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동원됐는가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3만 명을 선발했다고 합니다.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해서, 레바논으로 보내어져서, 레바논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만든 일꾼들, 3만 명인데요. 이 3만 명을 3교대로 해서, 1만 명씩 레바논에서 한 달간 일하게 하고, 그리고 순번대로 계속 바꾸어서 일하게 해서, 한 달은 일하고 두 달은 집에서 쉬게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순번제로 해서, 3만 명의 일꾼들이 레바논에 가서 순번제로 일을 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짐꾼은 몇만 명인가요? 7만 명, 채석군은 몇 몇 명인가요? 8만 명. 그러니까, 지금 일꾼들, 짐꾼들, 채석군만 해도 총 몇만 명입니까? 18만 명이 동원이 됐다고 오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많은 숫자를 동원해야만 했었던 것이죠. 아무리 큰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그 큰 프로젝트를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큰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그 큰 프로젝트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프로젝트라고 할지라도,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그 일을 나누게 되면, 그 일하는 분량이 작아지게 되는 거죠. 한 사람이 해야 할 분량이 작아지게 되는 겁니다. 혼자서 이 성전을 다 지으라고 하면, 지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서 지금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일꾼이 3만 명, 짐꾼이 7만 명, 채석꾼이 8만 명이라고 하는, 이 18만 명의 일꾼들이 달라붙었기 때문에, 여럿이서 힘을 합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꾼들의 경우에는 3교대를 하게 되었는데,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일을 계속해서 돌린 것이 아니라, 한 달은 일하고 두 달은 쉬고, 또 두 달 쉰 다음에 다시 한 달 일하고, 이런 방식으로 해서 일을 시켰는데요. 일을 한 달도 안 쉬고, 계속해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좋은가요? 한 달 일하고, 두 달 쉬는 게 좋은가요? 아주 단편적인 생각으로는 3만 명을 한꺼번에 집어넣어 가지고, 한꺼번에 모든 일을 다 하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그게 아니고 쉬어가면서 일을 해야, 또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지금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기 위해서, 여러 일꾼들을 동원했는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되, 또 그 사람들이 일하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그래서 한 사람이 감당해야 될 일의 분량을 줄였다고 하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됐기 때문에, 한 사람이 기여해야 하는 분량이 많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내가 어느 정도 일을 하면 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큰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다 나누어서, 우리가 조금씩만 지고 간다고 한다면, 이것이 무거운 것도 아니고, 이것을 쉽게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이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어떻게 진행해야 되겠는가?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서, 감당하는 것이 솔로몬의 지혜요, 우리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주 큰 능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능력이 많지 않아서,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능력이 많아 가지고, 많은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아, 나는 저 정도는 하지 못하는데, 나는 저 정도의 능력은 되지 않는데 하면서, 기가 죽고, 아, 나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고, 그래서 창피하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일을 다, 그리고 많이 감당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양을 기여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헌신을 하면 되는 것이죠. 적은 분량을 내가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 적은 분량들이 모이고 모이고 모여서, 큰 프로젝트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는 이 하나의 원리를 우리들이 잘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찾는가? 큰 걸 내놔라. 큰 헌신을 요구하라. 어마어마한 것을 보여줘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기신 것을 찾으시는 것이죠. 우리에게 한 달란트를 주셨다고 한다면, 한 달란트만큼의 일을 했느냐를 물으시는 거예요. 두 달란트를 주셨다고 한다면, 두 달란트만큼의 일을 했느냐를 찾으시는 것이죠. 다섯 달란트를 주셨다고 한다면, 다섯 달란트만큼의 일을 했는가를 보시는 것이지, 한 달란트 맞은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의 일을 하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내가 많은 것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그 사실로,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나보다 젊고, 저 사람은 나보다 재정적인 능력이 많고,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나는 내 힘이 부족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이야기해 봅시다. “생긴 만큼만 하면 됩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성전 앞에 앉아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앞에 헌금궤가 놓여져 있었는데요. 한 여인이 어 그 헌금궤 앞에 다가가서 동전 두 잎을 그 안에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헌금궤가 어떻게 생겼냐면, 이렇게 그 돈을 집어넣게 되면, 그 돈이 굴러서 밑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헌금 두 잎을 갖다 집어넣게 되면, 그 돈이 굴러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거예요. 딸랑 해서, 툭. 딸랑 하면서 소리 내면서 뚝 떨어지는,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얼마 했는지 잘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는 누가 얼마만큼의 헌금을 했는지가 다 소리로 들리는 거예요. 동전 두잎을 집어넣으면, 그 동전 두잎 떨어지는 소리가 짜그당 짜그당하고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많은 헌금을 하지 못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헌금 투입을 하게 되었는데, 사실 그렇게 헌금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헌금을 이만큼 들고 가가지고, 그 헌금궤 앞에다가 쫙 부어 넣으면, 그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막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쫙 떨어지는 걸 보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보면서, 야 누가 저렇게 많이 넣었는가 하면서, 시선이 집중이 되면서, 아 저 사람은 많이 넣었구나. 사람들이 박수도 쳐주고 하게 되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헌금 들어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났던 그 헌금궤 앞에서, 가난한 여인이 가서 동전 투입을 집어넣으려고 하니 얼마나 좀 남부럽겠습니까? 좀 창피하게 느껴지지도 않겠습니까? 나는 이거밖에 없구나. 딸랑 딸랑 떨어지는 그거 집어넣기가 참 창피할 수도 있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1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시는가? 얼마나 많은 액수를 집어넣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를 가지고 있고, 얼마의 상황 가운데서 얼마의 헌신을 했는가를 보는 것이죠. 그래서 전부를 헌신했다라고 하는 그 점을 인정해 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야 저 사람은 이것도 하고, 저 사람은 저것도 하고, 저 사람은 이렇게 큰 일도 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데, 나는 나이도 많고, 나는 힘도 없고, 나는 능력도 없어서, 나 같은 사람이 하는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내가 하는 이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그것이 되는 것이고, 성전 건축을 할 때도 혼자서 많은 것을 다 한 것이 아니라, 3만 명이라고 하는 일꾼들이 7만 명이라고 하는 짐꾼들이 8만 명이라고 하는 채석꾼들이 가서 그 한 사람이 다 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노력 노력 노력들이 다 합쳐져서,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 일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헌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들을 하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 있는 산하 신학대학이 총신대학교입니다. 미국에는 CRC 교단이라고 하는 교단이 있는데 그 교단의 산하 신학교는 칼빈대학교 칼빈 신학교가 있고요. 또 PCA 교단에서는 카버넌트나 리폼드 신학교가 있고, 또 pcusa에는 프린스턴 신학교가 있고 또 여러 가지 신학교들이 있는데 아무튼 각 교단마다 이런 목회자들을 양성하기도 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그런 대학이 있는데, 우리 교단에는 총신대학교가 우리 교단 산하 신학대학교입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도 나오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에 우리 총신대학교에서 무얼 하느냐면 기숙사를 건축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프로젝트가 얼마냐 하면 200억 프로젝트입니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근데 200억 프로젝트에다가, 또 다른 프로젝트 하면 400억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프로젝트 하면 800억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대로 1단계는 200억 프로젝트부터 하겠다고 해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데, 수많은 교단 산하 교회들이 헌금들을 많이 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교회는 5억을 냈다. 어떤 교회는 10억 원을 냈다. 그러면서 많은 교회들이 교단 산하 신학교를 신학대학을 잘해 나가기 위해서 수많은 금액들을 헌금하고 있습니다. 보내주고 있고요. 또 장학금을 모급하는 데 있어서 어떤 교회는 20억을 냈다 어떤 교회는 10억을 냈다 막 그렇게 많이 하고 있는데, 제가 누구냐면은 총신대학교 총동창회장이 됐어요. 이래뵈어도. 그래서 아 우리도 좀 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드는데 내는 게 부끄러운 거예요. 어디는 몇 억을 냈다고 하고, 5억을 냈다고 하고, 10억을 냈다고 하고, 20억을 냈다고 하는데, 천 단위로 내려고 하니까, 이거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우리는 이거밖에 못 내면 어떡하지? 그런 마음이 들기는 들지만, 빛도 나지도 않고, 너무나도 작아 보여서, 좀 주눅이 들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에 이렇게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만큼만 하면 되겠다 싶어서 조금만 했어요. 조금만 했어요. 교회 이름으로 조금만 했습니다. 근데 그게 사람들을 보면서, 비교가 되고, 사람들 보면서 여기는 조금밖에 안 했네. 어디는 많이 했네. 그렇게 생각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모든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에게 주어진 시간만큼, 나에게 주어진 능력만큼 조금만 하면 되겠다라고 해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서 그렇게 조금씩, 장학금은 매년 지금 도와주고 있지만, 기숙사 그 짓는 일에도 우리가 조금이지만 도왔으면 좋겠다 해서 했는데요. 모든 일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만 하면, 결국에는 그 조그마한 것들이 모여지고, 모여지고 3만 명이 모이고 7만 명이 모이고 8만 명이 모여서 성전이 건축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모든 일들에 우리가 기쁨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당을 지은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교회당이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너무 좋아요. 그냥 좋습니다. 좋습니까만 물어봤는데, “너무” 좋다고 얘기해 주시네요. 감사해요. 그런데 우리 저 상가에서 있을 때 어떤 권사님이 찾아왔어요. 목사님 500만 원을 딱 내놓더라고요. 500만 원을 내놓으면서, 목사님, 우리 교회가 아직 예배당이 없는데, 우리 교회 예배당을 짓는 일에 좀 사용됐으면 좋겠어요 하면서 헌금을 하는 거예요. 근데 500만 원으로 어떻게 지어요? 애게 500만 원을 어떻게 줘 하면서, 제가 콧방귀를 꼈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기쁨으로 너무나 좋아했을까요? 너무나도 좋아했어요. 왜? 이 500만 원 가지고는 성전을 우리 교회당을 지을 수 없지만, 그러나 이 500만 원이 모이고, 또 어떤 사람은 또 천만 원을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0만 원만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만 원만 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우리 전 교우가 마음을 다하고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모아서, 그래서 이 아름다운 예배당을 마련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걸 보면서 늘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나 개인의 힘은 500밖에 못하지만 나 개인은 100밖에 하지 못하지만, 나 개인은 다른 거 못하고, 기도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솔로몬의 성전을 지으면서 3만 명이 7만 명이 8만 명이 모여서 함께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나갔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 교회도 이렇게 조그마한 헌신들이 모여서, 이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고, 이렇게 좋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자신은 늘 우리를 보면서 절망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모습은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무엇인가?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맡기셨는가를 보는 게 믿음인 것이지요. 엘리야가 믿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엘리야는 나 혼자 남았다고 탄식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그 뒤에 또 있는데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그 엄청난 바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 그 아 왕의 그 위협, 이세벨 왕비의 그 위협 속에서 나 혼자 남았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어서 저 사람들과 싸우겠는가? 나 혼자 남아가지고 나 아무것도 알 수 없다면서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것이죠. 나 혼자의 능력을 보면 성전을 어떻게 지어요? 못 지어요? 나 혼자만 바라보면 어떻게 예배당을 줘요? 지을 수 없어요. 나 혼자만 바라보면 어떻게 악의 권세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어요? 없어요. 나 혼자만 바라보면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가 믿음이 있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 22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 선지자는 450명이로다.” 450명 앞에 서 있는 혼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주눅 들고 “나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나 혼자만 남았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한다면,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내가 나에게 힘이 나에게 없는 걸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바알 선지자들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싸워서 이기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드렸던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먹을 것이 있느냐 물어보았을 때, 그 가운데 어떤 한 꼬마 아이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님 앞으로 가져왔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에게. 이걸 이걸 누구 코에 붙이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많은 양의 돈을 달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5천 명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다고 한다면 만 명도 될 수 있는 그 어마어마한 인구를, 다 먹일 만한 능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지고 있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가를 물으셨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 앞에 드렸을 때,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버려야 될 생각이 무엇인가? 나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용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 7절 말씀 자주 제가 인용하고 있는데요.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누가 자라게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나는 심기만 하면 돼요. 저 사람은 물 주기만 하면 돼요.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만큼 했고, 저 사람은 이만큼 했고, 조금씩 조금씩 3만 명이 모으는 것이고, 7만 명이 모으는 것이고 8만 명이 모아서, 그 일들을 이루어 나갈 때, 그런데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에 사람한테 이야기합시다. 심자! 물 주자! 하나님이 기르신다! 할렐루야! 아멘!
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일꾼들 말고 사역을 감독하는 자가 3300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관리자들인데요. 이 사람들도 짐꾼으로 투입하는 게 좋을까요? 이 사람들도 어 채석꾼로 투입하는 게 좋을까요? 그게 좋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관리자가 필요한 것이죠. 관리자들은 뭘 합니까? 아무런 힘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일꾼들이 일을 하고 짐꾼들이 일을 하고 채석꾼들이 일을 하는데, 관리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하라고 저렇게 하라고 지시만 하는 것 같아요. 손 하나 까닥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이죠. 3만 명이 어떻게 3만 명으로서의 힘을 잘 체계적으로 낼 수 있는가? 7만 명 8만 명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이런 관리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아무리 많은 일꾼이 있다고 할지라도 조직화되지 아니하고, 그 조직화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면, 오합지졸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튼 솔로몬은 지혜의 왕답게 수많은 사람들을 일에 투입하고 그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게 만들었고, 또한 관리자들을 적절하게 투입해서 그 일꾼들이 서로 조직적으로 잘 체계적으로 일할 수 있게 성전이라고 하는 큰 프로젝트를 잘 해나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성전을 짓는 것과 같은 그런 일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을 수 있습니다. 선한 목적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죠. 전도를 해야 되는 선한 목적, 또는 우리가 여러 가지 일꾼 사람들을 길러내는 선한 목적, 다양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는데 지혜로운 방법, 그런 합력하는 마음 이 수많은 3만 명, 7만 명, 8만 명, 3300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한 목표를 향해서 잘 나가게 될 때 그때 아름다운 성전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협력하는 마음보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열하기가 쉽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서로 비교할 때 그렇게 되는 것이죠. 내가 하는 일과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서로 비교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저 사람이 더 높게 박수를 받는 것 같으면 시기하고 나를 높여주지 아니하면 원망하고, 하는 일들이 많이 있게 되겠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가 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수가 있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첫 번째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 5절 말씀에 보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잊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갈라디아서 6장 4절 5절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내가 잘 감당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어 일을 해 나가라 하는 그런 말씀이고요.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이죠. 내가 할 일이 있고 옆사람이 할 일이 있고 다른 사람이 할 일이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4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오.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몸이 듣는 것이면 냄새 받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 각 몸에 두셨으니”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의 역할, 어떤 사람은 코의 역할, 각각 다른 역할들을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래서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나에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비교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마음들이 솟아 오를 때가 많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인정하지 아니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러할 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주의 보혈의 피로 저희들의 악한 마음을 씻어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들을 잘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우리들에게 주신 성전 건축의 그 사명, 그 성전 건축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명들이 있겠죠. 그 사명들을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다해서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