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는 시 가운데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라고 하는 사람이 쓴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 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보여주실까요? “가지 않은 길. 누렇게 물든 숲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네. 아쉽지만 두 길을 다 걸을 수는 없어. 어차피 한 길만 가야 하는 인생이니,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망설였지. 이 길이 어디로 인도하는지 최대한 멀리까지 보려고 했어. 저 끝 덤블에서 꺾인 곳까지. 그리곤 다른 길을 택했지. 이 길이나 저 길이나 큰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더 나은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풀이 무성한 길, 아직 사람들이 많이 다녀보지 않은 길, 이 길도 다니다 보면, 결국 다른 길처럼 되겠지만. 그날 아침 두 길은 비슷해 보였어.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아직 아무 발자국도 없는 길. 그래 다른 길은 나중에 걷기로 하고 남겨둔 셈이야.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 한 번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으니, 과연 다시 돌아와 그 길을 걸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어. 먼 훗날 나는 숨을 내쉬며 이야기하겠지. 아주 아주 먼 옛날, 그때 거기서 숲에 두 갈래 길이 있었어. 그런데 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았던 길을 선택했었어. 그게 모든 걸 바꾸었다고.” 좀 시는 비슷한데, 좀 느낌이 좀 다르죠? 아무튼 번역을 새로 해서, 소개를 해 드렸는데요.
제가 미국에 처음 유학을 갔을 때 다녔던 고든 콘웰(Gordon-Conwell)이라고 하는 학교를 다니면서. 좀 멀리 떨어진 뉴햄프셔에 가서 거기서 봉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교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생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가를 다녀오기도 했었는데요. 한번 사진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이게 바로 그 로버트 프로스트가 살고 있던 그 생가였고, 제가 섬기던 그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가서 보고 이 작가가, 이 시인이 걸었던 그 숲길을 보면서, 정말 아름답고 멋진 그 숲에서, 이렇게 멋지고 좋은 시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늘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아주 작은 선택에서부터, 아주 중요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작은 선택이라고 한다면 어떤 선택이 있을까요? “오늘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까?” “과연 어떤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라고 하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 같은 그런 작은 선택에서부터, 좀 더 인생의 중요한 그런 선택들도 있을 겁니다. 어느 동네에 가서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는 어떤 학교가 좋을 것인가? 내가 직업을 선택한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더 중요한 결정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정말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이 우리들에게 있는데요. 그러한 선택을 할 때마다 우리들은 마음속에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모든 가능성들은 다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불안한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정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도 그래요. 이것을 선택해야 될지, 저것을 선택해야 될지, 늘 시장에 가서 무엇을 앞에 놓고 결정하지 못해서 늘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해 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 그것이죠.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좋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그런 고민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위해서 그 신부감을 구해오라고 하는 임무를 맡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을 위해서, 리브가라고 하는 여인을 선택해서, 그리고 데리고 오게 된다고 하는 그 이야기 중에서 한 짤막한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종에게 부탁을 한 것이죠. 너는 내 아들을 위해서 신부감을 하나 찾아오라고 임무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감을 어디서 구해와야 하는가? 이 가나안 족속들 중에서 구하지 말고, 내 동포에게 가서, 내 동족들에게 가서 거기서 신부감을 구해오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에 살던 이 아브라함의 종이,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서, 아주 먼 저곳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지금으로 하면 이라크 지역까지, 그 먼 길을 가서 결국 신붓감을 구해 오게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길을 가게 된 것이죠. 하나님 순적한 길을 보여주셔서, 평탄한 길을 보여주셔서, 그래서 주인의 아들을 위해서, 좋은 신부감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그 동포들에게로 가게 되었을 때 마침 거기에 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누구였습니까? 아브라함의 동생의 아들의 딸이니까 뭐죠? 조카 손자 조카 손자가 되는 조카 손자인가요? 뭔가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만나게 되어서, 이 여인이 과연 이삭을 위해서 좋은 신부감이 될 수 있을 것인지 확인을 했고, 그래서 “아, 이 사람이다”라고 하는 마음의 확신이 생겨서, 그 여인을 데리고 이삭에게로 오게 되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의 일부를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식으로 결혼 배우자를 찾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은 아니라고 하는 점을 먼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나온 이야기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는데요. 그러나 이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이 다 우리들에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고 하면, 그 가운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영적인 교훈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모든 형태를 다 따를 필요는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이삭의 아내를 구한 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너 연애 결혼하면 안 된다. 신부감은 그렇게 찾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짝지어주고, 부모가 결혼하라고 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된다”라고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결혼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찾아야 될 것, 연애결혼이 불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나쁜 일이고, 오로지 부모가 결정을 해야 된다. “부모가 찾아서 해줘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당시에는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거래와 같았어요. 신부감을 돈 주고 사 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종이 폐물을 가지고 가서, 지참금을 가지고 가서, 부모에게 예물을 드리고, 돈을 드리고 신부감을 사 오는 것과 같은 그런 결혼이 있었던 그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들에게 오늘날 기준으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좋은 짝을 선택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종이 여행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종의 기도를 들으셔서, 정말 이삭을 위해서 좋은 신부감 리브가라고 하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고, 그래서 이런 결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결혼과 같은 이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아니 결혼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결정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될 것인가? 우리가 어떤 대학을 선택해야 될 것인가? 우리가 어디서 비즈니스를 해야 될 것인가? 수많은 결정들을 해야 할 때,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가? 어떻게 해야만 우리들에게 후회함이 없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게 우리들의 고민이고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처럼 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브라함의 종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이 여인이 과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그 내게 인도하신 그 여인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가 한 가지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당신의 낙타에게도 내가 물을 주겠다고 그렇게 반응이 나오면, 그러면 그 여자가 “과연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사람인 줄 알고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우리들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렇게 해서 선택한 사람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인도하심의 결과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을 드린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 아브라함의 종처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내가 오늘 미팅을 가서 신부감을 고르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신 신붓감이라고 한다면, 오늘 그 여성이 나올 때 빨간 옷을 입고 나오면 퇴짜. 그런데 노란 옷을 입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가서 딱 만났는데 노란 옷 입고 나오면 결혼해야 될까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면 성경을 아주 크게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발견합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 제안을 하고, 그래서 그 둘 중에 하나를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시면, 그것을 선택하는 게 그게 성경적인 방법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어느 회사로 가야 됩니까? 이 a라고 하는 회사가 있고 b라고 하는 회사가 있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회사인 줄 알고 가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침을 뱉고 한번 때려보겠습니다. 침이 이쪽으로 튀면 이쪽 회사로 가고, 침이 저쪽으로 튀면, 저쪽 회사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가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나요? 안 됩니다. 종종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미신적으로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방법으로, 내가 여러 가지 안들을 제안해 놓고, 그리고 이것이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을 오해한 미신적인 행동이라고 하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미신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무속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신 무속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 확신하게 만들고,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냥 미신에 따라서, 사주팔자 그리고 관상, 이런 것에 따라서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고, 아무런 타당한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그날이 손 있는 날이니까, 안 돼. 그냥 그것은 미신에서 안 된다고 하니까, 안 돼 하면서, 그 미신과 무속을 따라가게 되면, 결국 몇 개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우연히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 인생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종이 했던 이 말이 마치 미신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오해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어떻게 신붓감을 찾으러 갔는가?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나는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은 채 하나님 저는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하면서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나 눈 감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말이 나를 태우고 있는 이 낙타가 가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겠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믿고 가겠습니다”라고 따라간 것이 결코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종은 어떻게 갔습니까? 아브라함의 본토 친척의 집을 가야 하니까, 저 이라크 지방까지, 내가 잘…. 그때는 티맵도 없고, 카카오 맵도 없었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서, 아브라함의 본래 종족에게로 찾아간 겁니다. 아브라함이 가이드라인을 주었기 때문에 그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찾아간 것이죠. 그리고 그 마을에서 아브라함의 종족들 가운데서 여러 여성들을 만나게 되었을 겁니다.
첫 번째 만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몇 번째 만난 여인일 수도 있겠는데, 그 여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여인이다”라고 말해 준 것이 아니라, 이 아브라함의 종의 마음 가운데, “아, 저 여인이 참 참해 보이는구나” “내 주인의 아들 이삭을 위해 저런 여인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라고 하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속에 어떤 기준과, 마음속의 어떤 판단에 의해서, “저 여인이라고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하는 일종의 판단을 누가 내렸어요? 아브라함의 종이 내린 겁니다. 그러고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만일 내가 물을 달라고 하면, 이 여인이 어떻게 나올까? 그것은 침이 이쪽으로 튀냐? 저쪽으로 튀냐에 따라서 내가 결정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문이었어요? 이 여인이 인품이 괜찮은 여인인가를 알아보겠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첫 인상으로 볼 때, 그냥 겉으로 보았을 때는 건강해 보이고 아리따워 보이고, 그리고 모든 면이 참 참해 보이는 이 여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겉으로 보았을 때는, 이 여인이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속마음은 그 사람의 인품은 내가 눈으로 보아서는 확인할 수 없으니, 그 사람의 인품을 내가 한번 확인해 봐야 되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 과연 이 여인이 나에게 물을 줄 것인가? 아니면 쌀쌀맞게 물을 주지 않을 것인가? 물만 줄 것인가? 아니면 물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낙타도 물을 먹이겠다고, 그렇게 내가 요청하지 않은 한 그런 친절까지 베푸는,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여인인가를 알아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정말 그렇게 마음이 따뜻한 여인이라고 한다면 합격점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 당시 그 여인들 중에 물을 줄 뿐만 아니라, 낙타에게 물을 먹이도록 그렇게 베풀 요청하지 아니한, 그 자손 잡이까지 베풀 가능성이 많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별로 없었을까요? 대부분이 다 그렇게 할 겁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누군가 물을 달라고 한다면, 여러분 그냥 그냥 귀찮은 듯, 물을 딱 주겠습니까? 우리 권사님들이라고 한다면, 그분들에게 그런 요청을 하는 분들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물도 주고, 선풍기도 쐬어줄 거 아니에요? 더운 날에. 이리 와서 에어컨 앞에서 시원하게 땀 좀 식히면서, 물이라도 드시라고 친절을 베풀 거 아니에요?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그게 보편적인 모습이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그네들을 보면 음식도 대접하고 물도 대접하고 좋게 대접하는 것이 그 당시에 문화였고,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특별하게 더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정도는 기본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아브라함의 종의 마음이, 그런데 만에 하나, 어떤 한 사람은 놀부 마누라 같은 그런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걸러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 질문을 던진 것이죠. 하나님이 이쪽이냐 저쪽이냐 점지해 주는 것을 기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의 선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폐물을 드리면서, 당신의 딸을 우리 주인의 아들의 며느리감으로 구해오라고 해서 이렇게 폐물을 드린다고 했을 때, 그쪽에서 승낙해 주는지 승낙해 주지 않는지,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서 이 여인을 데리고 가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우리가 발견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내 판단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신비한 표징을 보여준다거나, 어떠한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여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뜻에 따라서 생각해야 하고, 판단해야 되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결정을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죠. 빌립보서 2장 13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누구시니?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무엇을 두고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러한 마음이 생기게 돼요. 소원이 생기게 돼요. 이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이것을 헌신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데 그것이 내 마음이기도 하고 또 100%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넣어주신 소원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은 나의 선택이면서 그와 동시에 100%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무런 판단에 의지가 없이 그냥 눈먼 장림처럼, 그냥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끌려왔다가, 그래서 아무나 만나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라고 하니까, 이 사람을 선택해서 그래서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종은 분명하게 그 집을 향해서, 그 동네를 향해서 가게 되었고,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한 여인을 보았을 때, 저 여인이 좋겠다고 판단을 했고, 그 판단을 통해서 제안을 했고, 그래서 승낙을 받아서 데리고 가게 되었는데, 그 모든 일들을 자기가 결정하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종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27절의 말씀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종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모든 것들을 다 결정하면서도 이것이 내가 똑똑하기 때문에, 내가 잘나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린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선택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 가운데 두 개의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길 가운데 우리는 이 길이 아니라 요 길을 선택하게 될 텐데요. 그 길을 선택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길이 아니라 저쪽 길로 갔었더라고 한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생각들이 종종 떠오르게 되는 것이죠. 왜 자꾸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 길이 더 커 보이죠? 남의 떡이 커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더 커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이 선택한 이 선택이 잘못되면 어떡할까 저 길이 훨씬 더 좋았으면 어떨까 할까? 우리가 불안한 마음들이 있는데 그때 우리가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며 영광 올려드릴 필요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 18절의 말씀에 우리를 향한 삶의 자세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우리 자녀를 향해서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이가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면 어떻게 할까 불안해하고 할 때 여러분들이라고 한다면 그 자녀들을 향해서 뭐라고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걱정하지 마. 담대하게 그 자전거를 한번 페달을 밟아봐.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겠어요? 여기를 갈까? 저 길을 갈까?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까? “괜찮아, 가봐.” “네가 원하는 그 길을 한번 달려가 봐. 후회할 것 없이 달려가 봐.”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보고 계시는 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불안해하면서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후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선택을 해야 되고,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서 때로는 후회할 일들이 많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이걸 선택할 것이 아니라 다르게 선택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때 잘못 선택해서 이런 나쁜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 후회할 일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후회할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돼요?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는 거야 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인권이 그러잖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그러잖아요?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나간 것 아픈 기억 모두 잊어버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향해서 나아간 것이죠. 어쩌면 2024년을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정과 선택들을 했는데 때로는 아픈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던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자책하고 슬퍼하고 원망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의 실수와 나의 잘못된 선택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의 실수마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이 무엇일까를 기대하며 기도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아주 참 슬픈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왔던 한 가정이 있었는데요. 영어도 잘하지도 못하시는 분들인데 큰 결심을 하고 친구가 오라고 하니까 미국으로 이민을 온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미국에 와서 잘 정착해 나가느라고, 정말 많이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기도 했었지만, 그런대로 어느 정도 정착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가 아주 큰 슬픔을 당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집의 딸이 갑자기 죽은 겁니다. 미국에 와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떤 일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는데요. 그때 그 부모가 그 앞에서 펑펑 울었어요. 울면서 했던 말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 제가 잘못 생각했나 봐요. 미국에 오지 말걸 그랬나 봐요. 내가 잘못 선택했나 봐요.” 이 딸을 잃는 그 앞에서 정말 자기 자신을 자책하면서,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분을 앞에서 제가 위로를 해줘야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말이 무엇이냐 하면, “집사님, 그때 했던 그 결정이 잘못된 결정은 아니었어요. 그때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에 온다고 하는 결정을 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고 운전하게 해 주었더니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서 다쳤어요. 그러면 운전을 가르치지 말아야 했었나요? 요리하다가 불이 나서 재산을 다 태워버렸어요. 불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야 옳았을까요? 아니에요. 그 당시 그 순간에 그 선택들은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결과를 보면서 슬퍼하고 결과를 보면서 힘들어요. 하지만 사실은 누구라도 그 순간에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혼낼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때로는 정말 아픈 소리를 해줄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 돼서 어려운 상황을 겪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우리들의 실수와 잘못이 그것 때문에 고통스럽고 정말 견디지 못해서 한순간도 일어서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도 우리들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사용하셔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지 기대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2024년을 마무리하는 이 마지막 주간에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 후회와 회한 여러 가지 안타까운 마음들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고 한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렇게 후회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이기에 우리의 책임이긴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것마저도 사용하셔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 저희들은 너무 연약해서 잘못 선택할 때도 많지만, 그러나 이것마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소망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늘 넘어집니다. 실수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주셨고,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기 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