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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험 (창 22:11-13)

100세에 낳은 아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날벼락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의 말씀이죠. 창세기 22장 2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들을 죽여서,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는 끔찍한 명령이었습니다. 누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명령을 하신 걸까요? 하나님께서 갑자기 미쳐버리신 걸까요?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려서, 제대로 판단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아무렇게나 명령을 내려버리고 만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행복해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시면서, 그 아들을 빼앗아 버리려고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고기로 맛있게 먹기 위해서, 사람의 살을 먹고 싶어서, 이런 명령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그런 이유는 아닐 겁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려서, 황당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냥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명령을 해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가장 지혜롭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좋으신 말씀을 하실 하나님이시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하실 하나님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행복해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신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십계명 가운데 제2계명을 보면, 창세기 출애굽기 20장 5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질투하심이 인간의 질투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질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잘 되는 사람이 있으면, 배 아파하고, 사람의 질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좋아 보이고, 다른 사람이 행복한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질투하심은 그런 종류의 질투가 아니라, 우리가 사탄에 의해서 망가지는 것을 못 보는 질투인 것이죠. 우리가 죄로 인해서 망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질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고, 우리가 행복해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우리가 행복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스바냐서 3장 1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마치 우리의 아빠와 같아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마치 우리의 엄마와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잘 되면 기뻐하고, 우리가 행복하면 더 기뻐하실 하나님이지,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실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사람의 고기가 먹고 싶어서, 오랜만에 인육을 먹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것도 아닐 겁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배고프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 자체로 충족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엇인가 부족해서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아야만 하고, 사람이 무엇인가를 채워줘야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고, 아무런 갈망도 없는 하나님은, 그 자체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하거나, 갈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사랑하는 아들, 그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창세기 22장에서는 그 이유를 기록해 놓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낸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추측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고통받게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이라고 우리가 추측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는 게 도대체 어떠한 영적인 유익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까? 도무지 어떤 의미에서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나님 다른 말씀은 다 순종하겠지만, 이 말씀은 순종할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서 항거하고 싶을 것만 같아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 22장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주 놀라운 것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셨을 때,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리고 칼을 빼들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게 창세기 2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지 아브라함은 다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순종했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제가 추측하기로는, 아마 아브라함도 이해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떠날 때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왜 이런 명령을 수행해야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떠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설명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왜 이 아들을 죽이라고 합니까? 그 하나님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아요. 하지만 이 아브라함은 순종하면서, 모리아 산 위에 올라가서, 아들을 제단 위에 놓고 칼을 빼드는 그 순간에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이죠.


어떻게 이 아브라함은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에요.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가장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해주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도, 지금 당장 내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죠.


성경적 의미에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적 의미에서의 복종이란 내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그게 바로 성경적 의미에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부터 19절까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료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해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약속하고 그 약속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 인생들은 약속을 해도, 마음이 변해서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약속을 해서 그 약속을 이루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서 이루지 못할 때가 있고, 사람은 약속을 해놓고 그 약속을 지킬 만한 능력이 있어도, 목숨이 끊어지면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바로 우리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원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약속은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 아이를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무슨 약속을 하셨어요? 이 아들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깨뜨려 버리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해서 내가 죽인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못하시겠는가? 죽은 자를 살려내시면서까지라도, 이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실 거라고 하는,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는 게 히브리서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죽인 다음에 살리신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이지 못하게 미리 막으신 것이죠. 오늘 읽었던 창세기 22장 11절 12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 순종해서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셨기 때문인 것이죠.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 천사를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까지 아끼나 아끼지 않는가를 보시려고 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정말로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짜구나! 정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명령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겁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예요.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믿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경외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정말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를 보기를 원하셨고, 그것을 확인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신 것이죠.


종종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들을 우리들의 마음에 가지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그게 바로 우상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무엇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것들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볼 때 좋은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때로는 우리들의 자녀들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거죠. 하나님보다 우리 자녀가 더 소중한 겁니다. 때로는 돈이 우리들에게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때로는 명예나 자존심이 나의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때로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우상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집니까?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우상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그것에 대해서 시편 115편 4절에서부터 8절까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무엇과 같으리라? “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리가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우상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죠.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상이 있으면, 우리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그래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알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의 자녀가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린다고 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던가요? 자녀가 우상이 되면 그러면 사리 판단이 안 돼요. 냉정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해 주고, 모든 것이 다 눈에 드러나는데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들리지 않는 겁니다. 사리 판단이 되지 않아서, 분노해 버리고 미쳐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녀가 우상이 될 때, 우리는 우상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돈이 우상이 되어도 마찬가지고요.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우상이 되어도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상이 되어버린 것을 너무나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무슨 진실을 이야기해 줘도 귀에 들리지 않고, 어떠한 것을 다 이야기해 줘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자기편이라고 한다면 무슨 악한 짓을 해도 다 용납이 되고, 다 괜찮고, 상대편에 대해서는,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해 줘도, 비난해 버리고 욕해버리는, 그래서 우상처럼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우리가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망가뜨려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을 따라가면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우상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비참한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물으셨어요. 100세에 낳은 아들과 행복한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어느 날 물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에게 하나님이 누구냐? 너에게 이삭이 무엇이냐?” 물으시는 것이죠. 이삭이 너에게 하나님께서 준 선물이냐? 아니면 이삭이 너에게 우상이 되었느냐? 물으시는 거예요. 이삭이 정말 좋긴 좋은데, 이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도 고마워서 찬송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이삭이 너의 우상이 되어 버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우상 숭배자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는가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물으신 것이죠.


그 질문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어떠한 대답을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고백하는 겁니다. “주님, 이삭이 나의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포기하라면 포기하고,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면 버리겠습니다.”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이 오늘 창세기 22장의 말씀인 것이죠.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러한 고백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생생하게 기억했기 때문일 겁니다. 저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살고 있던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말씀하시고 인도해 주셨고, 가나안 땅에서 수많은 대적들이 위협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지켜 보호해 주셨고, 아브라함의 실수로 인해서 아내를 빼앗길 뻔했던 그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아내를 지켜주셨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소망이 없구나” 이제는 경수도 끊어져 버리고, 더 이상 아들을 안을 수 있는 그런 소망조차 다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100세에 아들을 안을 수 있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주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이 나의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입니다.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아브라함을 향해서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우상이 있는지, 하나님이 진짜 나의 하나님인지를 물으시고 계시는데, 그런 그 순간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혹시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내가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돈이 나의 우상이었는지, 자녀가 나의 우상이었는지, 아니면 이 세상의 명예나 자존심이나 이런 것들이 나를 구원하지 못할 것들이 나의 우상이 되었었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요.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믿음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 때 우리는 믿음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가롯 유다에게는 돈이 더 소중했어요. 예수님보다 은 30냥이 더 종이요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한 거죠. 바울 사도와 함께 일했던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과 사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바울 사도와의 사역을 접어버리고, 그냥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한 것이죠. 오늘 우리들에게도 종종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등장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주님만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조금만 사랑해야 된다”라고 말씀드리는 게 결단코 아닙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되 덜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아니에요. 충분히 사랑하십시오. 괜찮아요. 충분히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할 수 있습니다. 축구 좋아하세요? 좋아하세요.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 이재성이 두 골이 나눴어요. 좋아하세요. 야구 좋아하세요 괜찮아요. 좋아하세요. 돈을 좋아하십니까? 안 좋아하세요? 좋아해도 돼요. 내가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겠다. 열심히 수고해서 땀을 흘려서 더 많이 성공하고 싶다. 괜찮아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시면 돼요.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거, 괜찮아요? 나빠요? 좋아요? 괜찮아요. 더 많이 사랑해도 괜찮아요. 우리가 Kpop을 좋아하고 그리고 BTS 아미(army)가 되는 거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하셔도 돼요. “아파트, 아파트” 하면서 노래 불러도 괜찮아요. 정치인을 좋아할 수 있어요? 없어요? 좋아해도 돼요. 그게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것이 우리 마음의 우상으로 자리 잡아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우리의 귀를 가리고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것들이 우상이 되어버리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짓을 사랑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한다면, 그리고 내 눈이 막혀버리고 귀가 닫혀버리고 일방적인 우상숭배의 자리로까지 나아가게 되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고, 때로는 나에게 명예가 우상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내 자존심이 우상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유학을 다 유학하고 있을 때 들었던 안타까운 이야기가 하나 있었는데요. 어떤 유학생이 미국에 건너와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같이 따라왔던 아내가 유학 생활이 너무나도 힘든 거예요. 남편은 아침 새벽 일찍부터 학교에 가서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내는 집에 혼자 남겨져서 외롭게 생활을 하면서, 쪼들리는 살림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데다가, 인종차별이나 여러 가지 언어 장벽 등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심해서 어느 날 남편을 앉혀놓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나를 선택하든지, 공부를 선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얘기한 거예요. 근데 그 순간에 남편이 뭐라고 대답을 했게요? 이렇게 대답했다고 그래요. 내가 미국에 온 것은 학위를 마치러 온 건데, 나는 학위를 포기할 수 없다고 대답을 했대요. 결국 그래서 가정이 깨지고, 그때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잖아요?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소홀했다고, 내가 공부 때려치우겠다고 얘기했다고 한다면, 아내가 뭐라고 했을까요?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을 텐데, 바보 같은 남편은 그 아내의 말을 오해하고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말씀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그 질문을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마다 하고 계셔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를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절망이 솟아오를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미움이 솟아오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질문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내 자녀가 더 귀중하냐?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너는 이 돈이 더 좋으냐? 우리를 향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그럴 때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아브라함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는 것은 우리에게서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빼앗아 버리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상을 따라가면 망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거예요. 이 우상을 따라가면, 우리의 행복이 박살나버리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그럴 때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이 우상이 나의 주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참되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만이 나의 경배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물으신 그 주님께서, 사실은 먼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땅에 오셨어요. 하늘의 영광 버리시고 모든 권세를 다 버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내려오신 것이 성탄절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물으실 때, “주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실제의 삶 가운데서 등장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서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날벼락을 맞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좋은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행복한 순간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소망을 다 빼앗아가 버리는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내 아들을 죽여버리라고 하는 것처럼 말하시는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어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박살이 나서, 아무런 소망도 더 이상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다가오게 될 겁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 우리가 슬퍼하거나 좌절하거나 분노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그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또한 하나님의 선한 일꾼들로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지금은 깜깜해서 지금은 터널 속을 지나는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길로 인도해 주실지 기대하면서,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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