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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마 1:1-6상)

2020년 12월 20일 주일예배 설교

요즘도 족보가 집에 있고, 그 족보를 조금씩 살펴보시는 가정들이 좀 있으십니까? 한번 손 들어보십시오. 그러시군요. 제가 어렸을 때는 큰 집에 놀러 가면, 우리 큰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들을 앉혀놓고 족보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족보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는데, 우리 큰 집에 놀러 갈 때마다, 큰 집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큰아버지께서 족보 책을 꺼내놓고, 네가 지금 어느 집안에, 어느 몇 대 손인가라고 하는 것을 늘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벌써 지금 한 40여 년 전 이야기니까요. 그때 매년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기억이 남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전주 이씨 집안에 세종대왕의 아들인 밀성군 파의 후손으로서, 소재 자손이라 그랬습니다. 조선시대 때 영의정을 지내셨던 소재 자손의 17대 손이라고 하는 사실을 늘 상기시켜 주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이래 봬도 그런 사람입니다. 아마 족보의 기능이 있다고 한다면, 후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큰아버지는 대단한 분이 아니라, 그냥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이셨고, 게다가 조상들이 물려주셨던 모든 땅마저도 다 잃어버려서, 정말 작은 밭 하나만 농사를 짓던 그분이셨지만, 족보를 꺼내놓기만 하면, 마치 왕이 된 것처럼 그렇게 자신만만해하시면서, 자부심을 갖게 해 주셨던 그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납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제 마음 가운데 굉장한 자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국민학교에서 다른 친구들하고 싸울 때면, 내가 그래도 세종대왕의 후손이라고 그렇게 큰소리 뻥뻥 쳤던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라고 하는 이 성경책에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을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마태복음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이 족보를 통해서 전달해 주려고 하는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인데요.

우리 큰 아버님께서 늘 족보를 펼쳐들 때면,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설명해 준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을 설명하고, 그리고 밀성군 소재의 영의정을 지내셨던 분들 몇몇을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우리가 주목해 봐야 될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제일 주목해 볼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1절에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이 특별하게 언급이 되고 있는데요. 이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큰 업적을 이루었고, 뭔가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정말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물론 다윗은 엄청난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두 사람을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주셨던 약속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해주셨던 그 약속, 그리고 다윗에게 해주셨던 바로 그 약속들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을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해 주셨습니까? 갈대와 우르 지방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내 주셔서 해 주셨던 약속이 무엇이냐면,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줄 텐데, 너로 인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는, 그런 어마어마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이때 아브라함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냐면 아들 하나도 없었을 때였습니다. 아들을 낳지도 못했던 그 당시에, 자식을 낳지 못한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여겨지던 바로 그 시절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기뻐하고 좋아하고 하는 그 시절에, 아기가 없어서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절망 가운데 있었던,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냐면,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는 약속이 그런데, 그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이냐면 보통 약속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서 모든 민족, 엄청난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해 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아브라함의 이름이 언급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런 약속의 아들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바로 그 약속이 누구에게서 성취되는가? 바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아들이며, 바로 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회복하게 되는 엄청난 은혜를 누리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이 족보에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은 100세에 낳았던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을 100세 때 안게 된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기적이기는 했고, 그것은 엄청난 감사의 제목이었기는 했지만, 그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 아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삶을 살다가 죽어버린 그냥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상이 이루지 못했던,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누구에게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오늘 이 족보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지금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번역을 해놨는데, 헬라어 단어를 보면 그냥 아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로 오셨다고 오늘 성경 말씀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해 주셨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이 어느 날 그 허름한 성막을 보면서 그의 마음 가운데 갈망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왕궁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가 들어 있는 저 성막은 너무나도 낡았고, 너무나도 보잘것이 없다고 하는 그 사실에 안타까워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거룩한 열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정을 가지고 있을 때, 선지자는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 그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성전을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이 무엇이냐면, 네가 성전을 지을 것이 아니라, 네가 낳은 아들 그 아들을 통해서, 성전을 짓게 할 거라고 하는 약속입니다.

그 아들이 누구였죠? 솔로몬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이 준비해 놓은 여러 가지 기자재들을 이용해서, 그래서 엄청난 화려하고 멋있는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첫 번째 성전이죠. 솔로몬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다윗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이 성전을 아름답게 짓고 하나님 앞에 봉헌을 하게 되는 그런 엄청난 역사를 솔로몬이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 성전이 지어졌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이라고 하는 곳은 사람이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전인 것이죠. 죄가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가서 용서를 받는 것이고, 연약한 사람들이 그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그 힘 주심을 얻고 돌아오는 것이고, 성전에 가서 거기서 은혜를 받고 돌아오는 것이 바로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성전에 갔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율법에 따라 종교의식이 진행되고 있고 번제가 들여지고 있고 속죄제가 들여지고 있고 여러 가지 화목제가 들여지고 있는 종교의식은 활발하게 살아 움직였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거기는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갈취하고, 여러 가지 사악한 일들만 일어나고 있을 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이 있어야 될 그 성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답답한 상황들이 일어나고 있을 그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갈망이 있는 것이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연결되게 만들어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갈망이 생기고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뒤집어버렸어요. 성전 마당에서 물건들을 팔고 돈을 바꾸어주고 더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성전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을 뒤엎어 버리시고, 누가 이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느냐?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집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인데, 그런 것이 되지 않고, 이 세상의 장사치 무리가 되어버린 그 성전을 뒤엎어 버리신, 그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사로 삼아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고, 결국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전을 세우시는 자, 하나님의 약속 다윗에게 주셨던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짓게 만들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늘 족보 가운데서는 다윗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다윗 왕이 보여주었던 평화의 왕국을 회복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 왕 때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이루어졌습니다. 완벽한 태평성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시절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창하고 가장 강력한 나라를 이루었던 시대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다윗왕에게 엎드렸고, 주변 나라들로부터 곡물을 받아들였고 엄청난 국력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은 점점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방 민족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은 갈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언제 다시 태평성대가 돌아올 것인가? 언제 정말 제대로 된 왕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삶을 평안하게 만들고, 아무 걱정 없게 만들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진짜 우리들의 왕은 “언제 올 수가 있겠는가?”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정부, 그리고 그 로마의 총독이나, 그리고 헤롯 대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착취하기만 했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이름뿐인 왕, 왕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착취자 독재자로서의 기능만 있었던 그런 상황 가운데서, 갈망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누구신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이 이루었던 그 영화보다도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만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스라엘 민족의 왕, 만왕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특별히 족보는 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왕의 역할이 무엇이냐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잘 살게 만들고 걱정 없게 살게 만드는 것이죠. 모든 것을 바로잡아서, 시시비비를 잘 가리고, 법에 따라서 질서에 따라서 잘 움직이게 만드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왕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런 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늘 걱정과 근심 속에서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그것들을 이 세상의 왕들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죠.

사실 우리들의 문제는 이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 깊숙하게 들어 있는 죄악의 문제 때문에, 우리들의 문제가 근원이 되는 겁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에게 돈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죄악의 문제 때문에, 우리들의 문제가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죄를 제거해 주시고 온전하게 만들어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다윗에게 해주셨던 그 약속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그 약속, 그리고 다윗에게 해 주셨던 이 약속은 언제 했던 약속입니까? 아주 먼 옛날에 했던 약속이에요. 까마득한 그 옛날 수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해주셨던 그 약속이고, 수천 년 전에 다윗에게 해 주셨던 그 약속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잊을 만한 것이죠.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을 만한, 그런 그럴 법한, 그런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다윗에게 해주셨던 바로 그 약속을 바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약속을 잊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물론 모든 약속을 잊는 것은 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정말 사랑한다고 하면, 그 약속을 잊을 수가 없어요.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이것을 해주겠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 약속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 장모님이 우리 제 아내에게 예전에 피아노를 사준 적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근데 가세가 기울어서 그 피아노를 처분해야만 했었고, 그때 피아노를 치던 제 아내, 어렸을 때 그 아내는 너무나도 슬펐는데, 그때 가난했던 그 어머니께서 우리 아내에게 했던 말이 뭐냐면, “내가 피아노 꼭 사줄게”라고 약속을 했다고 그래요. 근데 사줬냐면 못 사줬어요. 그 뒤로는 그 뒤로 못 사줬는데, 저희가 미국에 가서 살다가 이사를 한국으로 돌아와서 있는데, 우리 장모님이 우리 집에 와서 그 피아노를 보더니만, “피아노 있구나.” 그때 그 옛날 내가 너에게 피아노 사줄게 했던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거죠. 왜? 사랑하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죠. 우리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약속들을 다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바로 그 약속 다윗에게 해주셨던 바로 그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 약속을 마침내 이루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데요.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고 계시고, 너희가 기도하고 울부짖으면, 내가 듣겠다고 말씀해 주시고, 나를 찾는 자마다 내가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때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아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우리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 것만 같아서, 우리들의 마음이 답답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우리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그러면 우리들의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서 걸어갈 수가 있었지만, 파도가 치는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고 그 바닷물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 바라보면, 당장 망할 것 같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보면 너무나도 힘들어서, “이제는 끝장이로구나.” 생각될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일수록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이구나. 그 옛날 잊어버릴 뻔했던 그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고, 결국은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함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이 족보를 살펴보면 아주 특이한 점들이 더 들어 있는데요. 거기에는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하는 점입니다. 물론 족보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 성경에도 여성들의 이름이 들어간 족보들이 많이 등장하기는 합니다마는, 특별히 이 족보의 가운데는 여러 명의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족보 전체를 보면 총 5명의 여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만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3절 말씀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고 하는 말씀이 기록돼 있고요. 5절 말씀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 그리고 또 5절 말씀에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다말이라고 하는 여인,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 룻이라고 하는 여인의 공통점이 뭘까요? 공통점 한번 찾아보세요. 다말, 라합, 룻, 공통점이 여자죠. 뭐, 그거 말고 그 공통점이 뭐냐면, 아마 이방인이었을 거라고 하는 것이 공통점일 수도 있을 겁니다. 라합이라고 하는 사람은 가나안 사람이었고, 그리고 룻이라고 하는 여인은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말의 경우는 그 사람이 이방인이었는지, 유대인이었는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자료에 보면 이방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자료에 보면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다말이 이방인 출신이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만일 이방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세주로 오셨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보다도 훨씬 더 더 깊은 의미가 이 여인들에게서 발견될 수가 있겠는데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다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라합이라고 하는 사람은 여리고성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 사람들은 어떤 운명이 있었는가? 모두가 다 멸망당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그래서 그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진멸해 버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이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도 이스라엘 민족의 공격과 더불어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운명에 처해 있던 여인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정탐꾼들이 다른 집이 아니라, 그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정탐꾼과 만난 라합은 믿음을 고백하게 되었고, 결국 그 라합과 그 집안사람들이 그 전쟁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그 사람들은 보호받아서, 구원을 받고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하는 그 기적의 이야기가 라합의 이야기죠.

룻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룻의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룻이라고 하는 사람은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모압 여인이었는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과부로 살아야만 하든지, 아니면 당시의 법에 따라서 시동생과 결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어떤 법이 있었냐면 형사취수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형이 자식이 없이 죽을 경우에는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을 해서 그래서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동생과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또 그 남편의 동생이 그 형수를 먹여 살려야 하는 법이 바로 형사 취수의 법이었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무슨 이런 이상한 법이 있나 싶겠지만,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 있었던 그런 법으로서 당시에 남성 중심으로 경제가 움직여지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남편이 죽으면 그 미망인이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그 시절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만들고 다시 살릴 가계를 있게 만드는, 그러한 은혜의 법이 이 형사취수의 법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 룻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시동생이 없어요. 그 나오미의 가정에 나오미의 남편도 죽고 나오미의 두 아들도 다 죽어버려서, 더 이상 이 룻에게 형사 취수 제도에 따라서, 재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 가운데서, 평생 이 룻은 가난하게 그리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아기도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 룻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룻기라고 하는 성경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룻에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룻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룻의 먼 친척이었던 보아스가 친 형제 중에 없다고 한다면 그 친족 가운데서 그런 일을 대신해야만 했었는데, 가까운 친척이 아니라 좀 한 단계 먼 친척이었던 그 보아스가 룻을 어여쁘게 여기고 자신이 친히 그 구세주가 되어 주어서, 그래서 룻의 남편이 되었고 결국 그런 결혼을 통해서 아기를 낳아 결국 그 자손 자손이 다윗의 다윗이 탄생하기까지 결국은 룻이라고 하는 정말 기구한 여인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고, 이제 다시 아기를 안을 수 있는 그런 기쁨을 누리게 되고, 경제적으로 다시 잘 살 수 있는 그런 회복을 누리게 되는 엄청난 은혜를 누린 이야기가 룻의 이야기인 것이죠.

그래도 여기까지 좀 이해가 될 겁니다. 하지만 다말의 경우는 좀 더 충격적입니다. 다말은 누구와의 관계 가운데서 아기를 낳았냐면, 시아버지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그런 충격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다말도 역시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되었는가? 혼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살다가 자기 시아버지가 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변장해서 마치 창기인 것처럼 변장을 해서, 결국 시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리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고 세상에 이런 막장 드라마가 어디에 있는가 싶을 정도의 이야기이지만 창세기 38장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결코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38장에서는 뭐라고 설명하냐면, 이 시아버지가 자기 며느리를 보면서 “네가 나보다 더 옳다. 네가 잘했다.” 칭찬하고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다말을 축하해 주면서, 정말 좋아해 주는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과 그 당시의 생각의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말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자기 남편이 죽어버렸어요. 엘이라고 하는 사람과 결혼했는데, 그 엘이 죽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형사취수 제도에 따라서 시아버지는 그의 동생인 오난을 남편으로 주었습니다. 자기 며느리에게 동생을 남편으로 준 거죠. 그런데 그 오난마저도 죽어버렸습니다. 그럼 이제 또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역시 또 죽었기 때문에 오난의 동생이었던 셀라를 다말이라고 하는 여인에게 남편으로 주어야만 합니다. 당시 그게 법이었고, 그게 형사취수 제도의 법칙에 따라서 다말은 셀라와 결혼을 해서 그래서 살게끔 되어 있는 것이 그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근데 셀라가 몇 살이었냐면, 굉장히 어린아이였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는지, 아무튼 아튼 성년이 안 된 아이였기 때문에, 그 셀라를 그 자기 며느리에게 주지를 않은 겁니다. 유다가 그래서 다말은 할 수 없이,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이제 셀라가 성년이 되었을 때, 이제 남편이 우리 시아버지께서 그 셀라를 나에게 남편으로 줄 것인가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유다가 셀라를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지 않는 겁니다. 왜 안 줬을까요? 또 죽을까 봐. 이 여자는 뭐라고 그러죠? 우리나라 말로 남편을 잡아먹는 그런 여인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안 주는 겁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남편을 주지 않는 그 상황 가운데서, 다말은 변장을 해서 시아버지와의 관계를 맺고 아들을 낳은 겁니다.

과부가 되었던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유다가 그 다말을 죽이려고 처형하려고 하려고 했을 때, 다말은 내가 임신한 것은 이 물건의 주인이 나에게 임신케 했다고 하면서 보여주는데,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사실은 셀라를 주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만일 셀라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다음 형사 취수 제도에 따라서 시아버지가 그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었던 것인데, 결국 그렇게 된 것이죠. 우리가 보기에는 좀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의 관점으로 본다면, 남편들이 죽어버려서 고통 가운데 슬픔 가운데 정말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가던 그 다말에게 결국은 남편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은 아이를 안게 되었고 결국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인생을 만들어준 이야기가 바로 다말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 족보 가운데 등장한 이야기들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제는 소망이 없고 이제는 아무런 기쁨도 아무런 소망도 바라볼 수 없었던 그런 여인들에게 놀랍게도 은혜가 주어져서 다시 새 힘과 용기를 얻고 자식을 낳고 대를 잇는 그런 기적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기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도 역시 다말과 같은 처지에 있고, 그리고 룻과 같은 처지에 있고, 그리고 또 누구죠? 라합과 같은 처지에 있던 우리들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을 지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절망적인 모습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또한 우리들의 육신은 날마다 정말 약해져 가는 것 같고, 여러 가지 사업은 지지부진하고 멸망당할 것 같고, 때로는 가정이 깨어져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자가 떠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충격적인 이야기들의 연속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향해서 들려줄 복음의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집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대답해줄 말은 뭐예요? “너 자신을 알라.”밖에 없어요. 잘해보지. 잘 살지. 왜 그랬어? 바르게 살지. 왜 그랬어?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는 게 문제예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마음을 비워 욕심을 내려놔.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가 뭐예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하는 게 우리의 문제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저 하늘 높이 있으면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 왜 그래?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는데 왜 안 지키고, 그렇게 고통을 당하니? 율법이나 잘 지켜. 그 말만 하고 하늘 위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그 모습에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거예요. 우리의 아픔을 만지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주님, 룻에게 보아스처럼 다가오시고, 다말에게 남편으로 새롭게 다가오시는, 그 주님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 바로 성탄절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참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귀하고 복된 기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주변의 모습들은 여전히 실망스러운 것밖에 없고, 우리들의 육신을 보면 망가지고 더 더 후패해져 갈 수밖에 없는 것만을 바라보고, 우리들의 재정 상황을 보면 더 꼬여만 가고,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더 꼬여져만 가는 이 시대에 우리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그 주님께 소망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다시 일어서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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