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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사랑 (막 7:6-13)

부모님들이 우리 아이들을 향해서 꼬마 아이들을 향해서 종종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라고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이 있죠.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굉장히 난처한 질문입니다. 엄마도 사랑하고 아빠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최근에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어떤 부모님은 얄궂게 이런 질문을 던지시더라고요. “너 아빠랑 엄마랑 이혼하면 누구랑 같이 살래?” 그 아이가 너무나도 참 대답하기가 곤란해서 하는 말이 “몰라. 나 혼자 살 거야.” 그렇게 대답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참 흥미롭게 본 적이 있습니다.


밸런스 게임이라고 하는, 일종의 밸런스 게임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밸런스 게임을 많이 하는데요. 2개의 선택지를 놓고 무엇을 선택해야 되는가? 문제를 던지는데, 이것도 저것도 참 선택하기가 애매한 그런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들 가운데서, 그래도 어느 거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대답함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그런 게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난번에 아주 곤란한 질문을 저에게 던지더라고요. 우리 “노해경 집사님이 좋으냐?” “한서원 집사님이 좋으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해서, 아무나 선택했습니다. 시험이 들지 않았기를 그 이후에 기도하고, “이것 때문에 혹시 시험 들었을까?” 제가 시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는 하나의 밸런스 게임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사랑이냐? 부모님 사랑이냐?”라고 하는 밸런스 게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는 거죠. “너희는 하나님이 더 좋냐? 부모님이 더 좋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요? 만일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곤란한 질문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무엇을 선택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보면 십계명 가운데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1,2계명을 조금 전에 읽었는데요. 이 십계명의 제1계명과 2 계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최고로 여겨야 되고, 하나님이 최우선순위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고,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다고 하는 게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는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부터 38절 말씀에 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기는 하되, 그 사랑의 강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주님보다 더 부모님을 사랑하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경 말씀을 보면,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사랑이 최고인 것이죠. 하나님 사랑과 부모님 사랑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걸 선택해야 된다고 하는 결론을 이 말씀들을 읽으면서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성경의 유일한 결론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최종적인 결론도 아닙니다. 항상 제가 강조하듯이 성경은 성경 어느 한 구절 어느 한 곳에 쓰여져 있는 그 내용을 읽고 거기에 기록된 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고려해서 그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여러 번 여러 번 강조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우선순위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특별히 오늘 본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생각과 관행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여겼기 때문에 그래서 으레 껏 하나님에게 바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앞에서 어느 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고르반”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고르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 드린 것,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물건을 놓고 이것은 “고르반”이다. 하나님께 바칠 물건이다. 저것은 하나님께 드릴 물건이라고 그렇게 선언하게 되면, 아무도 못 건드는 겁니다. 거룩하게 따로 구별해 버린 것이어서, 그것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팔거나 내가 먹거나 그 누구에게 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 집에 소가 있어요. 양이 있어요. 먹을 그런 양식이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먹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걸 팔았으면 좋겠다 했을 때, 이것은 “고르반”이야. “내가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한 거야.” 하나님께 바칠 거라고 그렇게 말해 놓으면, 그것은 그 어느 용도에도 사용할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 당시 사회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는 그런 사회였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관습이 그 당시에 많이 악용이 되어서, 부모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않고,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핑계로 사용된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도대체 잘 그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하지만 “이걸 아버지에게 드렸으면 좋겠다.” “이걸 어머니에게 드렸으면 좋겠다.”라고 누군가 형제들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러면 대답을 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께 바친 거야.” “하나님께 드리기로 내가 서원한 거야.” 그러니까 부모님에게 줄 수가 없다고 하면, 모두가 다 인정하고 그래서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 우선이기 때문에, 부모님 사랑보다, 하나님 사랑이냐? 부모님 사랑이냐? 둘 중에 하나 가운데서 선택해야 된다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최고의 지엄하신 존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거라고 한다면 부모님도 건들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결과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쩌면 사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고,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접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되어서 교회 일을 하는 것이 항상 우선이 되고, 그래서 그러다 보니까 아내나 우리 자녀들이나 우리 부모님이 언제나 교회 일이라고 한다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특별히 주일을 준비하게 되는 토요일이 되면, 그리고 주일에서 주일날 사역을 하는 주일이게 되면, 제 아내든 제 아이들이든 저를 어떻게 건들지를 못하는 거죠. 아이들이 “아빠 같이 놀자”라고 이야기하고 “아빠, 이것 좀 해줘.” “저것 좀 해줘.” 이거 필요한 일이 있는데 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제 아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래요. “오늘 토요일이야. 내일 주일 준비해야 되는데, 아빠 찾지 마.” 그래서 마치 저에게는 교회 일을 준비하고, 주의 일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아내나 자녀들에게 해야 할 사랑의 의무가 가장 쉽게 면제되는 그런 핑곗거리가 보여버린 것이죠. 그러다가 제가 교회에서 탁구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제 아내가 화가 납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겠죠.

그런데 이런 모습들이 목회자에게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도 많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가정을 내 팽개쳐버리고, 내가 교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을 제대로 잘 돌보지 않아도 되고, 우리 가정을 제대로 잘 돌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교회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아이들 밥도 안 차려주고 예전에 그랬었던가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여 못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핑계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을 핑계로, 부모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그것은 정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부모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을 사랑하는 게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이냐 부모님 사랑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부모님을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자녀들을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웃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가?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사명에 따라 사랑하고 돌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을 그냥 내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은 가족을 잘 돌보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온전히 공경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죠. 엄마 아빠 중에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없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게 가능한 게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5절에서 40절 말씀 가운데서 이 말씀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율법이 뭡니까? 하나님의 마음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율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 사랑이 우선이고 그리고 그 우선된 다음에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고, 둘째도 그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하는 거와 똑같다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좀 더 못한 것, 부차적인 것, 세컨더리 그냥 나중에 부차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바로 똑같은 그 방법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오. 바로 이웃이 누굽니까? 우리 부모님일 수도 있겠고, 우리 자녀들일 수도, 우리와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일 수도 있겠고,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이웃들, 가족들,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20절 말씀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곳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자녀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인 것이고, 우리 이웃들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지 않고, 심지어 나를 원수로 만들고 나를 힘들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순 엉터리요 거짓말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분명하게 균형적으로 잘 해석해야 하는 것인데요. 만일 어떤 교회에서 만일 우리를 향해서 부모를 거역하라고 가르치고, 부모를 떠나야만 하고 반항해야만 하고,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를 버리거나 가족을 버리거나 자녀들을 내치라고 말한다고 하면, 그런 교회는 이단 사이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모님 사랑에 대한 부모님이나 자녀들에 대한 것을 폄하하는 것 같은 그런 발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강조하려면, 그 강조하는 것을 위해서 좀 비교를 해서, 다른 것들을 좀 폄하해 버려야 강조가 되기 때문에, 강조하다 보면 어쩌다가 보면 그렇게 표현이 나올 수가 있기 때문에, 한두 번 이야기하는 걸로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나 전반적으로 가정을 무시해야 하고 또 이웃을 미워해야 되고 또한 가족들을 소홀히 해도 되고 떠나야 되고, 하나님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하는 식으로 그렇게 가르친다고 한다면, 이단이나 사이비적 요소가 굉장히 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온전히 가르치는 교회라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에베소서 6장 1절의 말씀은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 5장 8절 말씀 가운데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을 내 팽개쳐도 좋다는 것은 그것은 괜찮은 생각이 아니라 사실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생각이라고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태도는 무엇인가? 불신자보다 더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게 맞아요. 아마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두드려 맞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마음속에 악한 감정이 남아있는 그런 자녀들도 있을 겁니다. 나에게 못된 짓을 한 부모님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아버지나 어머니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수 차례에 걸쳐서 제가 반복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우리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또 가르쳐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수차례 반복해 왔는데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부모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그리고 너희 자녀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일 많이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을 좀 사랑하는 걸 좀 적당히 해야 되고, 강도를 좀 줄여야 되고, 우리 자녀들도 많이 사랑할 것이 아니라 좀 그 사랑의 강도를 좀 적당히 줄여야 되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도록, 우리 가족을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도록 사랑의 강도를 줄여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보통 우리 한국에 있는 성도님들 가운데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를 너무 사랑하면 우리 가족을 너무 사랑하면 우리 부모님을 너무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셔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좀 사랑도 적당하게, 물론 적절함을 유지하는 것은 좋은 것이겠습니다마는, 사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덜 표현하는 것이 그게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쭉 내려왔던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었던 그런 미신적인 생각이 무엇이죠? 우리나라에 있던 미신적인 생각은 우리 자녀들을 이쁘다고 하거나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칭찬하거나 막 좋다고 이야기하면 어떤 일이 벌어져요? 귀신이 와가지고 잡아간다 그런 생각들을 하나요? 그런 생각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했냐면 아이들이 태어나면 아이들의 이름을 이쁘게 안 지어요. 뭐라고 지었습니까? 개똥이라고 지었어요. 말똥이라고 짓고 그래서 알고 계십니까? 황희 정승의 어렸을 때 이름이 돼지라는 거 알고 있습니까? 도야지라고 지었대요. 고종 황제의 어렸을 때 이름이 뭔 줄 아십니까? 개똥이였대요. 왜? 어린아이가 우리 부모님이 “이쁘다. 이쁘다. 아이고 왜 이렇게 이쁘냐?” 그러면 아주 소중한 이름을 붙여주고, 막 그러면, 귀신이 와서 그 아이를 데리고 가버리고 죽여버리고 하기 때문에, 천명위복(賤名爲福)이라, 천한 이름을 지어주어야 복이 온다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밉다고 말하고,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고 미워. 아이고 미워.” 그렇게 얘기하고, 그래서 예전에는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꼬마 아이들이 “아기 이쁘다. 이쁘다” 그러면 부모님들이 막 화를 내면서, “이쁘다고 하지 마. 밉다고 얘기해.” 그러면서, “미워” 그러고, 애들을 데리고 나갈 때도 이쁘게 꾸미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다 검정 같은 거 막 묻혀가지고 나가고, 그렇게 했다고 그래요.

제가 본 건 아니고. 왜냐하면 귀신이 있어서 질투하는 신이 있어서 우리가 우리 가족을 너무 사랑하고 행복한 것 같으면,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 버리고,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가 버리는 그런 어떤 영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그래서 두려운 마음에, 우리 자녀들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일부러 나쁜 이름을 짓고 일부러 밉다고 말하고, 미운 것 이 못생긴 것 그러면서 막 일부러 얼굴을 더럽혀서 나가고,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하나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런 의미의 질투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부모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는 걸 보면서, “저것들이, 왜 저것들 지 새끼만 좋아하나?” 하면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라 이 말이에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는 걸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선한 것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잘 되는 일을 보면서 기뻐하시는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신 것이죠.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셔요.

부모님은 어떠한 부모님이십니까? 부모님은 내가 마음껏 자랑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대상, 유일한 대상이 부모님인 거죠. 내가 어디 가서 1등을 하고, 내가 어디 가서 수상을 하고, 내가 어디 가서 돈 많이 벌고, 내가 어디 가서 땅 산 거, 우리 집 멋지게 꾸민 거 이야기하면, 좋은 일 있어서 이야기하면 겉으로는 뭐 좋아하는 척 하지만, 뒤에 가서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왕따 시켜버리고, 그런 게 우리 인간 사회 가운데서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힘들어 사는 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에요. 근데 유일하게 아무리 자랑해도 아무 문제없는 대상이 누구냐면은 우리 부모님이라.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슬픔이 그거라고 그래요. 자기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을 자랑할, 보여줄, 그림을 그려놓고 “엄마, 나 이거 그렸어.” “아빠, 나 이거 그렸어.” 보여줘야 되는데, 정말 못 그린 것도 보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좋아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다 받아주는 그런 분이 바로 부모님과 같은 것인데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이 미신에서 말하는 귀신, 그래서 좋은 일이 있으면 질투하고 시기해서 죽여버리고 행복을 빼앗아가 버리고,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심하면서 “이 개똥아” 그러면서 보호를 해야만 하는 그런 악한 존재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아버지나 어머니를 너희 자녀를 주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 말씀은 우리의 사랑이 강도를 좀 더 줄여야 되고, 사랑을 절제해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 하는데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 돈이나 우리 가족이나 이런 것들을 우상으로 섬기게 될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족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안타깝게도 잘못된 길로 갈 때가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잘못된 방법이 방법으로 가지 않는 것을 조심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부모님, 우리 자녀들, 우리 가족들 더 나아가서 우리 이웃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귀하고 복된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닫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잘 못합니까? 그것은 나중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은 내 코가 석 자고 지금은 내가 바쁘고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내가 좀 한가하면 내가 좀 기회가 생기면 내가 좀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하지만 나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 너무나도 잘 알듯이 없습니다. 나중은 없는 겁니다. 이번에 이사를 준비하면서 이삿짐을 좀 싸다 보니까 이사 올 때 나중에 써야지 하고 놔뒀던 것 대로 한 번도 개봉하지 않고 놔뒀던 거 다시 이삿짐에 집어넣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나중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 어머니 또한 우리 자녀들, 우리 가족들 사랑하며 섬기며 최선을 다해 사랑의 말을 하고 섬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그 어느 한순간도 미루거나 중단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매 순간순간마다 때마다 시마다 저희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그런 부모님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베풀어주셨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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