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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요 21:20-23)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는 그런 귀한 사명을 주셨고, 그리고 그 일을 할 때에 내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을 따라 믿음으로 살 것을 권면해 주셨는데요.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이런 사명을 주셨을 때, 바로 그 옆에 다른 한 제자가 있는 것이 베드로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그 사람이 12 제자 가운데서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뭐라고 표현하냐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는 그런 표현들이 몇 번 등장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고 참 애지중지하셨던 그 제자가, 아마도 요한일 거라고 많은 성경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성만찬에 참여하기도 했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은 그 제자였는데, 베드로가 그 제자를 보게 되는 순간에, 마음속에 질문이 하나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 실패한 사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했던 내게 이런 사명을 주시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끼던 저 제자를 향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명을 주고, 어떠한 길을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그러면 이 제자는 어떠한 삶을 살겠습니까? 주님 그러면 이 제자는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까? 그 제자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죠. 요한복음 21장 2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쭤보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어쩌면 자연스러운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이 요한복음 21장 22절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내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셨을 때, 어쩌면 베드로는 순교의 자리까지 가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암시를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이죠. 남이 너희를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그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죽음의 자리까지 순교의 자리까지 가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암시를 주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그 제자에 대해서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남겨둔다고 한들 내게 무슨 상관이냐?”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요한은 죽지 않고, 순교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소문이 기독교 교회 내에서 많이 퍼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끝까지 살려둔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정정해 주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 대답의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 하면, 베드로를 향해서 내가 그 사람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사람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신경 쓸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충성하는가, 다른 사람은 어느 정도 하는가,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 네가 할 일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그 믿음의 길에 여러 가지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방해들이 있겠습니까? 때로는 고통과 고난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믿음의 길에 무너지기가 쉽고요. 또 하나의 방해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정반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좋은 일들만 있을 때, 오히려 더 그것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생기기도 하고요. 또는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믿음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이 내 뒤에서 욕하는 그 소리 때문에, 그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오히려 사람들이 박수치는 그 소리에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그래서 무너지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믿음의 길 가운데 방해가 무엇이 되는가? “같이 가는 믿음의 동료가 방해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를 향해서 해주신 말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신경 쓸 게 아니라,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그 여정들이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지 간에 나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믿음의 각오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그래서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 기준을 맞추어서 판단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라.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말든,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그런 얘기 많이 했죠? 다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다른 사람이 어떤 짓을 하든, 그것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을 정말 철저하게 믿음을 지켜서 나가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늘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면 나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아니하면 나도 하지 않는 그런 경향이 많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늘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런 선한 영향력들은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고 나쁜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나쁜 영향력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부하면서, 그런 것에 감염되지 아니하면서, 우리가 가야 될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받는가? 선한 영향력은 받아들이고, 나쁜 영향력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되는데, 거꾸로 할 때가 많아요. 선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받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쁜 영향력을 미쳐 주게 되면, 그것을 따라갈 때가 너무나도 많은데,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이 기준이고 성경이 기준이라고 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선한 영향들을 받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 사람들과 함께 격려하십시다. “나쁜 영향력 받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받읍시다.” 우리의 기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까? 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까? 그렇죠? 왜 다른 사람들을 자꾸 봅니까? 그것은 혼자 튀었다가 망신당하고, 혼자 튀었다가 어려움을 겪었던 일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있냐면 어떤 마음이 있어요? 중간만 가자. 앞서가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만큼만 하자. 그게 우리들의 생활 철학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걸 우리가 어디에서 배우냐 하면 군대 가서 배워요. 군대 갈 때 늘 사람들이 옆에서 해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나서지도 말고 뒤서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 중간만 가라. 괜히 나서지 마라. 손들지 말고, 괜히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손들지 말고 중간만 가라. 중간만 가라. 그것을 늘 항상 배워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 하지 않나를 늘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 “열린 신앙 톡투유”를 할 때도 “질문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질문하나, 질문하지 않나, 보고 있다가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도 질문을 안 하고 참고 기다립니다. 괜히 내가 먼저 질문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 해서, 참고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질문하면 끝날 때 되면, 그때 막 손들고 질문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는데요.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안 되는 것이죠. 이게 지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일들이 있냐 하면 내가 먼저 나섰다가 두드려 맞고 내가 먼저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하고 내가 먼저 나섰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서, 우리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괜히 나섰다가 내가 손가락질 당하고 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할까 봐, 그래서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다른 사람은 이만큼 하나 보면서, 그 신앙생활에서도 내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내가 이것은, 내가 나서는 것이 아닐까?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막 너무 나가지 않는가? 하면서, 그 믿음의 길을 자꾸만 자꾸만 억제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것이 바른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은 성경의 기준이고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기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헌신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 갈라디아서 6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영어 성경 NIV 성경에서는 뭐라고 번역해 놓았냐면, 각각 자기가 할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부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그 일로 인해서, 내가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내가 성실하게 했다고 한다면, 기쁨이 넘치고, 내가 내게 주어진 그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보상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기쁨이 넘칠 것이고, 그러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루어 놓은 그 성과보다 내가 더 많이 이루어 놓으면 그때 기분이 좋고, 다른 사람이 했던 것보다 내가 했던 것이 더 크면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성과를 이루고 어떠한 면에서 많은 것들을 했든지 말든지, 내가 하는 그 일에 내가 신실하게 정말 하나님께서 해주신 그 명령에 따라 내가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기쁨이 되고 그 자체로 영광이 되고 그 자체로 행복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섬겨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사명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는다고 해서, 나는 그걸 못 넣는다고 해서, 그래서 좌절하고 우울해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는 그 사명의 말씀 가운데 내가 철저하게 순종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너는 왜 꼴을 못 넣느냐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왜 이것을 못했느냐?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주신 그 사명, 내게 주어진 것으로 내가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했다고 한다면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주님께서 칭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 렙돈이라고 하는 동전을 헌금궤에 놓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랩돈이, 그 동전이 헌금궤 속으로 들어가면서 딸랑거리는 그 소리를 들을 때, 어쩌면 그 소리가 창피하게 느껴졌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부자들은 와서 거기에 많은 돈을 넣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자들이 그 헌금을 넣는 그 소리가, 지폐가 아니고, 그 당시는 전부 이런 동전 같은 거잖아요? 돈을 집어넣으면 촤르르르르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릴 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이 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많이 헌신을 하는구나. 저 사람은 저렇게 많이 하는구나. 저 사람은 이만큼 했네. 저 사람은 어떤 큼직한 일을 했네. 하는 것이 사람들 눈에 다 보이는 거죠. 하지만 한 여인이 와서 헌금궤 안에 동전 2개를 집어넣게 됐을 때, 딸랑거리는 그 작은 소리. “뭐야? 저것밖에 안 넣었어?”라고 하는 그 소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넣었을 때, 예수님께서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넣었다”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 너희 가운데 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했을 때, 한 꼬마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라고 하는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양이 되지 않고, 너무나도 작은 양입니다, 너무나도 작은 양이지만, 그것을 주님께서 비난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시고 감사하시고 축사하시며,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게 된 것이죠.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면서,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작다.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하는 것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것을 바라보시는 것이죠. 맡겨놓지 않은 것을 달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가 신실하게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게 주님께서 주신 그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내게 주신 그 십자가, 내게 주신 그 남겨주신 고난을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다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사람이 도망가지 않고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역할 때 두각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런 믿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저런 믿음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그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지만,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다 도망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도망가는 게 시대의 분위기가 되어버린 그 상황 가운데서, 이 아리마대 사람은 나도 도망가야 되나? 지금은 숨어야 될 때인가? 생각하면서 잠잠히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는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해서 자신에게 있는 무덤에 예수님을 매장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던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나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믿음의 길을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교회를 몸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교회를 몸에 비유하면서 몸이 같은 지체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몸에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귀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입이 아니고, 모든 지체가 다 귀가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코가 아니라 역할들이 각각 다른 역할들이 다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하는 그 길을 신실하게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 젊은이들을 마음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다 공무원의 길로 가고, 모두가 다 이 길로 가고 모두가 다 이런 방향으로 가고, 사람들의 시대 분위기에 따라 다 쓸려갈 때,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그게 정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그 길이 정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따라서 담대하게 나아가는 그런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자녀들을 양육할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로 다 따라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특징과 네가 가진 그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서, 자신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그렇게 길을 열어주어서, 자신 있게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 자녀들을 길러야 될 것 같아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도 내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그런 길을 따라 선한 영향력이라고 한다면 따라가지만 나쁜 영향력이라고 하면 따라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안다고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그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면서 신실하게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십자가를 못에 박으라고 비난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이 비아냥거리고 욕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아, 내가 숨어야 되겠구나, 내가 피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기에, 홀로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그 주님을 생각하며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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