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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고전 2:9)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계실까요? 어떤 삶이겠습니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대하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성경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요? 기뻐하면서 사는 거예요. 감사하면서 사는 게, 하나님께서 저를 향해서, 우리를 향해서 원하시는 것이고, 기대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슬퍼하거나 좌절한 마음 가운데 살아갈 게 아니고, 우울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게 아니라, 늘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기 원하신다 이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부모라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늘 기대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기쁜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는 우리 자녀들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가? 슬픔 가운데 절망 가운데, 괴로워하는 가운데,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이었어요. 제 아내가 음성 파일을 하나 제게 보내줬습니다. 우리 큰딸 아이가 제 아내에게 보낸 음성 파일이라고 하면서 보내주어서, 제가 들어봤는데요. 그 음성 파일을 들어보니까,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있는 음성 파일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사랑하는 우리 사위가 우리 딸을 향해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가?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하고 귀 기울여서, 녹음이 잘 희미하게 들려서 잘 모르지만, 귀 기울여서 들어보니까, 막 화를 내면서, “넌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야” 막 소리를 지르고, “내 인생에서 꺼져버려” 그런 얘기를 하는 그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 아내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저도 굉장히 놀랐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하면 되나 싶어서, 제 아내가 우리 딸에게 카톡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에릭이 화가 나면, 그렇게 화를 많이 내니? 도대체 무슨 일이야?”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우리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깔깔깔깔 웃으면서, “엄마, 그거 우리 친구가 녹음한 거야.” 자기 친구가 있는데, 부부싸움 가운데, 그 싸우는 이야기를 녹음해서 들려주었고, 그리고 지금 그 아이가 자기 집에 피신해 와 있다고, 그 얘기를 해주어서, 저희들이 깜짝 놀랐다가 안도의 숨을 돌리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부모들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녀들이 행복한 거예요.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기 원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절망 가운데 슬픔 가운데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늘 기쁨과 감사로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늘 마음속에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나는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질문을 던져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매일매일의 삶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데 우리가 1년 가운데서 11월을 감사의 달로 정하기도 하고, 또한 오늘 이렇게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고 싶어서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맞아,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맞아, 기뻐하면서 살아야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삼기 위해서, 이렇게 추수감사주일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원하기는 오늘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심령을 만져주셔서, 이러한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안타깝게도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은 것이죠.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왜 우리는 기쁨이 없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걸까요? 우리는 왜 감사가 없는 것일까요?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한번 그 문제를 진단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성경은 우리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단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대표적인 예를 꼽는다고 한다면,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경우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 감사를 몰랐어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큰 특권이고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이 첫째 아들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감사할 이유는 있어요. 그런데 그 감사할 이유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렸고, 감사할 이유에 대해서 둔감해 버려서, 감사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역시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 전에는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이죠. 그냥 아버지의 집을 떠났으면 좋겠고, 거기는 속박이 있는 것 같고, 거기는 자유가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먼 나라로 가서 행복하게 살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발견하게 된 것은 돼지 쥐엄 열매를 먹는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발견하고 그때서야 깨닫게 된 겁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들도 먹을 것이 많은데, 내가 거기 살았었는데, 우리 아버지 집에 있는 그것이 행복이었고 기쁨이었는데, 그때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나 잃어보기 전까지는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들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고마움, 지금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을 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물고기는 물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고 행복인지를 몰라요. 언제까지 몰라요? 낚싯바늘에 잡혀서 끌려 나와서 죽을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물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요,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부모님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우리 아이들은 늘 부모님을 보면서 원망하죠. 불평하죠. 엄마 때문이야. 아빠 때문이야. 다 원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부모님을 잃고 난 다음에서야,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는 그 어리석은 모습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까지 깨닫지 못하나요?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감사할 이유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들의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여기에는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 이것으로는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 모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과 뜻을 발견하는 그 노력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해야 할 것인데요.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그 선물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도 못했었고, 귀로 들어본 적도 없고 마음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어마어마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예비에 놓으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이 고린도전서 2장 9절의 말씀이 아주 생생하게 제 마음 가운데 와닿았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10여 년 전에 아니 10여 년 전이 아니라 20여 년 전에 어떤 선교사님이 갑작스럽게 소천하게 된 일을 계기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관여하고 있었던 중국 선교사님이 계셨는데요. 차영규 선교사님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중국과 미국이 수교를 정식으로 맺기 전부터 중국에 들어가서 거기서 그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였는데 갑작스럽게 소천하시고 말았어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왜 교통사고가 일어났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아마도 중국 공안이 눈여겨보고 있다가, 죽인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상황이기도 했고, 아니면 저혈당 쇼크로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을 때, 이제 선교의 현장에는 사모님과 두 자녀만 남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선교 이사회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그 선교사님의 장례를 치르고, 그리고 그 치른 이야기를, 그 가셨던 목사님께서 제게 들려주셨는데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은, 그 장례식장에서 그 선교사님의 딸이 답사를 하고 인사를 나눈 과정 가운데서, 고린도전서 2장 9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슬픔의 순간에, 가장 절망적인 바로 그 순간에,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그 사랑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없었고 귀로 들을 수도 없었고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그 엄청난 은혜가 있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그 힘든 순간에도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일어서는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제 마음 가운데 아주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순간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인가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거예요.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길로 선한 길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어마어마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라도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큰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은 거시적인 관점을 가지고, 우리를 향해서 어마어마한 것을 준비해 주고 계시는데, 우리의 생각에는 이 세상에 썩어질 것,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마치 어린아이들과 같은 것이죠.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예요? 장난감이에요. 어린아이들에게 중요한 게 뭐예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그거 가지고 서로 싸운단 말이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아이들이 싸우는 그 모습을 보셨습니까? 저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그것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부모님이 자녀들을 바라볼 때는 얼마나 더 좋은 것으로 더 풍성한 것으로 예비하고 계셨는지, 그 부모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감사의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의 눈 우리의 시각을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어 가는 훈련을 해야 되는 거예요.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내가 볼 때는 실패인 것처럼 보이고 내가 볼 때는 망한 것 같고 내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보면서 오히려 담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하는데요. 갓난아기들을 보면 엄마 아빠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를 하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아요. 특히 까꿍 놀이를 하게 되면 잠깐 얼굴을 숨겼다가 쫙 나타나서 까꿍 하면 이 아이가 엄마의 얼굴을 보고 꺄르르르르 웃어요. 엄마가 딱 숨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리둥절하면서, 도대체 엄마가 어디 갔을까 하는데, 절망 가운데 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있다가 나타나겠지 하면서 바라보는 거예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까꿍하고 나타나면, 아 맞았구나 하면서, 까르르르 웃는 거죠. 정말 갓난아이라도 엄마를 믿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절망하지 않는 겁니다. 조금 뒤에는 엄마가 나타나겠지. 조금 뒤에는 나에게 나타나서 나를 웃겨주겠지. 기대하면서, 그러면서 엄마를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이 세상의 것들이 망가지는 것 또는 성공하지 못하는 것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좌절하고 슬퍼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전적으로 신뢰해 나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아이들과 함께 까꿍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까꿍놀이를 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런 상황이 언제 있었는가? 엘리야에게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1절에서 1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 바람이 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까 했는데, 하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바람 뒤에 지진이 있어서 그 지진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나 했더니, 하나님이 안 나타나는 거예요. 지진 후에 불이 있어서, 그 불 가운데 하나님이 있는가 했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안 보이는가 했더니,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거예요. 네가 어째서 거기 있느냐? 왜 절망의 자리에 서 있느냐? 왜 슬퍼하며 있느냐?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나랑 함께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병은 낫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 가정의 문제는 도무지 해결될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얼굴을 감추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괴로워하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까꿍하고 나타날 것을 기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을 불만의 눈으로, 불평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든 나쁜 것인 것처럼 보이든, 내 인생의 짐처럼 보이는 것이든,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주신 것이고,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허락해 주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실수가 없는 하나님이에요. 우리 인생들은 이렇게 실수하고 저렇게 실수하고 좋은 줄 알았는데 잘못된 것이고 이것이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잘못된 것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늘 실수하고 실패하는 게 우리 인생들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실수가 없는 하나님이에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시고 완벽하신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우리 인생들은 무능해서 하고 싶어도 못하고 하려고 해도 망치고 늘 어설픈 것들만 결과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요,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너무나도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시는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고, 괴로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될 것이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옆을 보세요. 감사할 제목이 보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옆에 주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어떤 것은 우리에게 저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복을 위해서 주신 것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로 나타나야 그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감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모습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것은 추수감사절이 되면, 사람들이 이웃들을 향해서 감사의 마음을 작게나마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추수감사절 때가 되면 1년 동안 편지를 배달해 준 우편배달부에게 고맙다고 하는 쿠키를 구워서 주면서 감사하다고 표시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매일 혹은 자주 다니던 식당에 가서 추수 감사절 기간이 되면 내가 이 좋은 식당이 있어서 늘 식사 맛있게 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그 식당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는 표시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늘 들르던 세탁소에서 세탁소에 찾아가서, 1년 동안 내 옷을 빨아줘서 잘 읽고 다닐 수 있었다고 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뭐 20불 정도 10불 정도 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참 아주 인상 깊게 제 마음 가운데 와닿았습니다. 

어제저녁이었는데요. 쿠팡에서 물건이 배달이 됐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물건만 놓고 가는데, 마침 제가 있는 상황에 그 아저씨가 배달을 해주는 모습을 보고 달려 나가서, 저희에게 있던 감을 한 상자 마련해서, “혹시 감 드릴 테니까 혹시 가져가실래요?”라고 물어봤더니, 이 쿠팡 청년이 얼굴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주시면, 고맙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전해줬어요. 우리 늘 우리 집에 늘 배달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주었더니, 이 청년이 정말 기뻐하면서, 그걸 받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몰랐어요.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제가 행복해지더라고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한번 우리도 같이 해봤으면 좋겠어요. 직장에 가서 직장의 동료들에게 내 옆에서 도와줘서 고맙다고,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나 주면 어떨까요? 정말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를 도와준, 아니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내 옆에 있어주었던, 그런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나씩 해보면 어떨까요?

이것이, 우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사실은 너무나도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에요. 너무나도 기쁜 일이에요.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사를 표현할 때 우리가 더 행복해지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는 우리 남편을 향해서 당신이 내 남편이어서 감사하다고 얘기 한번 해보세요. 사랑하는 우리 아내를 보고 당신이 내 아내여서 너무 감사하다고 얘기 한번 해주고,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네가 내 아들이어서 내 딸이어서 너무나도 고맙다고 전화 한번 해주세요. 우리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이야기 한번 해주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이 선물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것이 선물이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늘 완악해서 우리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에 사탄의 기준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기준이 아니라 사탄의 기준일 수밖에 없는데요. 사실은 성경적인 기준은 무엇이냐 하면, 부족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채워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내게 놀라운 축복의 선물이고, 내게 연약한 자가 붙어 있다고 한다면 그 연약한 자에게 내가 감싸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의 축복인 것이죠. 내가 강도 만난 자의 옆을 지나가게 된다고 한다면, 재수 없어서 강도 없는 강도 만난 자로의 옆을 지나간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으로 그 사람 옆을 지나가게 하신 거예요.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그 사명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울 사도는 늘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가 빚진 것이다.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해 주셨고,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으니 내가 빚진 것이다고 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간 것이죠. 우리가 라면을 모은다고 한다면, 저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냥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그 기쁨과 감사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선물을 쓰레기 취급하며, 욕하며 그리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며, 도망가려고 하는, 그런 악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놀라운 사명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돌보고 다듬어주고, 우리 아이들을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고 사랑으로 감싸고, 그래서 더욱더 좋은 사람으로 빚어가게 하는, 그 사명으로 선물, 그런 선물로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선물은 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기억하는 것이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삶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기적이고 탐욕으로 가득한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죄성에 따라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서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 그런 마음들을 주님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그 놀라운 선물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하며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 보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은 그게 아니고 내 마음은 힘들어도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삶이 행복한 것은 다른 사람이 내게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보여주어야 될 그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내가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하나님의 그 선물들을 그냥 허비해 버렸기 때문에 절망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주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이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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