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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멈춘 요단강 (수 3:9-17)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에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요단강이었는데요. 요단강은 어떤 강일까요? 우리나라의 한강처럼 그렇게 큰 강이 아닙니다. 한강의 너비는 600m에서 1km가 되는, 폭이 그렇게 넓은 아주 큰 강인 것에 비해서 요단강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 폭이 30m 정도밖에 안 된다고 그래요. 축구장의 골대 쪽 길이가 68m라고 하니까, 축구장 그 길이의 반절도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강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요단강에 가서 사진을 찍은 게 있는데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쪽에서 저 요르단 나라 쪽 방향을 보면서 찍은 사진이에요.

이곳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여리고 쪽의 그 요단강인데 제가 느끼기에는 한 20m도 채 안 되는 것 같은 그런 폭이어서 아마 수영으로 건널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강, 작은 시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그런 강이고 물 깊이도 3m, 많이 물이 넘치면 한 5m 정도 되는 그런 작은 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작은 강이라고 해도 장애물은 장애물이죠. 어제 비가 많이 와서 오늘 구이에서 제가 이쪽으로 오는 가운데 다리를 봤더니 아주 조그마한 시내가 물이 철철철철 넘치는데, 오면서 생각을 해 봤어요. 만일 이런 곳에 내 발을 내디디라고 한다면 나는 내디딜 수 있을까? 겁나서 못할 것 같아요. 아무튼, 이 요단강이 작은 강이긴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맞이했던 아주 어려운 장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40년 전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을 겁니다.

40년 전에 홍해 바다 앞에 서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는 홍해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그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불평했던 일이 있었죠.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 때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으로 건너갔던 그 기억을 다시 한번 요단강 앞에서 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반응이 무엇이었을까요? 원망하고 불평했을까요? 그러지 않았을까요? 잘 모르겠죠. 성경에 보니까 이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원망하고 불평했던 이스라엘 민족인데, 이제는 40년의 세월을 지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아간 것이 아닐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구나, 하나님과 함께하면 되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40년 동안 몸으로 배웠기 때문에, 요단강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두려워 떨거나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여호수아의 말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에 발을 담그면 하나님께서 물을 멈추게 하실 거라고 이야기했고, 놀랍게도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으로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요단강 물이 멈추게 된 것이죠. 이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은 원망하고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믿으니까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되는구나”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원망하고 불평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따라가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 16절에서 17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모세가 사라져 버렸는데, 모세가 사라졌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는 사라져도 하나님은 계시기 때문이에요. 모세가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에, 도구는 사라져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여호수아 앞에서 “우리가 그 옛날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함께하겠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이죠.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요단강을 보면서 요단강 안으로 들어가라, 발을 담그라고 했을 때 무서웠을까요? 안 무서웠을까요? 저는 굉장히 무서웠을 것 같아요. 저는 특별히 물을 무서워하고 수영도 못하는데요. 정말 물을 보면서 “내가 혹시라도 쓸려가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 수 있었겠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여호수아가 지시하는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그 요단강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저 강물이 쭉 내려오다가 제사장들이 그 요단강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요단강 물이 멈추어 버린 것이죠. 물이 더 이상 오지 않는 겁니다. 마치 댐이 쌓여 있는 것처럼 그 물이 흘러내리지 않아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그 요단강을 아무 문제 없이 건너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묵상하면서 한 가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 교훈이 무엇일까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겠다고 하는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의심이 생기거나 “이건 아닌데, 이건 안 되는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우리 모두가 다 순종하며 복종하는 것이 옳을 줄로 믿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까, 말씀하시는 분을 신뢰할 수 있으니까—그렇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순종하는 게 그게 순종인 것이죠.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이 순간에 “요단강에 발을 내디디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불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누가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죠. “이 물속에 들어가면 우리가 빠져 죽을 것이다”라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물론 자연 법칙에 의하면 쓸려가 죽을 수도 있어요—하지만 이것을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발을 내디뎠을 때 놀랍게도 요단강이 멈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보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생각해 봐서 이건 아닌데, 말이 안 되는데” 하며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한 것이죠. 누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가 살고 있는 집을 떠나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네가 지금까지 익숙해져서 살고 있던 그 마을을 떠나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따라가라.” 하나님, 어디로 갑니까? “아직 안 알려 줄게.” 목적지도 안 알려 주셨어요. 그냥 나가라는 거예요. 알 수도 없는 목적지를 향해 가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앉아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저 먼 가나안에 이르기까지—그곳에 땅 한 평도 없지만—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죠? 어느 날 잘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쳐라.” 번제로 바치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죽여서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어요. “하나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이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삭을 왜 죽이라고 하십니까?”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상황인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다음 날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었던 것이죠. 아브라함은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고 옳지 않아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죠.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말씀하시는 그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내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 훨씬 더 옳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55장 8절에서 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아멘. 우리가 생각하는 게 옳은 게 아니에요. 내 생각이 맞는 게 아니라 누구의 생각이 옳아요? 하나님의 생각이 맞는 거예요. 나는 이것밖에 보지 못해요. 내 생각에는 이게 맞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은 이렇게 하는 게 옳은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전혀 말도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을 의심하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보다 더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의 말씀이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이처럼 돼야 된다, 어린아이처럼 돼야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어린아이의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어린아이가 전적으로 아빠, 엄마를 신뢰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린아이는 어떻습니까? 부모를 신뢰하는 거죠. 아빠를 믿어요. 엄마를 믿어요. 그래서 아이를 높은 곳에 세워 놓고 아빠가 밑에서 “얘야, 뛰어내려! 내가 안아 줄 테니까 뛰어내려!” 하면 뜁니까, 안 뜁니까? 뛰어내려요. 자기 키의 몇 배가 되는 그곳에서 퍽 뛰어내리면서 아빠의 품에 안기는 거죠. 왜? 아빠를 믿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서—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니까—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강이라는 장애물을 만나게 되었을 때, 아마 그들의 마음 가운데 “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요단강을 건너가려고 할 때 그 물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한 발자국도 그 안에 들여놓을 수 없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으로 들어가라” 말씀해 주셨을 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들어가게 되었고, 들어가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는 말에 다 순종해야 된다”는 의미를 말씀해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신 이 성경 말씀이라고 한다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돼요.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명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것이죠. 하지만 목사님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말이에요. 목사님이 잘못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있어요. 몰라서, 실수해서,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 때문에 잘못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목사님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님 말씀이니까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요. 왜냐하면, 제가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고,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는 인간인데 제 말을 무조건 따르면 망할 수 있어요.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믿어야지,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오해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오해하여 마치 “목사님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오해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리고 그래서 영적인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성경의 권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5절의 말씀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목사님의 옷을 입고 있어요. 양의 옷을 입고 있어요. 하지만 잘못된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목사의 옷을 입고 있으면 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가짜도 있을 수 있고 거짓 선지자도 있을 수 있고 잘못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조심하지 아니하면 속아 넘어갈 수 있고, 속아 넘어가게 되면 결국 엄청난 큰일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경고해 주시는 것이죠. 함부로 믿지 말고, 아무나 믿지 말고, “나에게 기도해 준다”고 해서 믿지 말고,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축복해 주는 기도를 해 준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하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잘 분별해서 따라가지 아니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한다면—그 말씀 앞에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철저하게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목사님이 말하는 건 무조건 의심하고 거부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잘못된 지도자의 말은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에, 그래도 잘 따라줘야 할 목회자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따르지 않고 반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균형을 잡아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라고 한다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순종하며 복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 그 옛날 요단강을 건넜던 이스라엘 민족의 그 경험들이 우리들의 경험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생각할 때는 아닌 것 같다고 해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요단강 물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들어가지 않고 겉에서만 서 있었다면 결코 한 발자국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물속에 들어가면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시니까 들어갔고, 들어가니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된” 거죠.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오늘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생각과 많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 주시나요? “차라리 네가 손해 보고 살아라”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싸워서 이겨서 너의 이익을 챙기고 반드시 승리하며 살지 말고, 차라리 네가 손해 봐라. 차라리 네가 피해를 봐라. 오히려 손해 보면서 살아라—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셔요. 주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원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 원수와 싸워서 이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수를 용서하고 그 원수를 위하여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고 계세요. 너희들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은 자리로 가서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높여 주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말씀해 주고 계셔요.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탐욕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사랑을 베풀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비롭게 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불안한 마음이 들어요? “주님, 손해 보면서 살면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하고 무시해요. 어떻게 이런 세상에서 제가 살아요? 하나님, 그래도 본때를 보여 줘야 힘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 사람들이 저를 무시하지 않죠. 하나님,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원수를 갚아 버려야 더 이상 저를 힘들게 하지 않죠.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해 주면 저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아요.”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요단강을 갈랐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왜 요단강 물이 갈라지지 않나요? 오늘날 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많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말씀해 주고 계셔요. 우리의 본성과는 다른 방향으로 말씀해 주고 계셔요.

“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고, 우리의 본성과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해 주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지 아니하고,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버리기 때문에—물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저 물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2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예수비전교회가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이 세상 사람들이 보고 깜짝 놀랄 방식으로 뭔가 화려하고 위대하고, 이 세상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의 장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장점이 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어떤 것이 장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하나님께서 엎드리라고 말씀하시면 엎드리고,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시면 들어가고—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내 뜻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은혜 가운데 함께해 주셨지만, 앞으로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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