람 나쁜 사람이지, 저 사람 참 악한 사람이야. 그런데 저 사람만이 아니라, 나도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되면 나도 그렇게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늘 하나님 앞에 그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나 자신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나도 넘어질 수 있고, 그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도 한순간에 넘어질 수 있고, 아무리 헌신했던 사람도 한순간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바로 그러한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들만의 사람, 의인들만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다 멸망받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죄인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주시고 씻기셔서 하나님의 그 천국의 복음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요.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의인도 있고 죄인도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의 말씀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완벽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다 죄를 범하여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의인도 있고 죄인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죄인들인 것이죠. 모두가 다 죄인인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죄인을 부르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세리에게 가신 거예요. 바리새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고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세리에게 가셔서,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세리가 응답하여 주님 앞에 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리 레위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레위가 많은 장점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신 것인데요. 이 세상에 감독들은 길거리 캐스팅을 하면서 흙 속에 숨어 있는 진주와 같은 사람들을 발굴해 냅니다. 그래서 감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감독들의 눈이 참 대단하다고 하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아주 좋은 영화를 만들어 놓고, 그리고 그 영화에 데뷔하게 된 무명의 신인이 막 뜨는 것을 보면서 감독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캐스팅했습니까? 그러면 감독이 얘기를 해요. 내가 사실은 어느 날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고민하면서 길거리를 가고 있는데, 저 사람을 보는데, 저 사람이면 이 영화에 딱 맞겠다고 하는 그런 감이 와서, “그 사람에게 제안을 해서, 내가 그 사람을 캐스팅한 겁니다.”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역시 “이 감독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이 레위라고 하는 사람을 캐스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캐스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감독이 보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무슨 장점이 있고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죠.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 아니고, 의로움이 있어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 가면 미시간주라고 하는 곳에 노스리지 교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광고판을 하나 세워놓고, 그 광고판에 하나의 문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뭐라고 적어놓았냐면, “우리 노스리지 교회는 위선자들의 교회입니다”라고 써놓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사랑이 많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행복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정말 멋진 교회입니다. 이렇게 선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자꾸 그렇게 선전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교회에 오면 사랑이 넘쳐요. 우리 교회는 다 좋아요. 주차장도 좋고 목사님도 좋고 성도님도 좋고 다 좋아요. 그렇게 선전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 교회는 정반대로 선전을 했습니다. 뭐라고 선전했냐면, 우리 교회는 위선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왜 그렇게 써놓았느냐고 브레드 파월 목사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교회에 대해서 교회 밖에서 교회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교회라고 생각하는가? 교회라고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더 깨끗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런 아주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그 위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로 구성되어 있는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 위선자들을, 이 욕심 많은 사람들을, 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 사람들을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다. 내가 의로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당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그것을 써놓았다고 말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써놓았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을 알고서, “당신네 교회는 위선자들이 다니는 교회라매?” 당신네 교회는 순 거짓말쟁이들이 다니는 교회라며, 도대체 그 교회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무슨 뭐 싸우고 있는 거야? “왜 그렇게 써놨어?”라고 질문을 던지면, 그 이야기를 가지고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대화를 터기 위한 그 물꼬를 트기 위한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써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죠. 내가 주님 앞에 온 것은 거룩하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님께서 세리도 구원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주님께서 영접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인 것이죠. 물론 오늘 이 말씀을 오해하시면 안 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왔으니까, 그러니까 그래 난 어차피 죄인이야.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어” 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지내도 괜찮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어요. “나는 죄인이야.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뻔뻔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5장 31절 3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쓸 때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뭐 하기 위해? “회개시키러” 죄인들끼리 모여서, 우리들은 죄인들이야 하면서, 계속해서 죄지으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지만 주님 앞에 돌아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한 그 길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날마다 우리 가운데 있는 그 악한 모습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며 우리의 모습이 변화되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지만, 그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를 환영해 주었지만, 그 어떤 죄를 저질렀어도 과거에 무슨 일을 했어도 아버지가 다 받아주었지만, 그 이야기는 다시 집을 나가도 괜찮다고 하는 이야기인가요? 아니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되는 책임이 그러 소명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레위는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복음 5장 28절 말씀에 보니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자기가 지금까지 돈벌이를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채워주었던 그 세리의 일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돈을 많이 벌어주는 직업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게 되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던 그 주님을 따라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그 길을 이 레위가 좇아가게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만난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의 삶을 버리고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주님께서 레위를 부르셨던 그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지금까지 애착 인형처럼 버리지 못하고, 늘 껴안고 있었던 죄악이 무엇인가? 이제 그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버리고,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그 죄의 애착들을 버려버리고,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세상 등지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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