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갈라디아서 6장 17절의 말씀을 함께 읽었는데요.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7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6장 17절 한번 보여주시죠.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예수의 흔적이 있으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나를 힘들게 하지 마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이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어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얻게 된 그런 여러 가지 상처, 그리고 고난의 흔적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는데요. 고난을 당해도 어려움을 당해도, 참 많은 아픔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27절까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 사도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해왔는가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준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을 텐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바울 사도가 “내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얻게 된 그러한 흔적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다 보면 그 흔적이 몸에 생기는 것이죠. 식당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면서 수년 동안 수십 년 동안 장사를 한 사람의 손을 보면, “아, 이분이 정말 식당으로 해서 음식을 만들면서 정말 고생하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고, 농부들은 밭에서 햇볕 밑에서 열심히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했기 때문에 얼굴을 보면 어떻게 생겼어요? 시커멓잖아요? 농부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흔적이 얼굴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전하러 다니면서 많은 고난과 아픔들을 겪었는데, 바로 그러한 그 고난의 흔적들 바울 사도가 그런 복음을 전하면서 얻게 된 수많은 흔적들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흔적이다”라고 해석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이해가 별로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지금 이렇게, “내가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고생했는 줄 아느냐? 내 흔적을 봐라. 내가 이만큼 했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바른 태도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고 하는 시처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하는 시, 아시죠? “연탄재가 깔보지 마라. 내가 이래봬도 뜨거운 사람이 뜨거운 자였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바울 사도도, “나를 깔보지 마라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이만큼 계급장이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치 조폭들이, 아니면 저 전과자들이 서로의 전과를 자랑하면서, 너는 감방에 몇 번 다녀왔어? 너는 별 몇 개야? 나는 별이 5개야. 나는 별이 17개야 하면서, 서로의 경력을 자랑하는 그렇게 자랑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바울 사도가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해서 수고했고,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해서 헌신했고, 그로 인한 그 헌신의 그 흔적들이 내게 있다. 내가 내 팔이 왜 이렇게 다친 줄 알아? 내 다리가 왜 이렇게 아픈 줄 알아? “내가 복음을 전하다, 맞아서 그래.”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당해서 그래.” 하면서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자랑하면서, 그러니까 “내 앞에서 까불지 마라.”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마라.”라는 식으로 얘기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성경적인 자세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은 무엇일까요? 성경적인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수고하고 애썼지만 그저 나는 무익한 종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했다”라고 고백하는 게 그게 성경적인 자세일 거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라 할지니라.” 이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마음의 자세인 것이죠. 내가 이래봬도 이렇게 잘했다. 내가 이만큼 수고했다. 나의 공로와 나의 그 장점들을 드러내놓는 게 성도의 자세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수고를 다하고 고통을 당했어도 겸손하게 저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게 그게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자들의 바른 자세일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의 일관적인 태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언제나 겸손함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무엇으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똑똑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더 많이 수고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바로 그거예요. 복음을 전하고 주를 위해서 힘쓰고 애썼지만, 그러나 결과들이 맺혀진다고 한다면, “거 봐라.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내가 얼마나 잘했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무익한 종이라. 복음을 전할 자격도 주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나를 사도로 삼아주셨고, 죽어 마땅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다시 회복함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내가 이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 바로 바울 사도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가 자신의 수고한 것을 드러내면서 내가 이만큼 수고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다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흔적이 아닌 다른 흔적을 자랑하는 사람들, 다른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예수의 흔적이 내게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지금 다른 사람들이 무슨 흔적을 이야기하냐면, 예수의 흔적이 아닌 다른 흔적이 있다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흔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떠들면서 자랑하고, 그리고 뻐기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그런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도대체 그렇게 다른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가 누구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할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방인이라면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금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잘 증거하고 다녔는데, 이 할례주의자들이 다니면서 초를 치고 다닌 거예요.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복음을 증거하면서, 할례를 받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이방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이 할례주의자들이 하는 얘기가 당신 구원받은 거 아니야. 당신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거 아니야. 당신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렇게 주장하는데 무엇을 들고 다니면서 주장했을까요?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주장, 성경을 가만히 봐라. 성경에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되어 있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축출된다고 되어 있고, 할례를 받지 않은 민족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부터 제거될 거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너희들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성경을 들이밀면서 할례를 받으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마치 오늘날 이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성경 구절들을 들이밀면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느냐?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느냐? 하면서 이단들이 자꾸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이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할례주의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할례주의자들이 계산해 놓지 않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으며 그리고 다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이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셨고, 그리고 그 죽음이 그 십자가에서부터의 부활이 결국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 율법의 요구들을 모두 폐지시켜버리는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 아무런 효력이 없어져 버리는 그런 놀라운 일을 벌였다고 하는 사실을 판례주의자들이 계산을 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예수님의 그 역사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죠? 사도행전 15장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성도들이 다 모였습니다. 사도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시행할 것인가 시행하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서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교회에 모였던 그 성도들이 결론 내린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요구가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여전히 이 할례주의자들은 교회들을 다니면서 할례 안 받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할례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바울 사도를 괴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그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육신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할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느냐? 그러나 우리에게는 할례가 없어도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 예수의 흔적이 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할례의 목적을 다 이룬 것이고, 더 이상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이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할례주의자들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갈라디아서 6장 12절에서부터 1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게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주의자들은 내가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을 자랑하면서, 내가 누구야? 하나님의 선민이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는 그 자랑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 할례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울 사도는 그런 할례주의자들을 향해서 말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육체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무엇이 있다 예수의 흔적이 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잘려 나가는 것이잖아요. 생명에서부터 잘려나가는 것인데 너희들은 육체의 표피를 조금 잘라내는 것으로 그래서 만족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잘려나가고 그걸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예수님의 할례의 목적을 이루시는 행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어도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할례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1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기는 것이오.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은, 그래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런 육체적인 한려 얘기하지 마라. 육체적인 흔적 얘기하지 마라. 우리는 영적인 흔적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할례를 어디에다 행하라고 말하냐면,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라고 처음부터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시행하실 때부터 할례를 시행하는 그 목적이 뭐예요? 할례라고 하는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할례를 받을 것을 원하셔서 육체의 할례를 정해주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구약시대 때 사람이라고 한다면 할례를 시행하면서 아 우리의 몸을 잘라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잘려 나갈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이 할례의 목적인 거예요. 할례를 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영적인 다짐이 이루어져야 할례받는 목적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신약 시대에 들어온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구약 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거예요. 신명기 10장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디에 할례를 행하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육체의 할례를 받는 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된다. 구약시대 때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요. 예레미야서 4장 4절에서도 이야기하는 겁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6장 17절의 말씀은 할례주의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죠. 너희가 육체의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느냐? 그런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그것을 조롱하고 있느냐? 무시하고 있느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없애버리고 죄의 몸은 제거해 버리고,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중요한 육체의 할례가 아닌 예수의 할례, 예수의 흔적 마음의 할례를 받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에는 할례를 주장하는 할례주의자들이 있습니까? 이제는 2천년이 지나서 그런 사람들은 다 사라져버렸죠.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옛날 2천년 전에 있었던 할례주의자들의 변형된 모습들이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사람들을 할례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려고 하는 사람이 할례주의자는 겁니다. 그 옛날 바울 시대에는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면서 그래서 교만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할례주의자였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할례주의자는 어떤 사람들이 할례주의자입니까? 나의 장점을 드러내고 내 공로를 드러내면서 그래서 으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어쩌면 할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떤 식으로 얘기할까요? 오늘날의 할례주의자라고 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했죠.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모태 신앙이야”라고 말하는 거에요. 내가 누군 줄 알아? “우리 집안은 3대째 신앙이야.” “우리 집안에는 목사가 몇 명이고 장로가 몇 명이고 권사가 몇 명이야.” “우리가 신앙의 뼈대가 있는 집안이야.” “내가 이 교회 설립 멤버야.” “첫날 예배드릴 때부터 내가 여기 있었어.” 혹시 그런 생각하고 계신가요? “내가 장로야, 내가 목사야, 내가 권사야.” 그런 것들을 으시대면서 사람들 앞에서 뻐기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가 자신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자신의 그 능력들을 드러내면서 그래서 사람들이 박수 쳐주기를 원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나가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처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렸어도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죠. 주님 저는 이렇게 1회에 두 번씩 금식을 합니다. 주님 저는 저 세리들처럼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하고 내가 이만큼 정말 좋다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여전히 우리가 그 옛날 할례주의자들의 모습과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됩니까? 나의 장점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0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바울 사도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내게 조카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크게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박해와 권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법칙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내 잘난 모습, 뛰어난 모습,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그래야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고 나에게 칭찬해 주고 우리를 향해서 우러러 볼 거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방식에 너무나도 많이 익숙해져서 그래서 자꾸 우리의 장점들이 장점들을 내세우려고 하고 장점들이 없으면 우울해지고 주눅에 들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누구를 찾으시는가?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어 주셨어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에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우리의 죄의 문제, 우리가 늘 넘어지고 또 쓰러지는 정말 내놓을 수 없는 너무나도 누추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 목숨을 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내게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은총 예수의 흔적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매일매일 발견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흔적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내놓을 게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 앞에 내가 무엇이 비춰지기를 비춰져야 하는가 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다가 그것이 없어서 그래서 너무나도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탕자가 아버지 앞에 갈 때 무얼 가지고 탕자가 아버지 앞에 나갔어요? “아빠, 내가 이래봬도 저 탕자로 있을 때 돼지 치우면서, 내가 돼지 치우는 매니저까지는 올라갔어요.” “내가 저 조폭들하고 놀 때 그래도 내가 쫄따구가 아니라, 내가 중간 단계까지 올라간 사람이에요.” 하면서 아버지에게 돌아갔겠어요? 주님께서 그걸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아무것도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주님 앞에 고백하며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주시는 우리 주님 앞에 늘 나아가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고 기쁨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