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는 말씀인데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고요? 까먹었습니까? 벌써?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구원을 이룬다. 회개를 이룬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으로 인도하고, 회개로 인도하는 것인데, 세상 근심은 어디로 인도하는가? 사망으로 인도한다고 대비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이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이 두 가지 근심 중에서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근심을 해야 할까요? 두 말하면 잔소리죠. 세상, 세상 근심을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살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이고, 세상 근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이고, 세상 근심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우리가 영적인 일에만 신경을 써야 하고, 영적인 일에만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이 세상의 일, 이 세상에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서 염려하거나 근심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그래서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나누고, 그래서 영적인 일은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먹고사는 이 세상의 일은, 이것은 하찮은 것이고, 의미 없는 것이고, 아주 더러운 것이라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비즈니스 결과를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먹고사는 문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문제들은 세상 근심인 반면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인 부흥을 꿈꿀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전도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성장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가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영적인 근심, 영적인 생각이라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은 성경 말씀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세상 일로 염려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염려하고 구할 것이고, 영적인 일을 정말 의미 있는 일을 생각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의 일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영적인 일에 신경을 많이 써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써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나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는, 그것은 하찮은 것이고 무가치한 것이고, 심지어 그것은 비신앙적인 불신앙적인, 신앙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어느 한 구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이 말씀들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는, 그렇게 우리가 영육 이원론으로, 영적인 것은 고상하고 좋은 것이지만, 이 세상의 것은 나쁜 것이라고 보는 영육 이원론으로, 이 말씀을 볼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은 이 세상의 일에만 너무 몰두해서,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염려하고,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이 사라지면, 정말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그렇게 과도한 절망, 과도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인 일들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속적인 일도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참 존경에 마지않는 바울 사도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 사도는 천막을 만들었어요.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복음만, 나는 복음만 전하겠다. 나는 다른 거 하지 않고, 오로지 영적인 일에만 힘쓰겠다고 하면서, 그 전도사역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 사도는 천막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천막을 수선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자신이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막을 만들고 수선하는 그 일을 하면서 자신의 생활비를 조달했던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무슨 말씀도 있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 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인류를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음식을 먹으라 하노라.” 그냥 하나님만 바라보고 일 안 하면서, 하나님께서 알아서 먹여주시겠지 하고, 그렇게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권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일해라. 일해서 먹고살아라. 조용히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잘 감당해서, 돈을 벌어야 될 것이고, 일을 해야 될 것이라고 권면해 주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가족을 돌보는 일들은 하찮은 일이 아니라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 말씀에서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부양하기 위해서 수고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되고, 또 우리 가족들을 잘 부양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일에만 신경 써야 된다. 이 세상 일은 하지 말아야 된다. 그런 의미로 해석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이고 세상 근심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도 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있는 것을 들었을 때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하나 써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편지에 고린도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그런 잘못된 성도들을 향해서 영적으로 책망하고 훈계하면서, 그런 일을 이제는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엄하게 경고하면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그 편지를 보낸 다음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은 거예요. 왜 편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 편지를 받았을 때 그 편지를 받은 당사자가 과연 바울 사도가 들려준 이 메시지를 잘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자신의 삶을 고치고, 그리고 좋게 변화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종종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역효과가 일어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충고나 권고들은 선한 결과를 일으키기보다는 역효과를 일으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편지를 보내놓고, 정말 그 고린도 교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그 사람들을 엄하게 책망하고 훈계했는데, 그 편지를 보낸 다음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고린도 교회 이 성도들이 내 편지를 받고 나서 화가 나면 어떡하지? 오히려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어떡하지? 오히려 이 사람들이 더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떡하지?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엄청난 불편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 선한 의도와는 달리 잘못된 결과를 빚어낼까 봐, 이런 일이 참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나는 선한 의도로 이야기한 것인데, 정말 좋은 말로 이야기한 것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잘못 받아들여서, 오히려 분노하고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 편지를 보내놓고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편지를 보내지 말걸 그랬나? 괜히 보냈나? 어떡하지? 고민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 보낸 그 편지를 받아 든 바로 그 당사자가 바울 사도의 그 편지를 읽으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구나. 내가 욕심대로 행했구나. 자신의 모습을 환하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그 거울과 같은 편지를 바라보면서 내 모습이 이렇게 더러운 모습이었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회개했다고 하는 뉴스를 전해 듣게 된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가 얼마나 마음속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내용이 오늘 고린도후서 7장 8절과 9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오.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편지를 받고 당사자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분노하면서 나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다니 화를 내면서, 오히려 그 바울 사도를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고 공격하는 선택을 할 수가 있어요. 또 하나의 선택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편지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내게 이런 잘못이 있었구나. 이런 단점이 있었구나. 살펴보면서, 회개하며 자신의 삶을 고치는 선택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무엇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일까요? 무엇이 세상 근심일까요? 당연하죠. 그 편지 글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내가 이런 부족한 게 있었구나. 내가 이런 잘못이 있었구나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편지를 받고 분노하며 화를 내며, 그래서 공격하려고 달려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 근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들은 이런 반응 중에서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고치고 우리를 살리는 영적인 생명수와 같은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그 편지를 받고 난 다음에 바울 사도를 향해서 공격하려고 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면, 결국 이 사람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결국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우리들은 바울 사도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받으신 분 없으시군요. 하지만 우리는 매일매일 그런 편지들을 받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하루에도 여러 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는 편지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편지들이 있는 것이죠. 내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허물이 많은 인생인가를 보여주는 편지들이 우리들에게 매일매일 전달이 됩니다. 때로는 사건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 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때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때로는 친구들의 말을 통해서, 여러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그런 귀한 말씀들이 언제나 있어요.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애써 안 들은 척 외면해 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런 경험들을 하면서, 분노하고, 그리고 내 모든 화를 다 내쏟으면서, 세상 근심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런 약함이 있구나. 나의 이런 더러움이 있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어. 그래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귀하고 복된 기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는 그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은 가장 아픈 일이고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경험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를 그것이 우리를 박살내는 우리를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우리를 수술해서 그래서 영적으로 깨끗하게 거듭나게 만드는 수술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박살내는 돌멩이가 될지, 나를 찔러 쪼개 나를 죽여버리는 칼이 될지, 아니면 내 속에 들어있는 종양들을 깨끗하게 도려내고 회복하게 만드는 수술칼이 될지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님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그 칼들을 영적인 수술을 하는 수술칼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1절 말씀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를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히 있게 하며, 얼마나 덜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상 근심을 선택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면 제일 좋은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죄성이 너무나도 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기보다는, 세상 근심의 반응을 보일 때가 너무나도 많아요. 그런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그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오늘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주님의 보혈의 피로 제 마음을 씻어주시고, 그 완악한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정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아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