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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시는 하나님 (창 16:6-14)

오늘 우리는 광야라고 하는, 참 메마른 땅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참 당황스러운 채, 불안해하고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살펴보게 됐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일까요?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죠. 도시는 강을 따라 발달하게 되어 있고, 물이 있고, 풀이 자라고, 여러 가지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살게 되어 있는 것이지, 광야처럼 메마른 곳, 풀도 물도 별로 찾을 수가 없고, 먹을 것도 찾을 수 없는, 구할 수 없는 그런 광야라고 하는 곳은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어려운 곳이라 하겠습니다. 살기는커녕 여행하기도 정말 힘든 곳이 광야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광야에 어떤 한 여인이 홀로 와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하갈이라고 하는 여성인데요. 이 하갈이라고 하는 여인은, 어떻게 해서 이 광야 한가운데,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이 삭막한 곳에 내 팽개쳐 있게 되었던 것일까요? 더군다나 이 하갈이라고 하는 여인은 홀몸이 아니라,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임산부가 정말 편안한 곳에서, 참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가운데, 아이의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정말 좋은 환경 속에 있어야 할 텐데, 어쩌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런 황량한 광야 한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장면이 정말 힘든 장면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주인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로부터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이야기를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어떤 상황인지 한번 되짚어본다고 하면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 사이에 아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기다려도 아기가 생기게 되지 않자, 어느 날 사래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제안을 한 겁니다. 내 여종이 있는데, 내 여종 하갈이 있는데, 이 하갈을 씨받이로 해서, 아이를 얻으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제안은 참 불신앙적인 제안이죠. 윤리적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나온 제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래의 가정 가운데,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거든요. 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친히 들려주셨는데, 그 아들을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이 아무리 지나가도, 아이가 태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기다리다가 지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다림과 아주 큰 연관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요. 기다림은 어떻게 가능한가?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고, 믿음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기다림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기다린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거라고 하는, 그러한 믿음과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기다리지 못합니까? 왜 내가 분노하고, 왜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왜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고, 그것을 믿지 못할 때에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죠. 이 사래라고 하는 여인, 그리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믿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믿음은 언제나 흔들렸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현실을 바라보면 믿음이 흔들리고, 그 믿음이 참 요동칠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의 연약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법, 사래가 제안한 그 방법을 통해서, 아들을 얻고자 했고, 그래서 하갈이라고 하는 사래의 여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갈이 임신하게 되어서 이제는 자신들이 이룬 목적을 이루었을까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임신을 하지 못한 주인 사래라고 하는 여주인과 그리고 임신을 하게 된 사래의 여종 하갈 사이에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래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볼 때 너무나도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너무나도 싫은 겁니다. 너무나도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게 됩니다. 행동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 그 모든 것 하나가, 어쩌면 임산부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임산부에게는 정말 필요한 요청일 수 있겠고, 당연한 몸짓이었을 텐데,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그 사래의 눈에는,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정말 짜증이 나고, 분노가 나고, 정말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살해는 그 여종 하갈을 학대해 버렸습니다.


주인 사래의 학대를 참지 못한 여종 하갈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곳이 지옥과 같은 곳인 것이죠. 이런 지옥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 어디로 가는가? 광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인가? 광야는 사람이 살 때가 아니에요. 광야는 어떤 곳인가? 거기에서는 잘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에요. 정말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왜 광야로 도망갑니까?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광야보다 더 못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광야로 도망가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광야로 들어가게 되는 그 순간, 이제는 광야보다 못한 곳에서, 지옥과 같은 곳에서부터 내가 벗어났으니까, 이제는 해방이고,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제는 괜찮게 되었다”가 아니라, 광야로 가서는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주인의 집에 있을 때는 먹을 것을 먹을 수가 있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광야로 들어가게 된 이상, 거기서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숙식을 해결할 수 없는, 정말 고통스러운, 이러다가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아주 심각한 위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어쩌면 우리들이 인생 가운데서 선택하는 이런 선택들이, 바로 이런 어리석은 선택들이 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정말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리는 결정들, 고통 가운데 내리는 결정들은 선하고 좋은 결정들이 나오는 게 아니라,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러운 곳으로 가는 결정들을 하게 될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왜냐하면 이곳을 달아나는 것이 이것을 피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가 되고, 가장 원하는 것이 될 때에, 피하는 곳이 그 어딘지 생각해 보지 아니하고, 나가면서 더 어려운 곳으로, 광야와 같은 곳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선택해야 된다고 한다면, 참고 인내하는 선택이 바른 선택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회피하고 도주하는 그런 선택들을 하게 될 때, 그런 선택의 결과는 무엇인가? 좋은 선택이 아니라, 결국 광야에 내몰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학대를 견딜 수 없었던 이 하갈은, 그 학대를 피해서 도망가게 되었지만, 그러나 결국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가? 광야라고 하는 것이고, 그 광야에서 자기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고, 자기 뱃속에 있는 아기마저도 죽을 수밖에 없는, 더 큰 위험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런 정말 풍전등화와 같은 곳에 있던, 그 하갈이라고 하는 이 여인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주셔서, 그를 위로해 주시고 말씀해 주시며, 그리고 하갈에게 명령을 해주시는데,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너를 학대하고, 너를 괴롭게 했고, 너를 힘들게 했던, 바로 그 여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6장 9절에서 10절까지 다시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내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의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내 시를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말씀해 주신 것이죠. 먼저 이 천사가 하갈에게 했던 말은, 정말 하갈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가라고요? 다시 자기를 학대했던 여주인 사래에게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싫어서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 천사가 했던 말은 그다음 말이 하나의 약속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내 뱃속에 있는 그 아이를 잘 낳게 될 것이고, 그 아이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해준 것입니다. 이 하갈은 왜 도망쳤는가? 내가 주인의 집에 있다가는 나도 죽을 것이고, 이 아이도 죽을 것이고, 도무지 이곳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도망해 버렸는데, 그런데 정작 도망간 그곳이 자기도 죽고 자기 아들도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천사가 들려준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아니라. 주인에게로 돌아가야만 할 것이고, 그 주인의 집에 돌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거기서 학대를 받아 네가 죽게 되거나, 네 아이들이, 네 아이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실 것이고, 그래서 그 아이가 큰 큰 민족을 이루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을 들려주게 되었을 때, 하갈은 다시 그 옛날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게 했던 여주인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는 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6장의 말씀입니다.

하갈이 천사의 말을 듣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여주인 사래가 버티고 있는 그 집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까요? 여주인 사래가, “아이고, 내가 너무 심했구나. 내가 너무 심해서, 이 여종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구나” 하면서, 사래가 좀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는 하갈에게 잘 대해줬을까요? 성경에는 전혀 그런 부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을 텐데요. 사래가 그 이후로 잘해줬을까요? 아니면 별로 달라진 게 없을까요? 아마 제가 생각하기에는 달라진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여전히 그 여주인의 그 눈초리는 너무나도 매섭고, 너무나도 정말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여주인 앞에서,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그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하갈이 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여종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움이 계속될 것이고,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받았을 것이고,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 그 집에서 살아가야만 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왜 다시 돌아갈 수 있었고, 그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기간을, 이 하갈이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사가 들려주었던 놀라운 약속입니다. 네가 여주인의 집에 돌아가게 되면 거기서 네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여주인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된다고 한다면, 거기서 네 아기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네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이고, 또한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장성하게 될 것이고, 또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이고, 이 아이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았기 때문에, 상황이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같은 장소지만, 상황이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곳이 전에는 전혀 견딜 수 없었고, 1분 1초도 견딜 수 없었던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곳이 어떤 곳이 되었는가? 전혀 견딜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조금만 참고 인내하면 되겠다고 하는 참을 수 있는 곳이 되었던 것이죠. 그 변화에는 바로 천사가 들려준 말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래의 학대를 당하면서, 이러다가 죽겠구나. 내 아이도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아무리 이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기가 걱정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큰 민족이 될 거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갈은 그 집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아이는 낳았고 아이는 잘 자라게 되었고, 그리고 이 아이가 큰 민족이 되어가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었던 것이죠. 변한 것도 아무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죽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지옥이 아니라, 그래도 견딜 수 있는 삶의 현장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절망이 아니라, 마지막이 고통이 아니라, 마지막에는 이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고, 큰 민족이 이루어지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견디게 된 것이죠.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보다 보면, 라이브로, 생중계로 보면 간이 조마조마하고, 그리고 안절부절못하고 하면서, 야 정말 긴장감이 굉장히 많이 상승합니다. 제 아내는 축구를 좋아하는데요. 축구를 틀어 놓고 틀어 놓고, 안 봐요. 저는 저는 집중해서 축구를 보고 있는데, 제 아내는 축구를 틀어 놓고 저 옆에 가서 설거지를 합니다. 저 옆에 가서 다른 일을 합니다. 축구를 보라고 하면, 안 봐요. 왜 너무나도 떨려가지고, 못 보겠다는 거예요. 안절부절못하는 거죠. 생방송을 보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결과를 보고, 그 스포츠 중계를 다시 보게 되면, 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게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아 저런 위험한 순간이 있었구나! 저러다가 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저걸 이겨내고, 그래도 승리했구나! 그래도 금메달을 땄구나! 그래도 1대 0으로 이겼구나. 그래도 우리가 이겼구나. 그 결과를 미리 다 알고 본다고 한다면, 중간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렇게 크게 긴장되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만화 영화 같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신데렐라 같은 그런 영화를 보게 되면 계모가 신데렐라를 엄청 괴롭히잖아요? 그런데 그 괴롭히는 것을 보면서, 막 분노하고 막 그럽니까? 우리 아이들은 그래요. 보면서, 보면서, 막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내용 이미 다 알아요. 신데렐라가 지금 저렇게 고생하고 있지만, 그러나 역전될 거야. 지금 저렇게 엄청나게 힘들게 살지만, 그러나 곧 바뀔 거야.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의 편안함을 가지고, 그 신데렐라가 하는 그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죠.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파리 올림픽에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혹시 듣고 가셨습니까? 펜싱 사브레에서 오상욱 선수가 우리 파리 올림픽 선수단 중에서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랑 시차가 안 맞으니까, 아마 우리가 자고 있을 때 경기들이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그 소식을 듣고, 오상욱 선수가 얼마나 잘했을까 하면서 펜싱 경기하는 것을 봤는데요. 1라운드 끝나는데, 몇 대 몇으로 이기고 있었냐면, 8 대 4로 이기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2라운드가 시작이 돼서, 또 경기를 막 하는데 14대 5까지 점수를 많이 확보해 놓은 거예요. 아주 쉽게 이겼구나. 아주 쉽게. 15점을 따면 이기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제 1점만 따면 이기는 거예요. 14점까지 땄고 상대편 선수는 5점밖에 못 땄어요. 그러니 당연히 이길 것 같은데 보니까, 상대편 선수가 잘해요. 6점 7점 8점 9점 해가지고, 몇 점까지 올라갔는가? 11점까지 올라간 거예요. 비디오 판독을 계속하면서, 비디오 판독을 해서 자꾸만 상대편 선수들한테 점수를 주는데, 막 점수가 4.5점 막 올라가더니만 11점까지 연달아 계속 올라가는 그 모습을 보고, 그 선수가 관중들을 향해서 막 응원을 하라고, 야… 들여다가 질 가능성도 있었을 거, 그 현장에 있어서는,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이러다가 몇 점까지 주고 이길까? 그게 우리 제 관심사였습니다. 이긴 걸 아니까요. 아무리 점수를 많이 내줘도, 긴장이 정말 많이 됐겠는데! 쫄깃쫄깃했겠는데! 하면서, 결국 이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왔습니다. 결과를 안다면, 현재 고난은, 고난이 아닌 것이죠. 오히려 더 흥미로운 것이고, 오히려 더 재미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놀이기구가 바로 그런 것인데요. 우리가 청룡열차를 타고 바이킹을 타고 번지 점프를 하고, 이런 것들은 보면 정말 무서운 것들이에요. 무서워서 잘 못합니다. 제가 그런데 뒤집어지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막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이 돈 내고 타요. 왜? 이게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하는 확신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정말 스릴을 만끽하면서, 결국에는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스릴을 만끽하고 나올 거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나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무엇인가? 놀이기구예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즐거움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에서부터 39절의 말씀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례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다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안타깝게도, 놀이기구를 타다가 줄이 끊어져서, 사고가 생기고 다쳤다고 하는 뉴스가 들립니다.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고가 일어나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늘 뉴스를 통해서 듣게 되는데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줄은 끊어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그 사랑의 손은 절대로 우리를 놓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위험한 라이드를 타고 다닐 때, 이 세상의 고통의 현장을 우리가 지나갈 때, 이것이 우리를 죽일 것만 같고, 우리를 완전히 박살 내버릴 것만 같고,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일들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우리를 꽉 붙들고 있는,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기억하면서, 그 어떠한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늘 속이게 되는 것이죠. 마치 돈이 전부인 것처럼, 성공이 전부인 것처럼, 인정받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칭찬받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소망하던 것이 무너지거나, 우리가 열심히 투자했던 것이 망가져버리거나, 내가 정말 애쓰고 힘쓰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버릴 때, 내 인생이 끝난 것만 같고, 내 인생이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여줄 때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건강이 무너지고 집이 빼앗겨버리고, 나의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실지, 우리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결국엔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온 세상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그 소망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하갈은 자기 여주인 사래가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갈은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갔는데 그 도망간 곳이 더 좋은 선택인가 더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이곳이 지옥이고, 이곳만 벗어나면 지옥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곳을 벗어나면 더 큰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게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인 것이죠. 우리는 광야로 도망가는 선택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여기에 있게 해 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일을 만나게 해 주셨는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연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고 계시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님께서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일을 경험하게 해주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계시는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가지고 계신 계획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믿음의 고민들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행히도 하갈은 천사를 만나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요. 상황은 바뀐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 상황을 견딜 만한 믿음의 담력은 없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견딜 만한 힘을 얻게 된 겁니다. 오늘 이 하갈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충분한 영적인 교훈을 주기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이러한 상황을 늘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다 때려치우고 싶다. 이곳이 지옥이니까 벗어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이런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의 말씀에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가시면서, 이 제자들을 위해서 하는 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이 제자들을 빨리 이 세상에서 빼내주세요. 하나님이 이 제자들을 이 정말 죄가 많고, 정말 고통이 많은 이곳에서부터 빼내어 주셔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이 이곳에 있으면서, 이곳에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죄악에 빠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해달라고 한 것이죠.


하갈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나타났으면 좋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하갈에게 했던 그 말씀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또 들려주고 계시는 것이죠. 이 하갈에게 들려주었던 메시지와 똑같은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며,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주 안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마지막 그 장면을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그 상황만 볼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영광의 면류관으로 우리에게 씌워주시고, 하나님께서 승리의 나팔을 불어주시며, 우리에게 영화롭게 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마지막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갈은 천사를 만난 후에 그 하갈은 하나님을 표현하기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 두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에요?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죠. 우리 꼬마 아이들이 자전거를 배울 때 엄마 아빠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아빠 자전거 놓지 마. 놓지 마. 지금 자전거를 타고 가야 되는데 놓지 마 놓지 마. 벌벌벌 떨면서 놓지 마. 자꾸만 뒤를 쳐다보면서 아빠가 붙잡고 있는지, 엄마가 붙잡고 있는지 자꾸만 보려고 하면서 페달을 밟지를 못하고 있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엄마 아빠들처럼 우리를 붙잡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켜보시고 살펴보시고, 그리고 어느 순간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사랑의 손길로 만져주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살피시는 걸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손으로 붙잡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만한 거룩하고 완벽하고 깨끗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늘 잘못을 해요. 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자꾸만 거부하고 밀어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대로 놔두면,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래서 우리들의 죄를 말갛게 식히시며 우리에게 주목하고 계시는 것이죠.


우리에게 주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울부짖을 때 외면하셨어요. 우리를 붙잡기 위해서 예수님을 붙잡는 손을 놓으신 것이죠. 그 놀라운 사랑,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가운데 앞에 펼쳐지는 그러한 모습들, 조그마한 것들 때문에 무너질 게 아니라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담대하게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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