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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12) – 팔복강해 1

2021년 1월 3일 주일예배 설교

여러 가지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몇 번 살펴본 적이 있는데요. 2018년도에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와 있는 사랑의 이야기로 살펴본 적이 있고요. 2018년과 19년도에는 복음의 눈으로 본 10 계명이라고 하는 강좌를 통해서, 10 계명을 쭉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작년에는 2020년에는 요한계시록 강해를 통해서 요한 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2021년을 시작하면서 어떤 시리즈를 할까 구상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5장에 있는 여덟 가지 복, 팔복이라고 종종 불리는 이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함께 강해하면서, 하나씩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기대가 되십니까? 저는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는 이 주제를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5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도대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돈이 없는 것이고, 충분한 재정적인 능력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가난하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냥 돈이 없어서 가난한 것, 재정적으로 궁핍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어서, 도대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우리가 한번 고민하면서 이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 사용된 심령이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이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는 영(靈) 혹은 마음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가난하다, 마음이 가난하다.”라고 하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겠는데, 그래서 번역할 때 심령이 가난한 자로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이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는 어디에서도 사용된 단어냐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거라고,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던 그때에도, 이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프뉴마시니, 프뉴마로 예배해야 된다. 영으로 예배해야 된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사용한 단어도 바로 이 단어입니다.

도대체 영이 가난해야 된다. 프뉴마가 가난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먼저 이 말씀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한다면,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물질적으로 재정적으로 가난해야만, 거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그래야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죠. 왜냐하면 이 말씀의 표현이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영이 가난해야, 영이 가난해야, 심령이 가난해야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너희들이 돈이 없어야, 거지처럼 살아야, 재정적으로 궁핍해야, 그래야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면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부자는 안 되고, 거지처럼 살아야 가난하게 살아야, 그래야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으로 오해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은요. 가난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될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는 가난해야 된다. 우리는 부자로 살면 안 된다. 우리는 가난하게 청빈의 삶을 살아야 되고, 거지처럼 살아야, 그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오해가 우리 기독교 역사상에 계속 있어 왔습니다.

특별히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였냐면, 수도원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도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역사상 자주 등장했던 운동인데요. 특별히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수도원 운동이 많이 유행했었고, 11세기와 12세기 사이에도 제2의 수도원 운동이 벌어지는 등 우리 기독교 역사상 수도원 운동이 많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를 가보면 이 수도원 운동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회라든가 예수회라든가 아니면, 마리아회 이런 여러 가지 가톨릭 교회의 여러 종파들 속에서, 수도사가 되어서 평생을 이렇게 가난하게,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재물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오로지 소량의 음식만을 먹으며, 개인의 재산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성경만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념하고 침묵에 수행을 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수도원 운동이 가톨릭 교회에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런 수도사들을 보면 이 세상에 대한 욕심들은 다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히 다 포기해버리고, 그 수도원에 들어가서 정말 가난하게 그리고 오직 주의 일만 하면서, 오직 영적인 일에만 몰두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침묵의 수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일반 세속적인 성도들은 정말 존경심이 갑니다. 탐욕에 찌드러져 있고,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아등바등거리면서 사는 일반인들이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 정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마치 불교에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그런 수도승들을 보면 고개가 숙여지는 것처럼, 대단히 정말 위대한 사람이고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삶의 모습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일까요? 정말 난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고 하는 이 말씀에 합당한 삶의 모습인지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데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삶의 모습이 기독교 복음을 아주 크게 오해한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성경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렇게 오해할 법도 할 만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에게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자 관원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 다 가난한 자들에게 줘버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해 주셨으니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돈을 가져서는 안 되고, 이 세상에 탐욕을 가져서는 안 되고, 다 내버리고, 물질은 다 내버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따르는 것이 그게 정말 가치 있는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19장 23절에서부터 24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부자는 천국 못 가고,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우니까, 그런데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그 불가능한 것보다 더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이 말씀만 보면 부자는 천국에 절대로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다 내버리고, 다 재산 다 내버리고, 가난해져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로 우리가 가난해져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냐? “너는 누구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느냐?”라고 하는 그런 문제를 주님께서 다루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물질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느냐? 이 문제를 주님께서 따지시고 계시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이 하나님일 수 있어요. 마치 어떤 것과 비슷하냐면,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는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쳐버리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때 이 아브라함이 어떤 결단을 내리냐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아이를 데리고 모리아산에 가서 죽이려고 했어요. 번제로 바쳐드리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에, 누가 나의 하나님인가? 내 아들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가?”라고 하는 그 질문 앞에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지 내 아들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자식을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했던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내게 죽여서 내게 바칠 것을 실행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칼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그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더 이상 우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냐? 이삭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정말 극단적인 선택 앞에서, 아브라함은 내가 이삭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전부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젊은 관원에게 해주신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물질을 버려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이 젊은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죠. 과연 물질이 너의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냐?”라고 하는 그 질문 앞에서, 안타깝게도 이 젊은 관원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물질 없이는 못 산다고 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고, 이 젊은 관원은 물질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의 앞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잘못 오해해서, 그래서 우리가 물질이 없어야만 가난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오해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오.”라고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하지 않고,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진 상태에서,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마태복음 5장 3절의 말씀이나 누가복음 6장 20절의 말씀이나 다 똑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각각 표현한 것인데요. 마태복음에서는 분명하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표현한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진 상태로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은 진짜로 재정적으로 가난한 사람 물질이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령이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고, 물질적으로 가난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도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유로 이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게 비유인가 아닌가를 확인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모든 말씀들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이 영적인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땅의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땅의 언어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이 땅의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바라봐야 되는데,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그냥 땅의 이야기로만 이해하는 오해를 우리들이 많이 하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택배 노동자들을 향해서, “여러분, 그 물건을 들고 배달하니라고 얼마나 힘듭니까? 내가 쉬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에요. 우리가 무거운 지갯짐을 지고 다니고 있어서, 그 지갯짐을 쉬게 내려주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영적인 차원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인생의 무거운 짐, 이 인생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죄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시겠다.”라고 하는 영적인 차원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 정말로 화물 운전을 하고, 무거운 짐을 나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이제 더 이상 화물 운전 배달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닌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이사야서 55장 1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겠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가면 코카콜라를 주고, 사이다를 주고 우리들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님에게는 많은 음료가 있어서 그래서 그 음료를 우리들에게 방출해 주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양식, 영적인 의미의 갈증이 있는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 영적인 갈증을 해결해 주시고, 영적인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에요.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그러면 진짜 무슨 의미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그러니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이,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고,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없어서, “하나님, 정말 도와주세요.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 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예를 살펴본다고 한다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꼽을 수가 있을 겁니다. 탕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탕진해 버리고, 돼지 쥐염 열매로 먹을 것을 찾으려고 했고, 배를 채우려고 했던 그 탕자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무엇이냐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바라는 것밖에 없어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주세요.” 그런 정말 그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그 마음, 유대 율법으로 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하는 것밖에는,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상태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의 법으로 의하면 돌로 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이제는 죽었구나.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구나.” 생각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그렇게 간청해야만 되는 그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고, 자신은 완전히 절망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나에게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부터 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완전히 파산해 버렸구나. 내게는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생각이 돼야, 그래야 “하나님, 좀 살려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부자들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도 하나님을 의지할 절박함도 그들에게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모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내가 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오직 심령이 가난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마태복음 18장 3절 4절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는 누굽니까?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간단하게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음식을 만들 수도 없는 것이고, 얻을 수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오줌을 싸고 똥을 싸도 자기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린아이는 엄마만을 바라보는 거죠. 힘들고 어려울 때, 우는 거예요. 울면, 엄마가 알고 해결해 주는 거예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봐야, 소망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떻게 서야 되는가? 하나님, 나의 연약함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이죠.

야고보서 4장 6절의 말씀처럼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이 있다고 한다면 영적인 교만일 것입니다. 영적인 겸손이어야만, 하나님 앞에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 줄로 생각하게 되는 그 순간,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것인데요. 영적인 교만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리새인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아주 아주 유명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12절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갔지만,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를 살려달라고 나를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바리새인들의 마음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멸시가 가득했고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지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들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고, 영적인 교만에 빠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박수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는 차지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적인 교만의 함정이죠. 제가 늘 강조하는 표현이긴 하는데, 사탄은 우리가 종교적으로 열정을 내는 것을 결코 방해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기도하고 바리새인들이 구제하고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사울 왕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런 모든 일을 한 다음에 심어주는 교만한 마음, 내가 이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심어주게 될 때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이 있는 자인가?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옵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했지만 또 미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나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나고 다른 사람을 향한 멸시의 마음이 솟아나고, 정말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그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내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대표적인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야곱이죠. 얍복강 가에서 앞에는 형이 자신을 군대를 이끌고 와서 죽이려고 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그 야곱은 하나님 앞에 메어달린 거예요. “당신에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나의 자랑과 교만한 마음, 내게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이신데, 그 사랑의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 교만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저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금년 한 해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용서하시고 안아주시고 우리를 포용하시는 그 주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히 누리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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