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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 (창 2:18-25)

성경의 이야기들을,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중요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볼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하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그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마다, 그 만드신 것을 보시며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만드신 것을 보면서 너무 좋다고 그렇게 표현해 주고 계시는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가운데 딱 하나 보기에 좋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한 게 그게 무엇일까요?

오늘 읽은 말씀 창세기 2장 1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람 첫 사람 아담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다고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을 아담의 갈비뼈를 이용하여, 그래서 하와를 만드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창세기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것저것 만드시다가, 만들어놓고 보니까, 다 좋은데, 그런데 사람을 만들어 놓은 걸 보고, 뭔가 부족한 게 느껴져서, 서둘러서 그 아내 하와, 돕는 배필을 만드셨다고 그렇게 느낌이 드십니까? 마치 하나님이 어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만들다가 보니까, 뭔가 부족한 게 있다고 느껴서, 그래서 하와를 만드신 것이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좀 약간 하나님의 “하나님성”이 약간 의심이 되잖아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온전하신 분이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만드신 그 세계를 보면서, 뭔가 부족해서 무언가를 추가로 만들어야 하는 그 모습이, 어쩌면 우리 인간들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서, 약간 이상하다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은 완벽하지 못한 것이죠. 사람은 아무리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계획을 아무리 잘해도, 실수하는 게 발생하고,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실수하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번에 저희가 사택을 리모델링하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까, 우리 윗집 아랫집에서 층간 소음이 너무 심해요. 한밤중에 2시 3시에 막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청년들이 또 막 러닝 머신을 타고, 그래서 밤중에 잠을 자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컴플레인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쉽지 않아서 이번에 주택으로 이사하게 됐는데요. 주택을 구입하고, 그것을 잘 리모델링해서 들어가기 위해서, 리모델링 공사를 하게 됐는데, “여기는 이렇게 만들어주세요.” “여기는 저렇게 만들어주세요.” 머릿속에 계획을 하면서, 이 리모델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말하고, 저렇게 만들어달라고 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줬어요.

그런데 만들어준 그곳에 가보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현관에 좀 앉아서 신을 신을 수 있는, 그런 벤치 같은 것을 만들어 달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꼭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만들어 달라고 얘기했는데, 정작 만들어놓고, 가보니까 현관이 너무 작아서, 너무나도 답답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떼 달라고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떼주세요.” 이게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었는데, 보기에 안 좋았어요. 사용하기에 불편할 것 같았어요. 너무나도 좁아서,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만들어 놓고 다시 떼야만 했어요. 이것도 이걸 이렇게 만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었지만, 만들어놓고 보니까, 실물을 보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또 마음이 바뀌어서, 이렇게 바꿔야만 하는, 사람의 계획과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어놓고 실망하고, 계획해 놓고 “이게 아니구나” 생각하고, 또 어떤 일을 해놓고, 이렇게 했으면 안 되는데, 후회하고, 그래서 늘 늘 실망하고, 늘 안타까워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들처럼 실수하고, 무엇인가 만들었을 때 부족해서, 그래서 땜빵을 해야만 하는, 그런 하나님인가?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이라고 보시지 않는 것이 옳을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그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완벽하신 분이시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온전한 섭리와 계획 가운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동물들을 만들 때에도 암수를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그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남자만 우선 만들어 놓고, “아, 이게 안 됐네. 이게 잘못됐네. 뭐가 문제가 있네.” 해서, “나중에 부랴부랴 수선하고 만드셨다”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2장 18절 말씀에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할 수도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표현을 통해서, 남자가, 이 사람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해서, 그래서 하와를 만들었다고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어 사는 그런 삶이 정상적이고 축복이라고 하는 그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서, 그렇게 사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아이고, 이것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것이고, 이것은 거룩하지 못한, 그런 너무나도 저급한 모습”이라고 그렇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렇게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는, 아주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혼자 사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정을 이루어서 이렇게 살고, 그리고 자녀를 출산하며 생육하며 번성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이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요 계획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부터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에서 들려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이렇게 가정을 이루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이 그건 저급한 일이오, 그건 세속적인 일이요. 별로 가치 없는 일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가정을 이루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것을, 이렇게 인간이 살아가는 이 모습을, 악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종종 수많은 종교에서, 그리고 수많은 사상들에서, 우리가 혼자 사는 것이 그것이 고상한 것이고, 독신을 추구하거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아주 높은 경지의 도에 올라가 있는 사람으로 보는 그런 경향들이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동정녀로, 결혼하지 않고 총각으로, 계속 정절을 지키면서 죽을 때까지, 그렇게 혼자 살아가는 것이, 마치 어떤 고상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높은 단계에 있는 영적인 차원에 올라가 있는 사람인 양, 그렇게 표현하는 그런 종교들이 많이 있는데요. 성경의 가르침은 절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저급하고 속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종종 오해를 하는데요. 특별히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은, 홍수가 나기 전에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그러다가 노아의 홍수가 와서 망해버렸다고 하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8절에서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인데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말씀해 주신 것이죠.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 홍수가 닥쳤던 것처럼, 노아 시대 때 홍수가 와서 온 세상을 파멸시켜 버렸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게 될 텐데, 그때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게 될 텐데, 노아 시대 때 사람처럼 그렇게 잘못된 삶을 살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고 있는데요. 그래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겁니다.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 먹고 마셨다.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 시집가고 장가갔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려고 한다면, 식음을 전폐해야 된다. 주님이 오는 것을 맞이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중단해 버려야 된다. 가정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의 가정도 버리고, 아버지와 가정까지 다 버리고, “우리가 주님을 맞이해야 된다”라고 그렇게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아 시대 때 사람들이 이렇게 시집가고 장가가다가, 그리고 먹고 마시다가 멸망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먹고 마셨다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시집가고 장가간 것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먹고 마신 게 잘못한 게 아니에요. 시집가고 장가 간 게 잘못이 아니에요. 무엇이 잘못이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일상생활을 하는 것까지는 했는데, 더 이상한 게 없다는 거예요. 심판이 오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홍수가 내린다는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들의 일상만 살 줄 알았지, 그 이상 영적인 준비를 하지 못했고, 심판이 오는 것에 대한 회개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인 것이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간 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수많은 종교에서 종종,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어떤 고상한 일인 것처럼,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정상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수많은 종교에서 식음을 전폐해 버리고 금식하는 것이 마치 어떤 영적인 높은 차원에 올라가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그게 옳은 게 아니에요. 어떤 종교에서는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그게 가장 고상한 어떤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거예요. 어떤 종교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묵상만 하고 있는 것이 그게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게 그게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삶이 무엇인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땀을 흘리고 노동하면서 대화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디자인해 놓은 그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지,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거나 잘못해서 잘못 이해해서, 하나님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2장에서 들려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살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스리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이라고 그렇게 무시할 것이 아니고, 혼자 살기로 하거나 또한 어떤 그 금식하며 살거나 일하지 않고 묵상만 하고 있거나 이런 삶이 결코 고사한 것이라고 보는 그러한 관점이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점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오늘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혼자 살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렇다고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하는 것이죠.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셔요. 하지만 또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혼자 살 수도 있어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렇게 혼자 살도록 해주시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것 한 편을 향해서 비아냥거리거나, 욕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존중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이게 이것보다 더 낫고 이게 저것보다 더 낫고, “이것은 저것보다 더 나쁘다”라고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서로가 존중해 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린도전서 7장의 말씀은 결혼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독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향한 권면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이루면서 행복하게 사시는 분들은, 그렇게 사시면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산다고 해서, 저 사람은 왜 결혼도 안 하고 있어 저 사람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어? 그렇게 비난할 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또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살면 됐지,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비난하고 비아냥거리고 저런 더 저급한 사람들 그렇게 할 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은 각각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각 사람들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살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의 삶의 방식이 어떠하든지 간에, 서로 존중하면서 인정하는 그런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런데 서로를 향해서 결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아냥거리거나 무시하거나 저급하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한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사람들을 또한 욕할 것도 아니고 비난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부르심이 무엇인가에 따라 본인이 기도하는 가운데 결정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창세기 2장에서 남자와 여자의 창조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들어 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하와를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고 하는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남자가 우선이고, 여자는 그 남자를 돕는 자로 서빙하는 자로,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 그러니까 창조의 질서라고 하는 것이 남자가 우선이고, 여자는 그 남자보다는 좀 저급한 남자를 돕는 역할만 하는 그런, 일종의 창조의 질서에 남녀의 우열의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창세기 2장의 말씀에서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오해하곤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유교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우리 자신을 성경 말씀에 완전히 오픈해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 우리의 생각에 맞는 것만, 성경에서 읽어내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익숙해져 있던 그런 개념 속에서 성경을 읽다 보니까, 유교적인 남존여비의 사상을 가지고,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이거 보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를 우선으로 창조하시고, 그리고 나중에 그 남자를 돕기 위한 여성을 돕는 배필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볼 것이 아닙니다. 돕는다고 하는 것은 한 직급이 낮은 사람이 도와주는 건가요? 높은 사람이 도와주는 건가요? 누가 돕는 건가요? 돕는 사람이 높은 사람입니까? 도움을 받는 게 높은 사람입니까? 헷갈리시죠? 우리가 돕는다고 하는 것을 항상 우열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원에서 우리가 항상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해가 많이 생기는데요. 사실 돕는 것은 낮은 위치에 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돕는 자는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더 높은 사람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이죠. 어른이 우리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고요.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런 것도 없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고, 돕는 사람이 돕는 자라고 하는 것은 낫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돕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뿐인 것이죠.

특별히 성경에서는 누가 돕는 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돕는 자예요. 시편 54편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나를” 뭐 하시는 분이며? “돕는 이”입니다. 히브리어로 똑같은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다고 했을 때, 그 “돕는”이라고 하는 그 단어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라고 했을 때, 그 돕는다고 하는 그 말이 똑같은 단어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듯이, 그렇게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고 하는 것인데요.

사실은, 그러니까, 하와가, 여성이 남자만을 도와야 주는 일방적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서로 돕는 관계죠. 피차 복종하는 관계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혼자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벽한 것이 아니라, 늘 실수하고 늘 넘어지고, 늘 잘못되고 늘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이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돕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고, 또 그 돕는 사람은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그 남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되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몸으로서, 같은 몸으로 서로 고백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그런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는 순간 뭐라고 고백합니까? 창세기 2장 23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리라.” 그랬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 앞에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거예요. 내 뼈요 내 살이니까, 하나라는 말이에요. 남편과 아내가 하나여서, 한 사람이 아프면 같이 아프고, 한 사람이 기쁘면 같이 기쁘고,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안타깝게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그 모든 관계가 망가져버린 것이죠.


서로가 사랑하면서, 서로가 돕는 배필로, 하나님께서는 창조해 놓으셨는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그 부부관계가 어떻게 바뀌어 버립니까? 나중에 우리가 선악과 먹는 이야기를 다루면서, 다시 나오겠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주어진 말씀이 창세기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내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그다음 말이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인데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남편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죄가 들어온 그 망가진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하와가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하와를 다스릴 거다라고 하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일까요? 이 말이 “히브리 평행법”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약간 쉽지 않습니다.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본다고 한다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서로 생략되어 있는 거죠. 파란색으로 되어 있는 글씨가 반복되기 때문에 생략을 해서 ,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뭡니까? “너는 남편을 다스리기 원할 것이고, 남편도 너를 다스리기 원할 것이라.” “다스리다” “원하다”라고 하는 말이 위에, 아래에 같이 나오기 때문에, 한 번씩 생략한 표현이에요. 그런 생략이 히브리 병행법에서 가능한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뭐냐 하면, 부부가 어떤 관계로 살아가야 돼요? 어떻게 사는 게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예요? 하나님께 만들어 놓으신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뭐예요?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도와주는 거예요. 서로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가는 게, 하나님께서 원래 만들어 놓으신, 혼자 살면 안 되는 가정을 만들어 놓으신 그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죠. 그런데 죄가 들어온 관계로 말미암아 어떤 관계가 되는가? 아내가 남편을 다스리기를 원하는 거예요. 내 뜻대로 내 주장을 강요하면서, 남편이 나의 말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고, 남편은 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아내가 내 말에 복종해 주기를 원하는 것이고, 서로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싸우면서, 그래서 하나가 되기보다는, 가정이 지옥과 같은 곳으로 변해가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시 나와,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우리들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들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를 씻겨주셔서,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들을 다 씻어버리고, 다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그런 돕는 배필이 되는 가정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우리 교우들 모두의 가정들마다, 서로 사랑이 넘치는 정말 복된 가정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메시지는 단순히 부부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사실은 사람 전체를 하나님께서 왜 만들어 놓으셨는가에 관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화하고 서로 손잡아주고 서로 어깨 두드려주며,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돕는 배필로서, 서로 도와주는 동료로서, 믿음의 동역자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런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안 돼요. 나 혼자 떨어져 나가서, 공동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함께 신앙생활하다가, 우리는 종종 같이 마음을 맞대고 무슨 일을 같이 하다가, 그러다가 서로 의가 상하고,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헤어지고, 그리고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우리는 상처를 받을까요? 왜 우리는 늘 행복하고 늘 기쁘고 늘 좋기만 하면 좋은데, 왜 우리는 상처를 받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완벽하지 못해요. 그래서 말의 실수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고, 때로 우리의 탐욕이,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들이 발행이 돌출될 때가 있고, 그래서 그래서 멀리 있었을 때는 모르는데, 가까이하면 가까이할수록, 오히려 더 상처를 받고, 남편에게서 아내가 상처를 받고, 아내에게서 남편이 상처를 받기도 하고, 부모에게서 자녀들이 상처를 받고, 자녀들에게서 부모가 상처를 받고, 또 같이 신앙생활하면서 멀리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함께 신앙생활하다가 서로 상처를 받고, 그래서 그래서 서로 헤어지게 되고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받을 때, 헤어지는 결심을 하기보다는, 혼자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기보다는, 그 순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를 삼키려고 할 때, 우리를 분리해서 삼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초식동물들은 맹수들에게서 어떻게 자신들을 보호합니까? 얼룩말들이 서로 모여 있어서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가 그 모임에서부터 분리되면, 그러면 맹수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우리는 같이 모여 있다 보면, 서로의 가시에 의해서 서로가 찔리다 보니까, 그래서 여기에 상처를 받고 저기에 상처를 받고 그래서 떨어져 나갈 때가 많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서로가 돕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서로 상처를 주는 관계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그러한 앙금이 생겨버리는 것이고, 그리고 친구 사이에, 그리고 동업자들 사이에 배신감이 생겨버리고, 신앙의 동지들 사이에 거리가 생겨버리면서, 서로 분리되는 수가 많이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고, 우리가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셔서, 발을 씻겨주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사탄의 꾐에 빠져서 방황할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엎드리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다시 돕는 배필로 돕는 사람으로 믿음의 공동체,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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