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크게 오해하는 말씀들이 종종 있는데요.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어린이 주일과 관련되어서, 우리가 늘 오해하기 쉬운 한 말씀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바로 잠언서 13장 24절의 말씀입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이 징계하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요? 자식을 사랑한다면 매를 들어야 한다. 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냐면, 부모가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려고 한다면,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만들려고 한다면,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마음대로 때려도 된다는 말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혹시 그렇게 오해하셨나요?
제가 한동안 그렇게 오해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많이 맞고 자랐고, 부모가 매를 드는 것에 대한 그런 거부감이 없이, 늘 그게 자연스럽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사랑의 매라고 하는 개념이 있어서,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면, 그러면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만드는 게, 그게 부모의 당연한 의무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도 기록돼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하는 말씀도 있으니까,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때려서라도 바르게 가르쳐야 된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서 매를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의 어느 한 구절만을 보고, 그 구절에만 꽂혀서, 우리가 그 말씀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가장 큰 원리가 있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고려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나의 기존의 생각에 일치하는 말씀만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성경에 있는 정말 다양한 말씀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일치하는 것들만을 받아들이고,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강화시켜 주는 그런 말씀들만을, 우리가 취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변화가 없을 것이고, 그리고 때때로 성경을 곡해하고 오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어떻게 하지 말고?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는 그렇게 귀를 많이 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지 말라. 자녀들이 분노하게 만들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많이 망각해 버린 겁니다. 잠언서의 말씀만을 받아들여서,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한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폭력을 쓰거나, 아이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들거나, 때로는 아이들로 하여금 분노에 차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해도 괜찮은 것인 양, 무한대로 부모에게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것인 양, 우리가 착각하게 만든 적이 많이 있었는데요. 성경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권한이 주어진다고 한다면, 마음대로 해도 돼요? 당신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권한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말은 그 권한을 아무렇게나 막 사용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게 아니라 어 그 어떤 상식적인 테두리 안에서, 서로의 신뢰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그 상황 속에서, 마음껏 꿈을 펼쳐가고, 마음껏 일을 해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지, 내가 내 마음대로 악을 행하며, 나쁜 짓을 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처럼, 아이에게 아이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매를 아끼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이 말씀이, 부모에게 자녀들을 함부로 대하고 폭력적으로 대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우리의 분노를 자녀들에게 발산해도 되는, 무한대로 허용된 그런 면허증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잠언서 13장의 말씀은 어떤 의미이냐 하면,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의미하는 제유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해야 된다. 자녀를 바르게 길러야 한다고 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중에 한 한 표현인 자녀들에게 매를 드는 것을 통해서라도 잘 양육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표현의 말씀은 자녀들에게 함부로 막대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말로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목회자들 중에서는 자신의 자녀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 중직자들 중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 번째는 성경 말씀을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읽었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다고 하는 그런 명분은 내세웠지만, 사실은 그 속에 죄성이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자신의 분노를 무절제하게, 아무런 힘이 없는 약한 아이들에게 무분별하게 쏟아부어버려서, 그래서 사실은 우리 자녀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리고 신앙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항상 제가 강조를 해 오는 것이지만, 우리는 언제 잘못되기가 쉬운가? 우리가 옳다고 생각되면 잘못되기가 쉽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폭력을 쓰기 쉽고, 정당한 목적이 있으면 수단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거나 취해도 되고, 내 목적이 정의롭다고 한다면, 방법은 어떤 방법을 써도 괜찮을 거라고 하는 그런 착각을 할 때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그것을 가리켜서 “로빈훗 신드롬”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만 있다고 한다면, 도둑질하는 것도 정당한 걸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들을 우리들이 범할 수가 있는 것이죠.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한다고 하는 목적이 있으면, 방법은 잘못돼도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바른 것을 가르쳐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폭력을 써도 되고, 분노해도 되고, 마음껏 우리 아이들의 인격을 무시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들지 말라 화나게 만들지 말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 자녀들에게 폭력을 쓰고 노엽게 만들면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들에게 폭력을 쓰고, 그리고 자녀들을 윽박지르고 위협하고 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만일 자녀들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자녀들을 분노하게 만들면서, 그러면서 무엇인가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한다면, 자녀들이 정말 부모가 원하는 대로 정말 좋은 아이로 바뀔 수 있을까요? 매를 때리고 폭력을 쓰고 여러 가지 윽박질러가면서, 그래서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라고 이야기하면, 우리 아이들이 그 부모의 말을 듣고 선한 길로 가게 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때리기 때문에 무서워서 교회에 나오고, 부모가 폭력을 쓰기 때문에 화를 내기 때문에 부모가 무서워서 말을 듣는 것처럼 행동을 하겠지만, 그러나 그 마음은 변화가 되지 않는 것이죠. 지금 우리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고 바르게 사는 것 같고 행동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바뀌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모가 무서워서 부모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잠시 동안 착해 보이는 척을 하는 거예요. 교회를 다니는 척을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척을 하는 거죠. 분노하는 것으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가 없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수도 없고, 무엇이 복음인가를 깨달을 수도 없게 되는 것이죠.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성경은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20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어떻게 하라?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자녀들에게 분노하면서 자녀들을 윽박지르면서, 이 아이들이 믿음의 길을 잘 가도록 그렇게 가르치면, 우리 아이들이 매가 무서워서, 부모가 화나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생활을 하는 척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사람이 성내는 것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바른 길로 가게 만들 수가 없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아이들은 이 순간에, 나도 살아가면서, “화를 내도 괜찮은가 보다”라고 오해하는 거죠. 내가 정당하다면, 나도 폭력을 써도 괜찮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보면서 폭력을 썼던 것처럼, 나도 내가 옳다고 한다면 폭력을 쓰고, 내가 옳다고 한다면 갑질을 해대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폭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사회 부적응자를 양산해 낼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이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을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하며,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잘 양육해 나갈 것인가?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축복이잖아요?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뭐예요? 자녀들이에요. 정말 행복한 그 선물인데, 그 선물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잘못된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그르치고 망칠 게 아니라, 오늘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우리 아이들을 양육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마찬가지고 주일 학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죠.
반면에 우리가 선물을 주고 칭찬을 하고 보상을 하면 우리 아이들이 믿음이 잘 커갈 수 있을까요? 정반대로 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커질 것처럼 생각하기가 쉬운데, 역시 그것도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칭찬을 받고 보상을 받고 선물을 받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은 그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을 하냐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이용해도 괜찮겠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인식만을 우리에게 심어줄 위험성이 있는 것이죠. 강압과 폭력이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반대로 칭찬과 선물과 인정함이 오히려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척하는 그런 방법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별로 효과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이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면 더 이상 선물이 매력적이지 않고, 더 이상 칭찬받는 것이 매력적이지 않을 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별로 그렇게 유익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르쳐야 되는가? 정말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정말 주님께서는 나와 같이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주님의 은혜가 크다고 하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진실로 가르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되는가? 주일학교 교사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들을 양육한다면 어떻게 양육해야 되는가? 사랑으로 대해야 되는 것이죠.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서, 정말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하나님이 나의 영적인 아버지이시고, 정말 우리 부모님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아이의 마음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아이들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로 하여금 분노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를 잘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제가 예전에 미국에 처음 가게 되었을 때 제가 주일 학교를 맡아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었는데요. 그때 저희 교회의 담임 목사님, 저보다 총신 몇 년 선배이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저한테 부탁한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공평하게 대해줘”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 그렇게 공평하게 대해줘야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 거라고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잘 깨닫지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아이들을 공평하게 다루는 법에 대해서 조금씩 조금씩 배워나갈 수가 있게 되었는데요. 아이들이 분노에 차게 만들 만들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해줘야 되는 거죠.
어떻게 공평하게 대해줘야 됩니까? 한 가지 팁을 말씀드린다고 한다면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최선을 다해 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종종 어떻게 하냐면, 그 많은 아이들 둘이든지 셋이든지 아니면 주일 학교에 여러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을 다 한꺼번에 다뤄야 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나 선생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조급해서, 빨리빨리 해치워 버리고, 빨리빨리 이 아이 끝내고 저 아이 도와줘야 되고, 이 아이 끝내주면 또 다른 아이 도와줘야 되고, 그래서 마음이 조급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아이들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분노에 차지 않게 만들고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가 봤더니, 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서 상대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아이가 여러 가지 불만들을 얘기해 주면, 그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때까지, 그 아이가 흡족하고 모든 오해가 풀리고, 그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불만들을 다 없앨 때까지, 그 아이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옆에 작은 아이가 와서, “엄마, 이거 해줘.” “아빠, 이거 해줘” 하면서, 막 옆에 다가오면, 그 다가오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은 내가 네 형하고, 네 언니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너는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이 언니 하고 이야기를 다 마친 다음에, 그리고 너한테 가서 이야기를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라.” 하면서,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예요. 시간이 많이 흘러도 괜찮아요. 1시간이 돼도 돼요. 2시간이 돼도 돼요. 그 아이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기다리는 아이가 조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아이는 생각하는 겁니다. 내 차례가 되면, 아빠가 엄마가 나한테도, 저렇게 충분히 시간을 내주겠지. 그러니까 기다리는 거야. 지금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서 이 아이의 문제를 끝까지 해결해 주고 그다음에, 다 됐니? 문제 다 해결됐니? 그래 더 문제없니?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 아이를 다 마치고, 그다음 아이를 이야기하고, 충분히 이야기를 해주면, 그때부터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기다릴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거죠.
근데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하냐면 빨리 끝내고 이 아이를 도와줘야 돼요. 이 아이를 또 빨리 끝내고, 이 아이를 도와줘야 되기 때문에, 아직 이 아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래 너 됐지? 하고, 비켜! 그리고 두 번째 아이에 가서, 너는 뭐야? 그래, 네 문제 이거야? 됐지! 하고, 또 다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불만들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서로 비교하는 거죠. 나한테는 이만큼의 시간을 냈는데, 언니한테는 이만큼의 시간을 냈고, 나는 이만큼밖에 안 해줬는데, 언니한테 이만큼 해줬고, 그게 아니라 이 아이의 문제를 완전히 다 해결해 줄 때까지 다른 아이들은 기다리라고, 네 차례가 오면 내가 해줄게. 하나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해 주고 들어주고, 그 문제를 이야기할 때까지 다른 아이들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는 기다림의 훈련, 그런 걸 할 때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를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게 만들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의 팁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여러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면 아이들 하나 아이에 하나를 데리고 따로 여행을 가든지 하는 겁니다.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밥 먹으러 가서 통일시키는 게 아니라, 이 아이와만 하루를 같이 보내고, 다른 날에는 이 아이와만 또 하루를 보내고, 그래서 부모가 나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나의 문제를 다 들어주길 원하는구나. 그런 것들을 다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한 명 한 명 최선을 다해주고,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때, 아이들의 분노하게 불만에 가득 차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을 충분히 사랑해 주고 들어주신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인간 부모보다 훨씬 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들려주고, 사랑으로 믿음의 길로 인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말을 막아버리고 내가 말을 하기보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야 하는 것이죠. 야고보서 1장 19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고, 아이가 무슨 불만이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 때문에 자신감이 없는지, 무엇 때문에 하기를 주저하는지, 무엇 때문에 피하고 싶어 하는지, 왜 안 하려고 하는지, 아이의 마음을 들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들어주는, 내 이야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하라고 용기를 가지라고, 열심을 내라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의 마음 가운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잘 들어야 되는 것이죠.
잠언서 18장 13절의 말씀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 끝까지 경청하고 공감해 줘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우리가 미리 결론을 내려버리고 미리 교훈해버린다고 한다면 아이들의 마음은 닫혀버리고 더 이상 부모님과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교사 선생님들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기르고 양육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데, 그때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리면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양육해야 할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부모가 완벽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인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그 놀라운 복음의 진리들을 아이들과 공유하면서, 아이들을 믿음의 길로 바르게 인도해 나가는 그런 믿음의 역사가 우리 가정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 주일 학교 내에서 일어나면서 우리 아이들을 믿음의 길로 잘 인도해 내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만나면 이미 다 키우신 부모님들이 있다고 한다면 만났을 때 어 미안하다고 얘기하세요. 얘, 내가 예전에 내가 어리석어서, 내가 잘 알지 못해서 너에게 많은 실수를 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고백하며, 그래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주면서, 이 아이들이 정말 부모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느끼는 그런 귀한 가정이 행복하고 복된 가정들로 변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이들에게 매를 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분노 가운데 내가 화풀이하기 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교훈을 하고, 그리고 부모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풀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도 필요할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소유가 아니라 선물이고 또한 사명입니다. 어쩌면 이 사명이 우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이요 행복일 텐데,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잘못된 방법으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가장 늦었을 바로 지금부터라도 다시 부모가 자녀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래서 부모와의 자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면서 주 안에서 복된 그런 가정들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고, 그런 가운데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가정들이 회복되어 나가는 우리 예수 비전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도 우리를 대하실 때 싸그리 뭉쳐놓고 도매금으로 우리를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한 분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옛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부활의 현장 가운데 제자들과 만나는 그 현장 가운데 도마라고 하는 제자가 마치 그 자리에 없었어요.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한번 나타났으니까 끝이야 하고 더 이상 안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를 위해서 나는 주님의 손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난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그 도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제자를 위해서 다시 한번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그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사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도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며 아름다운 가정들을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