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왕기상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역시 오늘 이 말씀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하면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적국에게 패하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돌이키며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 그 기도를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달라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오늘 우리가 읽은 그 성경 말씀의 내용이 되겠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하는 이 기도의 내용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몇 가지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 고통,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왜 우리에게 오는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인 것이죠.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오늘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깔려 있는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흥왕하고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이고 이런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텐데,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가? 왜 일어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서 오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죠. 46절의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 넘기심에.” 이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에요.
하나님 앞에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진노하시고 그래서 그들에게 징계하시게 될 거라고 하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기도문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먼저 던져야 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우리의 죄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라고 하는 질문을 먼저 던져보아야 할 텐데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우리의 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애매하죠. 뭐라고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스 앤 노’라고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왜 고난을 당하는가, 왜 어려움을 겪는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의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거죠. 징계하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다가 그러다가 완전히 망해버릴까 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면 결국에는 망하게 될 텐데, 망하게 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징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망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 우리의 죄에 대한 징계가 있는 것이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만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냥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죠.
나쁜 짓을 하든 말든,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잘못을 하든 말든, 우리 자녀들이 아니라면 쉽게 개입하기가 어렵습니다. 괜히 건들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왜? 내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남남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지만 우리 자녀라고 한다면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자녀들이라고 한다면 그냥 방치해 둘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계속해서 짓는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망하게 될 것인데, 결국에는 엄청난 일을 당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부모는 징계를 통해서라도 이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야 될 사명이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할 때마다 이방 민족을 들어서 징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할 때마다 징계하셨고 또 징계하셨고 또 징계하셨다고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성경 중에서 어느 성경책이죠? 사사기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잘못된 길로 떠나게 되면, 우상을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을 들어서 징계하셨어요. 채찍질을 하셨어요. 그래서 고통 가운데 지내게 하시다가 그 이스라엘 민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다시 구원해 주시고 사사를 보내서 다시 일으켜 주시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왜 오는 것인가?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징계의 차원에서 이런 고난이 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인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모든 고통이 다 죄에 대한 징계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옳습니다. 모든 고통, 어려움, 실패, 이 모든 것들이 죄의 결과가 아니라,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성경 전체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의인이 있다고 한다면 의인은 고난을 당하는 일들이 생기는 거예요.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많이 있게 되는 것인데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죄와 상관없이 이렇게 고통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누구죠?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동방의 대표적인 의인이요, 그 당대에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욥을 치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도무지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고통을 그 욥에게 주시는 일이 있었는데, 그 욥이 그렇게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이 잘못했어요?
욥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욥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셔서 정금과 같은 보석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그렇게 일을 진행하고 계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또 누가 고난을 당했습니까? 요셉이 고난을 당했어요. 요셉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잘못한 거 따지자고 한다면 뭐 있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고, 노예 생활을 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죄에 대한 결과인가?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놀라우신 일을 벌이시려고 하는 계획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성경에는 한편으로는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지만, 또 어느 부분에는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충분히 많이 있기 때문에 성경 어느 한 부분만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 계획,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발견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이단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있었냐면요(아마 이야기하면 금방 알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 사람은 뭐라고 주장을 했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질병이 귀신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주 큰 교회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굉장히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 사람의 주장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무좀에 걸리는 것도 죄의 결과다, 귀신이 들어가서 그런 것이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는 것도 죄의 결과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는 것도 귀신이 들어가서 그렇다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죄와 연관시키고 귀신과 연관시키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 이단에 많이 넘어간 경우가 있습니다. 그 주장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 성경 다른 곳에서는 죄와 상관이 없는 고난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태어나면서부터 이렇게 말도 못하고 벙어리가 되고 소경이 된 그런 사람을 향해서,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또한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과 죄의 관계를 생각할 때는 한 가지가 아니라, 때로는 죄의 결과일 수도 있고, 때로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함부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말로써 그들에게 더 힘들게 만들거나 아픔을 주는 그런 잘못된 일들을 하지는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혹시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은 없는지, 내가 회개할 죄가 혹시나 없는지, 내가 살펴보지 못한 것은 없는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나 자신의 죄를 한번 되돌아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세일 거라고 믿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가서 제가 친하게 지냈던 선배 목사님을 한번 만나게 됐습니다. 근데 그분이 지금 췌장암으로 인해서 1년 동안 고생을 하고 계셔요. 그래서 몸이 완전히 삐쩍 마르고, 그 **항암 치료(케모테라피)**를 하는 가운데 정말 너무나도 힘들고, 먹지도 못하고 다 구토해 버리고, 온몸에 지금 고통이 있는 가운데서 그런 어려움 가운데 있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면서 같이 기도도 하고 그리고 돌아왔는데요. 그 목사님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요즘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또 하나 깨닫는 게 있는데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가를 깨닫고 날마다 회개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뭐 크게 잘못한 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혹시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기회를 삼는 모습을 볼 때 정말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솔로몬의 기도에서도, 우리가 만일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고, 그렇게 회개하며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회개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솔로몬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그런 상황 가운데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제목은 그러니까 이 성전 자체에 어떤 신비한 효능이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로 오해하기 쉬운데요, 사실은 그런 관점은 별로 바람직한 관점은 아닙니다. 미신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미신적인 관점에서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깁니까? 장소를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물건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어떤 신령한 사람, 신령한 장소, 신령한 물건, 그런 것들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가 대단한 영험이 있고 효력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적인 관점이죠.
하지만 성경 전체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성경 전체의 관점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영험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능력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소망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평범한 것도 은혜의 장소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그냥 지팡이도 모세의 손에 들린 그런 지팡이와 같이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그 어떤 것도 능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과거에 어떤 영광을 누렸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언약궤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함께했던 언약궤이고, 그 언약궤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었고, 언약궤와 함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 언약궤입니다.
하지만 그 언약궤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언약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너갈 때 요단강이 갈라질 수 있었던 것은 언약궤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언약궤를 가지고 갔지만 누구에게 능력이 있어요? 하나님에게 있는 거예요. 언약궤를 들고 그 여리고성을 돌면서 그 여리고성이 무너졌지만, 언약궤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착각했습니다. 무엇을 착각했어요? 저 언약궤가 대단한 효능이 있다, 대단한 능력이 있다라고 착각한 것이죠. 그래서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나아간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환호성을 질렀어요. “이젠 이겼다. 이젠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사기가 크게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이겼나요? 아니요. 무참히 깨졌습니다. 언약궤는 빼앗겨 버렸고, 장수들은 죽어 버리고, 완전히 대패해 버리고 말았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 옛날 능력을 발휘했던 그 언약궤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을 때 그 언약궤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냥 물건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스라엘 성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성전이 대단한 효험을 지닌 그런 건축물이 되게 해 달라고 솔로몬이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눈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표현하기를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하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면, 찬양할 때마다 손을 높이 들어야만 되는 것인가요? 손을 높이 안 들어도 되는 것인가요? 손을 높이 드는 것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하라”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손을 높이 드는 것은 찬양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보조적인 행동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면서 기뻐하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정말 찬양할 때 그렇게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찬양이 항상 손을 높이 들어야만 찬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있는 게 정말 중요한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솔로몬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이곳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시고, 이곳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기도할 때 꼭 성전을 바라보면서 성전을 향해서 기도해야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실수로 내가 성전을 바라본다는 것이 잘못해서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 “성전을 향하여”라고 하는 말이 들어간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면 정말 손을 모아야만 기도가 되는 것인가요? 무릎을 꿇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런 행위들을 할 수가 있고, 그래서 기도를 묘사하는 하나의 표현법이 되고 있지만 그것을 꼭 따라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처럼 오늘 이 솔로몬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기도하는 이 기도의 제목은, 성전이 뭔가 대단한 효험이 있어서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무엇인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깨닫는 거죠. ‘그 옛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셨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지.’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는 게 훨씬 더 나아요.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기도가 더 잘될 수 있어요. 하지만 꼭 교회에 나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힘들고 어려운 그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가정 가운데서 혹은 우리의 직장에서 그 순간순간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왜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6절 말씀 다시 한 번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이게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에요.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없어요. 완벽한 사람이 있는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 솔로몬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도 정말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었다고 했지만, 다윗은 완벽한 사람이었는가? 아니요. 사울보다도 더 나빴어요. 더 악한 사람이었고 파렴치한 사람이었어요. 다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우리도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충분히 잘못을 할 수밖에 없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에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목표는 완벽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완벽하게 되는 것을 아예 포기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처럼 완벽해질 것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처럼.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해야 되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질 것을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 16절의 말씀에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만큼 우리의 목표가 거룩함,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이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 이룰 수 없는 목표예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늘 넘어지는 존재인 거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늘 악한 생각이 떠오르고,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동지들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번에 우리 결혼식을 하는데, 결혼식 순서가 한국과는 달리 엄청나게 타임 스케줄이 분 단위로 막 짜여 있어서 그 분 단위에 맞게 움직여줘야 결혼식을 잘 치를 수 있는데, 제가 맡은 역할은 신부의 들러리들을 데리고 호텔에서 식장으로 1시 반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시 반에 우리 들러리들을 데리고 식장으로 가려고 보니까 차 열쇠가 없어졌어요. 분명히 호텔 방 안에 내가 차 키를 놔뒀는데 차 키가 사라졌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얼마 동안 찾았는가? 1시간 동안 찾았어요. 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몇 번씩 뒤지고 몇 번씩 뒤져도 열쇠가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이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제 아내는 머리하고 돌아와서 이제 점심을 잠깐 먹고 가려고 했는데, 내가 막 그 열쇠를 찾으니까 우리 아내가 먹지도 못하고 그냥 내려두고 저와 함께 같이 막 찾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내를 붙여 줬구나.” 그게 바로 우리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붙여준 거예요. 완벽하다면 누군가를 붙여줄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단점이 있고 실수하고 늘 넘어지기 때문에 부모로 붙여 주고, 부모와 자녀로 붙여 주고, 우리 성도를 붙여 주고,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함께 붙여 주어서 함께 거룩의 길로, 완성의 길로 나아가라고 우리를 붙여 주고 계신 것이죠.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서로서로 도와주라고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는 서로가 도와줘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완벽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완벽해질 수 없고 늘 넘어지고, 늘 말로 상처를 주고, 늘 우리들의 표현하지 아니하는 것들로 마음 상하게 하며, 사랑을 행하지 않거나 또한 행동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가지 잘못들을 하고 악한 모습들을 보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정반대의 길로 가는 그런 범죄하는 인생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다시 한 번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또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또 받아 주셔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늘 나아가고 회복되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역사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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