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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상 다른 관점 (민 14:6-10)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여행 가운데 광야길 가운데 정말 안타까운 한 사건의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리가 아닙니다. 아마 한 달이나 두 달 정도의 기간이면 충분히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가 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들어가면 되었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그 뒤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야만 했던 그 계기가 됐던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사건이었는데요. 이제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모세는 12명의 정탐꾼들을 선발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다녀오라고 그렇게 사명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이렇게 정탐꾼을 그 가나안 땅에 보내는 것은 잘하는 일일까요? 잘 못하는 일일까요? 잘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정탐꾼을 보내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민수기 13장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하신 것이죠. 12지파에서 1명씩 뽑아서 첩자를 간첩을 가나안 땅에 보내고, 그리고 그 가나안 땅의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오도록 하셨는데요. 이렇게 간첩을 보내는 것은 그것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마 필수적인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으니까, 가나안 땅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떻게 공격해야 그들의 약점을 파고들 수 있는지 그래서 미리 알아보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맞는 전략을 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고요. 하나님께서도 모세에게 그렇게 명령하셔서 12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12명의 정탐꾼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각 지파 중에서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을 선발한 것이죠. 그냥 아무나 보낸 것이 아니라 그래도 지도급에 있는 그런 지도자들, 명망 있는 사람들을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선발해서 가나안 땅에 파송하게 되었는데요. 그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정탐하고 돌아보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보고 한 이야기가 민수기 13장과 14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이 정탐꾼들의 보고가 둘로 완전히 갈리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가나안 땅을 정탐했지만 그것을 보고 온 사람들의 보고가 완전히 달랐는데요. 10명의 정탐꾼들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민수기 13장 31절에서부터 3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땅에는 장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사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그런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가 거기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고, 정말 강력한 그런 힘을 가진 민족이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로서는 그들을 싸워서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비유하자면 사람들 앞에 있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다. 메뚜기가 뭐죠? 너무나도 힘없고 나약한 존재, 그냥 밟으면 밟힐 수밖에 없는 아무것 대항도 하지 못하는 그런 곤충과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보고를 듣게 되자 이스라엘 민족들이 술렁대기 시작했습니다. 난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아는 그런 소망 가운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 앞에서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겁니다. 완전히 박살 나게 된 것이죠. 이러다 우리가 죽겠구나. 이러다 우리가 망하겠구나.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고 여기서 완전히 우리는 사라질 수도 있겠다고 하는 위기감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하면서 온갖 소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고한 것은 아니고, 12명 가운데 두 사람은 정반대의 보고를 한 것이죠. 누가 그렇게 보고했나요?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하는 두 사람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고한 내용이 민수기 14장 6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찍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우리의 먹잇감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백성들의 마음 가운데 잘 안착되지 못했습니다. 열 사람의 부정적인 보고에 더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이고,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불신앙의 반응을 보이게 됨으로 말미암아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지 아니하시고 광야 40년 동안 지날 수 있도록 광야에서 지내도록 40년의 기간을 늦추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다고 하는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 정말 참 아쉬운 대목을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탐꾼들의 보고가 완전히 다른 보고를 하게 된 것일까요?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이 서로 다른 보고를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두 정탐꾼 그룹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 가서 활동하고 돌아왔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곳을 찾아가서 아 정말 안 되겠구나 우리가 이길 수 없겠구나 우리는 정말 안 되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 있을 만큼 그런 생각이 들 만한 지역을 가서 보고 왔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한 거고, 두 사람의 정탐꾼은 비교적 쉬운 곳에 가서 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는데 이 정도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는데 하는 그 지역을 다른 곳을 보고 와서 이런 보고의 내용이 달랐던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이 12 정탐꾼들이 똑같은 곳을 봤을 것 같아요. 물론 다 똑같은 것을 완벽하게 다 똑같이 다녔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간 곳에 모습이 다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들이 똑같은 곳을 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보고가 완전히 달랐던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 때문입니다. 10명의 정땅꾼들은 믿음이 없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계산이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두 명의 정탐꾼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은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이 없는가는 정말 완벽하게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나타낼 수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의 말씀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거예요.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대단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마치 틀과 같아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찍어낼 때 그 틀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모양이 다 각각 다르게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서 두부를 찍어낸다고 하십시다. 두부를 찍어낸다고 했을 때 그 두부를 네모난 사각 틀에다가 집어넣는다고 한다면 두부의 모양이 어떻게 나올까요? 네모나게 나올 겁니다. 하지만 그 틀을 네모가 아니라 동그라미 틀에 넣는다고 한다면 세모 틀에 넣는다고 한다면 어떤 두부가 나와요? 동그라미가 나오고 세모의 두부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틀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른 것처럼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어떤 틀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의 틀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의 틀이 없는가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의 마음 가운데 믿음이 없었어요. 하나님을 계산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내놓는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부정적인 반응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틀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의 틀에 담아 내놓게 될 때 저 가나안 땅은 어떤 땅인가? 우리가 차지할 수 없는 땅이 아니라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오 우리가 반드시 들어가서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 10명의 정탐꾼들이 바라본 가나안 땅, 그리고 그들이 보고한 내용은 사실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마 정확한 정보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말 장대한 민족이 살고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살고 있었을 겁니다. 내피림의 후손들이라고 해서 정말 거인족들이 아마 그 안에 있었을 것이고, 이미 그곳에서 성을 갖추고 군사력을 키우고 어마어마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그런 셋업 된 나라가 그곳에 있어서 정말 우리 인간들이 우리들이 가서 그 성을 점령하려고 한다면 점령하기 어렵다고 하는 거 그건 잘못된 보고는 아닐 것 같아요. 그게 사실일 것 같아요. 그게 팩트일 것 같아요. 거기에 강한 민족이 있었고 경고한 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들이 오합지졸인 것, 맞아요 잘못된 거예요 맞아요.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민족입니까? 군사 훈련이 잘 된 민족인가요?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민족이었는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었어요. 노예근성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들이 해방되어서 나왔지만 군사 훈련을 받을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무기가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뭐 하나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겠습니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그런데 저 가나안 땅에는 장대한 민족이 있고 군사 훈련이 잘 돼 있고 그래서 그 정말 엄청난 그 강대국이 버티고 있는 그 민족을 정말 이스라엘 민족이 나가서 싸운다고 하는 것. 어쩌면 10명의 정탐군의 말처럼 메뚜기와 같은 모습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의 모습, 현재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10명의 정탐꾼들이 계산에 넣지 않은 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고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상대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무엇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뭐라고 약속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뭐라고 약속해 주셨죠? 내가 너희를 이끌어 어디로 인도할 것이다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가나안 땅이 어떤 땅이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그 하나님이 누굽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요 할 수 없는 것이 없으신 그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이끌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어요. 그것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죠.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처럼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했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보고가 민수기 13장 27절 말씀 가운데 있는데 뭐라고 보고하고 있습니까?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 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게 뭘까요? 정말로 그 땅에 가면 막 젖과 꿀이 강물처럼 흘러 다닐까요? 그게 아니라 그만큼 흘러 다닌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풍성한 땅이라고 하는 얘기죠. 굶어 죽게 되는 땅이 아니라 그 땅에서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모든 것이 풍성해서 그래서 거기서는 근심과 걱정이 없을 수 없는 그런 정말 좋은 땅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데, 정말 이곳이 풍요로운 땅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걸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나온 과일들을 들고 모세에게 와서 내놓는 겁니다. 이게 가나안 땅의 소산물입니다. 그거 그 소산물을 봤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요 아 정말 좋은 땅에 왔구나. 하나님께서 바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죠.


언제 약속했습니까? 모세에게부터 벌써 약속해 주셨어요. 출애굽기 3장 8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적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난한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희를 데려갈 땅이 어떤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내가 너희를 데려가려고 하는 그 땅에 누가 살고 있다?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다.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무슨 적성 무슨 적성 무수 많은 족속들이 그 땅에 살고 있는 땅으로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다고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 정탐꾼들이 그 가나안 땅에 가서 본 게 무엇입니까? 그 두 가지를 다 본 거예요. 첫째는 젖과 꿀이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 풍요로운 땅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 본 게 뭐예요? 그게 빈 땅이 아니라 수많은 민족이 진 치고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히위 족속이 있고 여부스 족속이 있고 가나안 족속이 있고 수많은 족속들이 그 땅에서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돌아오게 됐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게 맞습니까?


돌아와서 뭐라고 보고해야 됩니까? 모세님, 우리의 지도자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땅입니다. 그래야 되잖아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그런데 놀랍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차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게 말이 돼요 안 돼요 말이에요? 방귀에요? 잘못된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내신다고 했는데 가봤더니 젖과 꿀이 안 흐르고 있어요. 그러면 아 이 땅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말해야죠.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고 있단 말이에요. 정탐하러 갔는데 거기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허허벌판 위에서 마음껏 정복할 수 있는 쉬운 땅이 그 앞에 놓여 있으면 뭐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이 땅이 아닌가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 저 민족, 이민족 저 민족이 살고 있는 그 땅으로 인도해 준다고 그랬는데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이 땅이 아닌가 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하지만 거기에 강대한 민족이 살고 있어서 그래서 수많은 민족이 거기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면 뭐라고 얘기해야 돼요? 바로 이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렇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은 10명의 정탐꾼의 말에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이죠. 이 땅이 아닌가 보다. 이 땅은 우리가 차지할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차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차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한다고 했고, 거기에 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바로 그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이 땅을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인도하실 거라고 담대하게 믿음의 고백을 한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10 사람의 보고에 선동이 되어서 하나님을 거역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광야 40년 동안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40년 동안 살다가 죽고 말았고, 우리 아이들, 우리 딸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걱정했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왜 그들은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이 점령할 수 없어서 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습이 누구의 모습인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들은 누군가 우리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처럼 정복해야 될 대상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그 땅에서 살아야 하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떤 대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정복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면서 살아가야 될 그런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죠.


우리 옆 사람들에게 서로 권면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사명이 있어요. 이 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 땅을 정복하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라 말씀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신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왔는가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이 이 땅에 떨어진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이런 사람 만난 게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내가 힘들 재수 없어서 이런 상황 가운데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사명의 자리라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요셉은 어디로 떨어졌습니까? 보디발의 지배 노예라고 하는 신분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요셉은 또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서 요셉은 내가 왜 이곳에 왔는가 힘들어하면서 좌절하고 무너지고 쓰러진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넣어주셨는가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해서 내가 어쩌다 보니까 이런 자리에 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그곳을 점령한 거예요. 보디발의 집을 점령하고 감옥을 점령하고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형통하게 만드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보내신 자리가 있습니다. 제일 우선적으로는 가정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자리이고 또 우리의 직장,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처한 그 상황 모두가 다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신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으로 주신 이 땅을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부터 20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와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지금 우리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눈이 없다고 한다면, 내가 왜 이곳에 왔나,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나, 내가 잘못했나 내가 잘못 판단해서 여기까지 왔나 나는 도무지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 하면서 10명의 정탐군들처럼 좌절하고 무너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그곳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우리를 사명으로 불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누가 함께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 끝까지 함께하시고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기도하며 믿음으로 달려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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