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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 (욥 42:5-6)

이제 우리가 욥기서의 말씀을 이번 주간에 읽게 됐습니다. 욥기서의 말씀은 처음 부분하고 마지막 부분에는 이야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좀 이해하기가 쉽지만, 중간 부분은 장황한 신학적인 변론들이 나오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고, 성경을 읽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중에 하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욥기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일어나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욥기서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왜 우리들의 삶 가운데 고통이 있을까 하는 이 질문은 굉장히 난제 가운데 난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해가 돼요.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이런 고통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고, 그냥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가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참 일어나지 말아야 될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매년 늘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떠오르는 질문이 무엇이냐면, 왜 하나님 이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신다고 한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계신 겁니까? 하나님이 선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야 될 텐데,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이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가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욥기서의 말씀이겠습니다.


욥기서의 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은 마귀와 같이 악랄한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다.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욥기서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아주 큰 유익이 되는 말씀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늘 좋고 행복하고 좋은 소식만 들렸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어려움의 연속인 것이고, 고통의 연속이고 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는 경험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발견하고, 또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어떠한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가라고 하는 것들을 이 욥기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배워나가는 이번 한 주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앞부분을 보면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욥을 비난하고 폄훼해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욥의 신앙생활의 근거가 무엇인가? 그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만일 하나님께서 그 복을 거두어 가버린다고 한다면, 그의 믿음이 가짜라고 하는 것이 순식간에 드러날 거라고 하면서, 이 사탄은 욥을 비난하게 된 것이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으로 하여금 욥을 시험하도록 허용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욥의 삶은 고난의 연속을 경험하게 됐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사탄의 말이 틀렸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 냅니다. 욥은 무슨 고백을 합니까? 욥기 1장 2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욥의 고백이 정말 놀라운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 공수래, 빈손으로 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이것도 공급해 주시고, 저것도 공급해 주시면서, 많은 것을 누리게 하셨는데,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빌려준 것이고, 청지기로서 살아가도록 맡겨놓은 것일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간다고 해도 불만입니까? 오히려 감사합니까? 예 감사죠.

지금 우리가 아파트 땅을 공짜로 얻어가지고, 주차를 열심히 잘하고 있는데 나중에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장을 회수해 갈 겁니다. 그러면 화를 내야 되나요? 신경질을 내야 되나요? 아니면 그동안 쓴 거 감사하다고 반응을 해야 할까요? 그렇죠! 우리 게 아니에요. 우리 것도 아니고 우리 땅도 아니고, 단지 우리가 잠시 이 비어 있는 이 기간 동안에, 이 기간이 쭉 계속됐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이 기간 동안에 우리로 하여금 사용하게 해 준 것뿐이고, 어느 날 가져간다고 하면,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이니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욥은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안 겁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게 내 게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다” 생각하면서,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줄로 믿습니다. 한번 자기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이 옷이 누구 겁니까? 우리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거예요. 내가 가진 모든 것, 내가 누리는 모든 것 은혜, 은혜, 내가 지내왔던 모든 삶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 모두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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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1장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욥기 1장 22절의 말씀에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과 아픔들 또한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되지도 않고, 우리가 불평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가운데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이번에는 욥의 건강을 빼앗는 것을 제안하게 되었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셔서, 결국 욥이 건강을 빼앗겨버려서 정말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보면서, 이 욥기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탄은 이렇게 공격을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탄이 행할 수 있는 그 바운더리(boundery)를 정해주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사탄이 이 세상에서 활개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탄의 움직임이 누구의 손바닥 안에 있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가 아니고, 하나님의 그 주권 안에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허용하심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사탄이 제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바로 욥기서의 말씀이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있는 겁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운더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무한대로 끝없이 그냥 아무런 한계 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바운더리 속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군대에 가게 되면 죽음의 훈련을 합니다. 저처럼 이렇게 편한 군대를 나온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공수부대라든지 특전사라든지 이런 데서 훈련한 사람들은 혹시 우리 교회에 그런 분 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신 것 같은데요. 그런 분들은 죽음의 훈련을 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훈련을 하는데, 그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훈련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교관들이 그 구대장이나 아무튼 조교들이 어디까지를 하면 안전하다고 하는 것을 안 상태에서, 그 죽음의 훈련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안전하게 훈련을 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종종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실제로 죽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해서 종종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그렇게 실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에 한계를 정하셔서, 우리를 그 안에다 집어넣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제가 군대에 갔을 때 그랬습니다.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게 되는데, 16주의 훈련을 받는데 들어가는 처음부터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평상시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가서 막 하루 종일 훈련을 하면서 뛰어다니면서 훈련을 받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마치 죽을 것 같아요. 그런데 딱 하나 소망이 있어요. 그 소망이 뭡니까? 모든 군인들의 소망 “무슨 일이 있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거죠. “16주면 끝난다”는 것이 정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들어왔을 때 막 힘들었지만, 그 끝나는 날짜를 세는 겁니다. 몇 년 몇 월 며칠날이면 끝난다. 그걸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이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견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 말씀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그런 일들이 있게 되겠는데, 그런 일들을 겪을 때 그러면 그냥 믿음을 포기해 버릴 것이 아니라, 이 고난이 끝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견디어 이기라고 권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욥기의 대부분의 말씀은 세 친구가 찾아와서 욥과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 욥기서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왔는데요. 세 친구의 이름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친구입니까? 웬수입니까? 위로하러 왔지만 위로하러 왔지만, 오히려 소금을 뿌린 웬수와 같은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이들이 말해준 이야기가 옳지 않아요. 이들이 한 말이 바른말이 아니라, 잘못된 게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 욥기서를 읽으면서 혼란스러운 겁니다. 이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말이, 웬수와 같은 이 욥의 마음을 후벼 파고 괴롭게 만들었던 그런 잘못된 사람의 말인데, 그 말을 우리가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과제가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죠. 욥기서에 기록된 엘리바스의 말, 욥기에 기록된 빌닷의 말, 욥기에 기록된 소발의 말을 읽으면서 반대로 생각해야 됩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 생각을 해야 됩니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죠? 웬수와 같은 사람들의 말이니까 거꾸로 생각해야 되나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한 말이 100%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 그 자체로서는 옳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못된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에요.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진리가 진리가 되지 못하고 거짓이 되는 때는 언제 거짓이 되나요? 때와 장소와 그 상황이 맞지 않으면 거짓말이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시편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내 발을 보호하실 거라고 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는데 그 시편의 말씀을 누가 사용합니까? 사탄이 사용해서 예수님에게 제안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리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하여 내 발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 보호해 준다고 했으니, 뛰어내리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 말씀이 사탄의 말이냐? 아니에요. 성경 말씀이에요. 성경 말씀인데 이 성경 말씀을 잘못된 상황 잘못된 경우에 잘못 적용할 때, 그 말이 진리가 되지 않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시험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망가지죠.


역시 똑같은 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상에게나 똑같은 말을 그냥 전해준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해주신 말씀이 다르고, 세례와 창기들을 향해서 들려주신 말씀이 다르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그 여인에게 해주신 말씀이 다른 거예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화로다 너여. 너희가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말씀을 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똑같은 메시지도 사람과 그 시기 경우에 따라서 이것이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거짓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오늘 아침에도 우리가 함께 나누었듯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메시지와 또 부모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메시지가 서로 달라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한쪽에서는 이것을 강조하고 있고 한쪽에서는 저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순 거짓말이요 엉터리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정반대로 생각해야 되는 말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 가운데는 진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실은 거짓이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진리가 99%인데 나중에 1%의 거짓말을 시키고 섞게 될 때, 그것이 거짓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진리의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짜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들을 다 종합하고 함께 묵상하면서, 적절한 메시지를 우리가 얻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들이 말한 것은 특별히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사람을 향해서 오히려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고 절망시키고 오히려 정죄하는 역할을 해서 이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이게 됐는데요. 이들에게 제일 부족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이 결핍되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하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는가? 사랑 안에서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죠.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부터 15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몰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이야기해 주어’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주어서, 그래서 영적으로 같이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해줄 때 어떻게 말해줘야 되는가? 사랑으로 이야기해 줘야 되는 사랑으로 이야기하지 아니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있다고 하겠습니다.

소발은 소발을 이야기한 게 무엇입니까? 소발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고통은 왜 오는가? 죄의 결과로 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 고통이 죄의 결과다. 이게 진리입니까? 거짓입니까? 고통이 죄로부터 온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이게 진리입니까? 거짓입니까? 진리예요! 인간이 죄를 지어서 고통이 오게 된 거예요. 탕자가 집을 나가서 고통을 당하게 된 거예요. 우리가 악을 행할 때 고통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하는 거 맞는 것이죠. 하지만 항상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고통이 다 죄의 결과냐?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겁니다. 욥의 경우도, 욥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렇고, 바울 사도가 고통을 당한 것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욕을 당한 그 모든 것들도 죄의 결과가 아니라, 주의 일을 하다 보면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하게 되는 일들이 있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소발은 부분적인 진리로 모든 것이 다 그런 양, 그렇게 오해해서 오히려 욥을 낙담하게 만들어버린 것이죠.


엘리후라고 하는 사람은 듣고만 있다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엘리후는 말하기를, 욥의 고통은 죄의 결과가 결과라고 하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 욥이 당하는 “이 고난이 긍정적인 목적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엘리후의 말은 역시 이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는데요. 왜냐하면 말은 해줄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들에게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들에게는 더 나은 중재자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되겠고요.

마지막 38장에서부터 42장 가운데는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말씀을 해주시죠. 하나님의 위험을 나타내는 그런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신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그러면서 사람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너희가 이것을 아느냐?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 이 세상의 온갖 이치들에서 질문을 던지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다 만드시고 조정하시는 건데, 사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특별히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두 개 나옵니다. 하나는 베헤못, 또 하는 리워야단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에요. 마치 공룡과 같은, 마치 어떤 그 상상 속의 동물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그 모든 것들도 사실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영역조차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욥은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욥이 잘못을 하고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대가 앞에 서게 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듯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나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난을 충분히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 앞에서 굴복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과 회개의 자리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이 욥을 회복시켜 주시는 이야기로 욥기의 말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욥기를 읽으시는 가운데 “우리가 얼마나 참 미약한 존재인가? 조그만 것 하나에도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우리가 이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조차도 너무나도 알기 힘든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며, 그러나 이런 우리들에게 소망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고 구원자를 베풀어주신 그 주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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