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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사 6:9-13)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목격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명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꼬?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이사야 선지자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원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사명에 믿음으로 반응했다고 하는 그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바로 그 뒤에 있는 내용인데요. 그렇게 자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야 될 건가를 들려주신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야, 너는 가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9절 말씀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전해야 될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라고 우리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듣기는 듣지만 무슨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그 뜻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할 것이고, 눈으로 보겠지만 그 눈으로 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선언하라고 하는 그 메시지를 이사야 선지자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를 전하게 하는 그 목적이 그다음 절에 설명되어 있는데요.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은 약간 불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기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라. 그런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민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을까 봐, 절대로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라. 참으로 놀라운, 그런 예상치 못한 말씀을 우리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들고, 돌아오게 만들고, 구원받게 해 주시겠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면, 저 이스라엘 민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까 봐, 그들이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려라. 멸망하도록 만들어 버려라. 그들이 결코 회개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지 약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하게 만들고, 그래서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인데, 놀랍게도 이 선지자의 역할은 정반대의 역할을 수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이 전혀 깨닫지 못할 말을 말하고, 그들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막아버리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만 같아서, 이 말씀을 읽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면서 이 구절을 가지고 굉장히 씨름을 많이 했는데요. 수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런 의견 저런 의견들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셨다고 하는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을 닫아버리셔서, 절대로 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완전히 내 팽개쳐 버리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기 때문에, 굉장히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해 버리고,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죠.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정반대의 말씀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들어 버리시고, 눈을 막아버리시고, 귀를 닫게 만드시고, 깨닫지 못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멸망시키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불편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중립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저 사람들 내가 싫어해. 저 사람들은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저 사람들은 내버려 둬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지금 이사야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서 1장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어떻게 떠났는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종교적으로 떠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종교적인 그 행위들은 계속해서 진행이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규정하셨고, 죄를 지으면 속죄제를 바치라고 규정하셨고, 번제를 드리라고 규정해 놓으신 그 말씀에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고, 초막절을 지키고, 속죄일을 지키라고 하는 그 말씀에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하나님 앞에 안식일을 지켰고 또 초막절을 지키기도 하고, 또 속죄의 날을 지키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그 정하신 그 절기들을 그대로 다 지켰어요.

그러니까 겉으로 본다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철저한 예배 중심의 삶, 번제도 드리고 속죄제도, 드리고 절기도 드리고 대회로 모이고 총회로 모이는 그런 신앙적인 모습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민족을 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번제를 가지고 오지 말라. 나에게 속죄제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희더러 번제를 드리라고 내가 이야기했느냐? 내가 이런 것을 싫어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는 내게 희생 제사를 가져오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에요. 예배드리고 나서, 돌아가서는 죄를 계속해서 짓는 겁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압제하고 착취하고, 더러운 피를 흘리며 이득을 위해서는 욕심을 부리면서, 더러운 죄를 지으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죄를 지어도 괜찮아. 왜냐하면 우리는 안식일이 되면, 하나님을 찾아갈 것이고, 제사를 드릴 것이고,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또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에 와서 제사드리고, 또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는 내게 제사를 드리러 오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을 떠나 버렸던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그 목적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목적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는 겁니다. 문자적으로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율법에 규정한 대로 완벽하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규정한 대로 완벽하게 정결 의식을 지켰습니다. 율법에 규정한 대로 완벽하게 절기들을 다 지켰습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그 목적을 망각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속죄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냥 속죄제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 사실을 뉘우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데, 그런 마음이 없는 거예요.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고, 그래서 면죄부를 받았으니까, 나는 이제 용서받은 거야. “나는 종교적으로 이제는 깨끗해.”라고 하는 생각 가운데서 또다시 나와서 똑같은 죄를 반복하고, 사람들을 착취하고 압제하고, 갑질하는 그런 일들을 반복하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신앙을 받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를 그대로 들여다보는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회자로부터 일반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열심을 내는 것 같고, 정말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계명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거죠. 종교적인 열심은 내는 것 같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종교적으로 섬기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던, 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해주시고 계시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버리고, 너희들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게 만들 거야. 너희들이 돌아와 회개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충격적인 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의 문자적인 그 규정들만을 철저하게 지켰을 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그저 종교적인 행위만을 반복하고 있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이미 닫아버렸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에서는 이미 귀를 닫아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괜찮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이미 귀를 닫아버리고,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바로 지금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거울을 들여다 보여주듯이, 너희들의 지금 이 모습이 귀를 막아버린 것이고, 마음을 닫아버린 것이고, 깨닫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서 들려주시는 그런 메시지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문자적인 표현으로서는, 내가 너희들의 귀를 막아버리고 마음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그래서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하는 그런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정말로 멸망당하게 될 것을 원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말씀일까요? 제발 이제라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이제 너희들은 끝났어. 이제 내가 너희들의 내 마음을 닫아버릴 거야. 회개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막아버릴 거야. “너희들이 돌아와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걸 내가 원치 않아.”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무엇이냐면, 그 표현과는 달리 “제발 좀 회개하고 돌아와라.”라고 하는 그런 말씀이에요.

표현은 너희들의 마음을 막아버리고, 깨닫지 못하게 하고, 다시는 구원받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말씀의 의미는 정반대로 “회개하고 돌아와라. 제발 너희들이 그렇게 그런 악한 길로 가지 말고, 제발 깨닫고, 제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라”라고 하는 더 강력한 권고의 말씀이라고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종종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겁박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겁박을 해보셨는지 모르겠고, 아마 어렸을 때 부모님들로부터 그런 겁박을 당하면서 자라셨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교육학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면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부모님들이 말을 듣지 않는 자녀, 속 썩이는 자녀를 향해서 외치는, 간혹 가다 극약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죠? “너, 나가. 우리 집에서 나가. 넌 이제 우리 자식 아니야. 다시는 내가 너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을 거야. 꼴도 보기 싫어. 나가.”라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그런 말 해봤습니까? 안 해봤습니까? 그런 말 들어보셨어요? 안 들어보셨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들어봤어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그 어린 나이에, 나가면 어디 갈 데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나? 당황하면서, 나를 가장 사랑해야 될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누가 우리를 받아줄 것인가?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고 있으면서, 펑펑 울던 그런 기억이 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건 우리 부모님이 나를 미워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내가 바른 사람이 되고, 정말 부모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극약 처방을 하는 말이고 “너, 나가. 다시는 내 아들 아니야.”라고 말하는 그 이야기는, 그 말을 하는 부모의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잘못했어요. 제가 다시는 이런 나쁜 짓 하지 않을게요.” 이제는 부모님의 말씀 잘 듣고 이제는 잘 살겠다고 하는 그 고백을 듣고 싶어서, 이런 극약적인 처방을 늘 하는 것이죠.

어쩌면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냉정한 어떤 경찰관처럼, 어떤 재판관처럼,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그것 때문에 어떠한 고통을 당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냥 너는 불합격. 너는 징역 하면서, 아무런 감정 없이 선포해 버리는 그런 제3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그런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베드로후서 3장 9절의 말씀에 보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도 멸망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가 잘못 하나님을 섬겼구나. 우리가 죄악의 길로 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마치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서 “40일이 지나면 너희가 멸망할 것이다.”라고 선포해 주시는 것처럼, 그런 극약적인 처방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사탄이 불어넣어 줄 생각이 무엇이냐면, “아,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관심도 없나 보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 보다.”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어떠한 형편에서도,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함께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한다면 그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그 엄청난 허물과 죄악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손들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려고 하는 치열한 결단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그냥 값싼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서는 심각한 죄를 계속 짓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뻔뻔하게 말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지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런 그런 파렴치한 신앙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고 하는 그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뻔뻔하게 인생을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그러한 반성도 전혀 없이, “이거 왜 이래?” 뻔뻔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그 허물을 인정하지 아니하면서, 나는 교회 다니니까 됐다고 말하는 것이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처럼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마다, 이사야처럼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심령들마다,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는 심령들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회개 없이 뻔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한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 매일 순간순간마다 주님 앞에 믿음으로 회개하는 가운데 나아가고, 주께서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이사야 선지자의 그 선포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타락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사야 선지자가 전해 주었던 그 말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했지만, 그런데 회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대로 이루어진 하나의 예언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했고,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해서, 결국은 모두가 다 죄악의 길로 가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그런 타락의 길로 걸어가게 된 거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내용이 이사야서 1장 3절 말씀에 나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 그대로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소망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사야서 6장 13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중에 십 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주셨지만, 회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림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멸망당하고 단 한 사람도 남아있는 것 같지 않고, 완전히 다 멸망할 것 같은 그런 황당한 상황 가운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러나 그 가운데 그루터기를 남겨 놓으시겠다고 하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사무실 앞에 어떤 나무가 하나 큰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야를 가려서 좀 잘라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떤 장로님이 오셔서 완전히 그걸 잘라버리고 완전히 찍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가 되니까,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만, 또다시 큰 나무가 되고, 죽은 것 같은데 뿌리가 남아 있고, 그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면, 다시 생명이 자라게 되는 것이 그게 식물의 원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 가운데서도, 그냥 완전히 심판해 버리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루터기를 남겨두고, 그리고 다시 한번 소생시키는 그런 예언을 해주고 계시는 것인데요. 그 그루터기가 누구냐면, 바로 예수님이시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생명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들, 사실 우리들 가운데서 소망이 누가 있느냐면, 아무도 없어요. 이스라엘 민족들만 이렇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이스라엘 민족들만 그렇게 나쁜 길로 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그 시야에서 본다고 하면, 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목사님들도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늘 넘어지고, 늘 죄악의 길로 가고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신 그 구원의 계획이 여기 이사야 6장 13절의 말씀 가운데서도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머지않으면 이제 성탄절이 다가오게 되는데요. 성탄절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소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 무엇과 같은가? 다 잘린 나무와 같아요.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들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가고 회개하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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