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전을 다 지은 것을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은 것이죠. 솔로몬이 성전을 아름답게 짓고 그 내부 인테리어들을 잘 마련해 놓았으니까 이제 모든 성전 공사가 끝났으니까 이제는 다 끝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파트를 짓는다고 한다면 아파트를 멋있게 잘 지어 놓는 것으로 끝나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파트를 짓는다고 한다면 거기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고 입주하고, 그래서 그 아파트의 기능에 맞게 그 아파트가 잘 활용이 되어야 아파트를 제대로 잘 지은 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예전에 뉴스를 보니까 저 용인인가요? 어딘가요? 그 아파트를 임대아파트를 멋있게 잘 지어 놨는데 그 아파트로 들어가는 길이 없다고 합니다.
맹지여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사할 때는 차들이 다니고 했는데 주민들이 들어갈 그런 도로가 확보되지 아니해서 그래서 몇 년 동안 빈 아파트로 그냥 방치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나는 거고요. 아, 결국 그것이 잘 해결이 돼서 이제는 길을 내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뉴스 보도도 듣게 되었는데, 아무리 멋진 건물을 지으면 뭐 합니까? 아무리 멋진 건축물을 화려하게 장식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정작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그것을 채워야 될 그 내용이 빠져 버린다고 한다면, 정말 의미 없는 유령 아파트가 되는 것이고 성전도 그냥 성전만 잘 지어 놓으면 그 자체로서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누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나옵니다. 성전에 나오는 이유가 뭐예요?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받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그래서 다시 거기서 새 힘과 여러 가지 소망을 가지고 나올 수 있도록 그곳에 하나님이 계셔서 사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그 중개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성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만일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전은 있으나 마나 한 유령 건물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다음에 이제는 언약궤를 성전 안에 안치하는 그 장면을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약궤가 어디에 있었는가?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서부터 이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자신이 있던 성막이 있던 곳으로 가져왔었는데요. 솔로몬이 그 성전을 이제 예루살렘에 지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언약궤를 옮기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장로들을 소집했습니다. 백성의 우두머리, 족장들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이제 이사를 하는 것이죠. 언약궤를 그 옛날 다윗의 성 시온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전까지 옮겨 가게 되었고, 그 과정 가운데서 무수한 재물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결국 그 성전 안에 배치하게 되었는데, 그 성전에 있는 그 언약궤 위로 그룹의 형상들을 만들어서 날개들이 마치 그 언약궤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하는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서 성전 안에 언약궤를 배치하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열왕기상 8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하나님인가요? 언약궤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언약궤가 하나님도 아니고, 언약궤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 주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무엘상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엘리 대제사장 시절에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과의 전쟁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블레셋 민족에게 지는 그런 형편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생각해 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언약궤를 가져오자는 거예요. 이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이 언약궤와 함께 우리가 전쟁을 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저 블레셋 사람들을 이길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언약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 낸 그 역사들이 있었던 것이 언약궤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면서 그래서 결국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도 그 언약궤와 함께할 때 있었던 일이고, 또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이 언약궤를 가지고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그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을 건너게 될 때 그 요단 강물이 갈라지는 그런 엄청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도 언약궤와 함께할 때 일어난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생각에 이 언약궤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실 거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언약궤를 이 전쟁터 가운데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 언약궤를 보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군인들은 너무나도 기뻤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면서,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고 생각을 하면서 기뻐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전쟁에서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지고 말았어요. 언약궤가 그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있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고 그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언약궤를 블레셋 민족에게 빼앗겨 버리고, 그 언약궤를 다곤 신전 안에 배치하게 되는 그러한 정말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언약궤가 그 자체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그 언약궤와 함께할 때 엄청난 기적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기적들이 있었던 이유는 언약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궤가 있어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아무런 힘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고, 하나님이 빠져 버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언약궤는 그냥 쓰레기통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언약궤를 이리 가져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언약궤를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제사하면서 또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정말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자 하는 그런 열망 가운데 이 언약궤를 이 성전 안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에 언약궤를 가져온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거역한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전을 짓고 언약궤를 그 안에 집어넣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우리들의 마음에 모시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신약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성전이 무엇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말하죠? 신약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신약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신약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성전이 무엇이에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정말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아가는 그런 성도님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놓고 그 성전 안에 언약궤를 모셔 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그리고 수많은 재물들을 바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정성을 다했던 그 솔로몬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오시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좌정하시기를 기대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마음의 결단을 우리 모두가 다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모실 수가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가운데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이제 나 자신은 죽고 주님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모시면서, 그래서 우리가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내가 살아서 내 의지가 살아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좌정하셔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을 모신 사람들의 삶,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해 주시는 그런 삶—그런 삶을 우리 모두가 다 살아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날마다 점검해 봐야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점검해 보셔야 돼요. 내 마음속에 우리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가, 주님께서 안 계신가 보셔야 돼요. 주님께서 안 계신 때가 언젭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고 내 뜻대로 할 때—화가 난다고 해서 화내 버리고, 분노해 버리고, 짜증 내고, 불평하고, 원망하고—내 감정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만일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셨는가? 이 순간에 참고 인내하고, 오히려 기뻐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 올려 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에 따라 살아 나갈 때 그 삶이 바로, 율법의 언약궤를 성전 안에 모셨던 그 솔로몬의 모습처럼, 우리의 마음 가운데도 하나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시게 되는 그런 결단이 있는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이 나의 왕이고, 주님의 명령 따라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그런 믿음의 결단들을 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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