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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떻게 오는가 (마 13:31-33)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이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유대 민족들에게 소개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저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그렇게 소개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그 내 뒤에 오시는 바로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알곡은 모아서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쳐 넣을 것이다”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않으면,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그렇게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소개해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대 가운데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행보를 보면서, 세례 요한의 마음 가운데, 적지 않은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셨지만, 이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변화가 된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죠. 여전히 헤롯 왕이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고, 로마의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강압적인 통치가 유대 사회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롯 왕에 의해서,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애썼던 세례요한인데, 그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버렸고, 그리고 이 세상의 정권은 바뀌지도 않고,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 세례 요한의 마음 가운데 의구심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 선생님, 우리가 기다려야 되는 분이 선생님이 맞습니까? 우리가 기다려야 되는 그 메시아가, 우리 주님이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더 기다려야 됩니까? 예수님이 메시아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아마도 세례 요한의 마음 가운데 답답함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전히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을 때, 너무나도 답답해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그런 사람을 보내어서 질문을 던진 것이죠.


그런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해주신 대답이, 마태복음 11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 가운데 보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대답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곳저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맹인이 볼 수 있게 되었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곳에서 이렇게 벌어지고 있다고 알려주신 것이죠.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의 대화 가운데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의 말씀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기적을 베풀고 계시는데, 그 기적을 베푸는 것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쫓아내는 거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쫓아낸 거라고 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서 시작되고 있고, 저기서 시작되고 있고, 저기서 시작되고 있고,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고,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 복음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 힘들고 어려운 세상입니다. 너무나도 황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세상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천국의 “이미”와 “점진성”입니다. 천국이 이미 도달했고, 천국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우리가 눈을 들어서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보이기보다는, 정말 황당하고, 정말 참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모순 투성이의 세상인 것이죠. 악이 다스리는 세상처럼 보이는 겁니다. 악이 판치는 세상처럼 보이는 겁니다. 황당한 세상인 것이죠. 사악한 사람들이 재판을 하고, 오히려 의로운 사람은 고난을 당하고, 법과 정의를 말아먹는 사람들이 법을 이야기하고,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정말 선을 행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오히려 고통을 당하는, 황당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꾸만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실망감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이 세상이 바르게 잡혀질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언제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언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고, 도대체 언제 모든 세상들이 바르게 모든 것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기라도 한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들을 우리가 많이 던져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와 “점진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읽은 마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두 가지 비유가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이고, 또 하나는 누룩의 비유인데, 이 두 비유가 똑같은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그런 메시지입니다. 겨자씨가 무슨 씨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실은 그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씨 중에서 제일 작은 씨가 어떤 씨인가요?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적어도 겨자씨가 제일 작은 건 아닙니다. 겨자씨를 봤더니, 겨자씨가 요만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작은 씨도 있고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서, 이 겨자씨를 봐라. 이 겨자씨가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다”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과학적으로 정말 사실적으로 그렇게 작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표현인 것이죠.

유대 사람들은 작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할 때, “겨자씨만 한 게” 겨자씨를 통해서 작다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다라고 하는 것을 표현할 때 뭐라고 표현하죠? 콩알? 쥐방울? 도토리? 그렇게 표현해요. “이 도토리만 한 게” “이 쥐방울만 한 게” 사실 도토리 이만하게 크거든요. 그것보다 작은 것이 훨씬 많지만, 우리들이 늘 하는 관습적인 표현 가운데, “이 쥐방울만 한 게, 이 도토리만 한 게, 어디서?” 하면서 이야기하듯이, 유대인들은 늘 작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할 때, “겨자씨”라고 하는 표현을 많이 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겨자씨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는 겁니다.


겨자씨를 봐라. 이것이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너무나도 작은 씨앗인데, 이것이 땅에 심겼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씨에서 싹이 자라고, 그것이 점점점 자라기 시작하면, 큰 덤불이 되어서, 수많은 새들도 그 겨자씨 나무 위에 찾아들어, 거기서 보금자리를 취하고,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얻고, 그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자라나게 되는 것처럼, 처음은 미약해 보이지만, 도대체 이 조그마한 것이 무슨 능력이 있을까? 이 조그마한 것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참 이해가 안 되고, 소망을 두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그 겨자씨가 결국에는 큰 나무가 되어, 새들도 그 안에 둥지를 틀 수 있을 것 같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소망을 잃지 말아야 된다”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예요. 누룩을 넣어서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봤어요. 제가 어렸을 때 제 어머니께서 밀가루 반죽을 해가지고, 그 다라이에다가 밀가루 반죽을 해서, 그래서 거기다가 이스트를 넣고, 아랫목에 집어넣어 놓으면, 몇 시간 뒤에 그 조그마했던 반죽이, 이렇게 커지는 신기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빵을 만들어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그런 빵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역시 누룩도 마찬가지예요. 정말 작은 양의 누룩을, 그 밀가루 반죽 안에 넣었을 때,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이것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생각되었지만, 그것이 큰 반죽을 만들게 되고, 그래서 빵을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게 되는 것처럼, 천국은 무엇인가? 천국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대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단번에 모든 것을 완전히 뒤덮어버릴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완전히 다 박살 내버리시고, 저 악한 마귀들을 다 쓰러뜨려 버리고, 모든 것들을 다 끝장 내버리고, 악한 사람들을 다 짓밟아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한 나라가 이 세상에 세워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대일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세례 요한의 기대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는 미약하게 시작하는 것이죠. 별 볼 일 없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 것이죠. 우리는 늘 단번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꿀 만한 그런 어떤 획기적인 것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을 빼려고 해도 30일 만에! 공부를 해도, 단 몇 주 만에! 그 족집게 과외에서 무엇인가를 한꺼번에 해버리려고 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천천히 정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온 세상을 뒤집어 놓는, 엄청난 결과로 바뀌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늘 우리들에게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만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 이렇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가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이렇게 성장한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실망하지 말고, 낙망하지 말고, 정말 신실하게, 내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되는데, 그러한 우리들의 노력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작전은 무엇이냐 하면, 빨리 되지 않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고, 부정적인 것에 집중을 하게 만들어버리고, 그래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게, 사탄이 우리들을 속이고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누구를 속이려고 했었는가 엘리아 선지자를 향해서 그렇게 유혹을 했던 것이죠. 엘리야 선지자의 마음 가운데는 자기가 바 선지자들과 대결에서 승리했으면 이제 모든 바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여버렸으니, 이제는 온 세상이 다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이제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며, 이제는 주님을 찬양하는 그 나라가 될 거라고 하는 그런 기대와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엘리아의 눈에 보인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버티고 있는, 이세벨 왕비의 그 완악한 마음을 바라보게 될 때, 이 엘리아의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죠. 하나님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 혼자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빨리 변화가 되지 않는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이 엘리아의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죠.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사의 사환도 도단성을 둘러싸고 있는 적군들을 바라볼 때, 과연 우리와 같이 미약한 사람들이 이 적군들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선지자여, 큰일 났습니다. 우리 주변에 온 세상에 아람 군대가 다 진을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들과 함께한 자들보다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사탄은 누구를 또 속이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속이려고 했던 것이죠. 사탄은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천하 만국을 보여주면서, 이 천하 만국이 전부 나에게 절을 하고 있고, 이 온 세상이 내 지배 하에 있으며, 이 세상의 왕이 바로 나니까, 혼자 그렇게 하지 말고, 나한테 굴복하라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될 것인가? 큰 모습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작은 것,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실망하지 말고,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씨를 심는, 믿음으로 또한 밭을 갈고, 믿음으로 눈물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우리 주일 학교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악한 상황에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는 아이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기가 어렵고, 예전에는 북 들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수많은 아이들이 따라 돌아오게 됐지만, 지금은 한 영혼을 데려오는 것이 힘들고, 그 한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힘들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지금 주일 학교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열악한 상황이어서, 이러다가는 주일 학교가 고사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위기감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봐야 됩니까? 겨자씨를 봐야 돼요. 노력을 봐야 돼요. 겨자씨 하나가 심겨지고, 누룩이 밀가루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것이 아무 흔적도 없어 보이지만, 결국에 그것이 크게 자라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거라고 하는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봄이었어요. 우리 주차장 만들고, 그리고 저기 앞에다가 조그마한 화단 같은 거 만들어놓고, 거기에 나무를 몇 개 심어놨는데, 우리 운전을 해 주시는 기사 집사님께서 어느 날 그 화단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씨를 거기다 뿌리고 있었어요. 유치원에서 나눠준 씨라고 하면서, 그 씨를 거기다 뿌렸어요. 뭘 심었나? 근데 그 뒤로 가봤는데 아무런 흔적도 없어요. 그다음 주에 갔는데도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뭘 심었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가봐요. 뭐가 비어 있어요? 코스모스가 피었어요. 백일홍이 핀다고 그래요. 꽃들이 피어난다고 그래요. 봄에 심을 때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는데, 거기에 꽃들이 피어나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그 엄청난 결과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실망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심지만 하나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힘은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고린도전서 3장 6절에서 7절 말씀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 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니라.” 우리가 주일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게, 도대체 이 험한 세상 가운데서, 학교에서 온갖 잘못된 그런 이야기들과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곳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오늘 주일 학교 공과에서 단 몇 분 전해준 그 이야기가 무슨 힘이 있을까? 내가 심은 이 씨앗이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을까?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고, 그 어떠한 확신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씨를 심고, 또 물은 또 다른 사람이 주고 하는데, 결국 기르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대로 받는 상이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소망을 가지고 일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에 우리를 향해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 한번 따라 하면서, 옆사람에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옆사람 보고 하세요.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사탄도 낙망하지 않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지옥 자식을 만들기 위해서 사탄도 낙망하지 않고 있어요. “우리가 악을 심으매,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하면서, 사탄도 낙망하지 않고,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 아이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때,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이 사탄과 마주하면서 싸우는 것이, 마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워 보이지만, 주님을 신뢰하며, 물맷돌 5개를 돌리면서 골리앗 앞에 나갔던 그 다윗처럼, 오늘도 우리 아이들 내 힘과 능력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지만, 내 힘과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악의 열매를 거두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며 복음의 씨앗을 잘 심는, 우리 교사 선생님들, 또 이 모든 사역 가운데, 우리 온 교우가 온 교우가 함께 동참하고, 온 교우가 함께 기뻐하며 같이 눈물 흘리고 기도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복음을 심어주는 그런 일에 우리 모두가 앞장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심습니까? 어떻게 복음을 우리 아이들에게 넣어서 이 아이들이 잘 자라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요? 농부에게 가서 배워야죠. 농사짓는 거 보니까 쉽던가요? 어렵던가요? 어렵더라고요. 제가 왜 맨날 상추 심는데, 상추가 안 자랄까? 심어만 놓고, 나중에 다 자랄 때까지 기다리고 , 아무것도 안 하니까, 다 망치는 거예요. 이 앞에서 농사짓는 사람 보니까요. 매일매일 나와서 아침부터 나와서 계속 돌보고 있어요. 씨를 심어놓고, 물 주고, 또 솎아주고, 늘 밭에 와서 이 식물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노심초사하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많은 정성을 쏟을 때, 이 식물들이 잘 자라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그냥 성의 없게 심어버리고 끝낼 것이 아니라, 이 아이 한 아이 한 아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될 텐데, 말로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 16절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사로 부르신 것은 한 영혼을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것인데,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시고 또 가르치도록 해주셨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며, 이 아이들이 나중에 위대한 선교사들이 나오고 위대한 목회자들도 나오고 위도한 평신도 지도자들도 나오고, 온 세상을 바꿀 만한 그런, 나는 씨 하나 조그마한 걸 심었지만, 그러나 엄청난 열매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나타날 것을 기대하면서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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