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는데요.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미 그 땅에서 살고 있는 가나안 민족들을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특별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민족들을 다 진멸시켜 버리라는 명령인 것이죠. 한마디로 다 죽여 버리라는 그런 끔찍한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본다면 야, 그것이 당연한 명령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고 한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운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동안 잘 살고 있던 가나안 민족인데 왜 이렇게 편파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가나안 민족들을 이렇게 치시는 것이 그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만을 편애하셔서 한 편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이 아닌 다른 이 가나안 사람들을 그냥 죽여 버린 것이다, 진멸시켜 버린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가나안 사람의 편에서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 민족들을 심판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안 민족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아온 것이죠. 너무나도 큰 악을 행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계속해서 참아 오셨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죄악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도구를 사용하셔서 심판자를 사용하셔서 그 가나안 민족에 대한 합당한 형벌,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마치 재판정에서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사형을 언도하듯이 중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그 죄에 대한 재판을 판결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가나안 민족의 죄악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 가나안 민족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공평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정의를 행하셨다고 하는 차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똑같이 행하셨어요. 그래서 이 가나안 민족을 심판하신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보면 되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걸 눈감아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죄악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죠? 사사기의 말씀을 보면 주변 민족을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들어 치신 이야기가 사사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죄악을 저지르고 여러 가지 악을 행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주변 민족을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사기의 말씀 가운데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 잘 살고 있었다가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어떤 나라를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셨습니까?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를 들어서 심판하신 것이죠.
물론 바벨론도 나쁜 나라였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를 들어서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느 편파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죄악에 대한 심판을 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순간에 가나안 민족이 회개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가나안 민족을 멸절시키려고 하는 이 순간에 가나안 민족이 만일 회개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없겠지만 만일 그 순간에라도 가나안 민족이 회개하며 돌아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용서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합의 경우입니다.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을 당할 때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보았죠. 바로 이 라합의 가정입니다. 라합은 누구였는가? 라합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들처럼 악을 행했던 사람이고 죄악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바로 라합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라합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요.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공격해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그리고 자신이 살 길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정탐꾼들을 숨겨 주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함께하는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에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자신의 구원을 간청하게 되었을 때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다 멸망을 받았지만 라합과 그 가정은 구원을 받게 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또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난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예가 있는데요. 그게 누구일까요? 바로 기브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수많은 민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기브온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공격해 온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가. 아, 이제 큰일 났구나, 우리가 망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그 기브온 민족은 어떤 선택을 했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와서 조약을 맺자, 언약을 맺자고 하면서 살 길을 찾아낸 것이죠. 다른 가나안 민족들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공격해 온다고 했을 때 전투를 하면서 전쟁을 통해서 싸우다가 그러다가 멸망을 해 버리고 말았지만, 이 기브온 민족은 어떻게 했는가. 이스라엘 민족과 조약을 맺으려고 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과 조약을 맺어서 이스라엘과 연대하고 그리고 한 패가 되어서 망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기브온 민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별한 명령을 해 주셨는데요.
너희는 그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거든 그 가나안에 있는 그 어떤 민족과도 조약을 맺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해 놓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약을 맺자고 하면 조약을 맺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기브온 사람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냈냐면, 우리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 멀리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위장해서 조약을 맺은 겁니다. 사신들을 보냈는데 그 사신들이 해어진 옷을 입고, 마른 떡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저 멀리서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저 멀리 사는 사람들인데 당신들과 조약을 맺으려고 왔다고 하니까, 여호수아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가나안에 사는 민족이 아니니까 조약을 맺어도 좋겠다 생각해서 그 가나안 민족이었던 이 기브온 민족과 조약을 덜컥 맺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속임수로 맺은 언약이니까 무효인 것인가요?
오늘날에는 무효가 될 수가 있겠지만 이 당시에는 무효가 되지 않았어요. 언약은 언약이고 약속은 약속이에요. 내가 잘못 알고 이 약속을 했던,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지식 가운데서 언약을 맺었다고 할지라도 한 번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기브온 민족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한 패가 되어서 같은 언약을 맺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브온 민족을 보호해 주고 함께하는, 죽이지 않고 살려내는 그러한 놀라운 혜택을 입게 된 것이 바로 기브온 민족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가나안 민족들 가운데 이 기브온 민족은 멸망당하지 않았습니까? 기브온 민족이 죄를 짓지 않은 민족이어서 멸망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아요, 라합과 똑같은 거죠.
여리고성에 있는 수많은 죄인들 가운데 라합도 똑같이 죄를 저질렀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스라엘 민족과 한 패가 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라합이 살아나게 된 것처럼 이 기브온 민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민족들과 똑같아요. 죄를 똑같이 지었어요. 마땅히 멸망당해야 될 그런 민족이었어요. 하지만 망하게 되는 그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 앞에 와서 언약을 맺고 구원의 은총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을 때 살아나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이야기가 이 여호수아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이걸 보면서 저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신약시대 때 예수님을 찾아왔던 수로보니게 여인,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님, 내 딸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 내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시면서 아주 매몰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 너희와 같은 가나안 민족들, 너희와 같은 수로보니게 사람들에게는 내가 보냄을 받은 게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계속 간청을 합니다. 그래도 좀 도와주세요. 제발 좀 살려 달라고 이야기를 할 때 더 아주 놀라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무슨 얘기를 합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겁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순간에 이 여인의 고백이 무엇이냐면, 주님, 맞습니다. 제가 자격이 있어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개와 같은 존재와 같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고 그 여인의 딸을 살려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신 이야기가 신약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브온 민족이 어떤 민족이었는가. 바로 그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민족이었던 거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던 사람들이었어요. 당연히 멸망 받아야 되고 심판받아야 될 민족이었는데, 그 망하게 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도 좀 주옵소서 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와 언약을 맺게 되었을 때 결국 이 기브온 민족이 죽지 않고 살아나는 그런 놀라운 은총을 입었던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언약을 맺게 된 기브온 민족. 그래서 그 뒤로 편안하게 잘 살게 되었을까요? 그게 아닌 것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과 한 패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는 가나안 민족들과는 적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나안 민족들이 들고일어나서 기브온 민족을 공격해 오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살겠다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는데 결국 자기들의 원래 동맹이었던 그 가나안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기브온 민족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순간에 기브온 민족이 여호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기브온 민족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전쟁 가운데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승리하게 됐습니다. 여호수아서 10장 8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기브온을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가나안 민족들, 대표적으로 아모리 민족을 중심으로 한 여러 민족들이 전쟁을 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시니까 그 아모리 민족들을 다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하는 가운데 막 이기고 있었어요. 이기고 있었는데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때 여호수아가 이번 참에 다 물리쳐 버리고, 다 진멸해 버리고 싶은데 해가 져 버리면 더 이상 그 아모리 민족을 진멸할 수 없으니까,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오늘 읽은 여호수아 10장 12절의 말씀입니다. 12절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여호수아가 태양을 향해서 외치는 겁니다. 태양아, 저 서쪽으로 넘어가지 말고 그냥 거기 그대로 서 있어라. 달아, 너 뜨지 말고 그냥 그 아얄론 골짜기에 그대로 있어라. 왜? 우리가 지금 태양빛 아래서 저 아모리 사람들을 물리쳐야 되는데 밤이 돼 버리면 더 이상 못 물리치니까 태양아 거기 가만히 있으라라고 명령한 것이죠. 지금 이 여호수아가 했던 이 말이 문법적으로 보면 명령문처럼 돼 있잖아요. 태양아 머물러라, 달아 멈추어라, 이렇게 태양과 달을 향해서 명령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이게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갈망, 소망을 담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축도와 같아요. 축도할 때 어떻게 축도하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제하심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도를 하잖아요.
명령을 하는 것처럼 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헬라어에는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번역이에요. 명령, 제3자를 향해서 명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같은 표현법입니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지만 태양과 달을 향해서 명령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하나님, 태양이 멈추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저 달이 멈추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기도의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성경에 이런 명령형이 나온다고 한다면 “아, 이게 하나님께 하는 기도의 표현이구나, 간구의 표현이구나.”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축도할 때 기도의 표현의 의미를 살려서 “축원하옵나이다.”라고 그렇게 하시는 축도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는데요. 아무튼 이 여호수아가 지금 승리하고 있는데 이 승리가 여기서 멈추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 가운데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향해서 간구하는 겁니다. 태양이 멈추게 해 주세요. 달이 멈추게 해 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이 아모리 사람들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진멸해 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 달라고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된 것이죠. 그랬더니 어떻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랬다는 거예요.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어서 그래서 아모리 사람들을 완전히 물리치고 기브온 사람들을 구원해 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여호수아 10장의 말씀입니다. 정말 태양과 달이 멈췄을까요? 멈추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정말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그 순간만큼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만들어서 그래서 태양이 지지 않고 달이 뜨지 않게 만드신다고 한다면 그렇게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지구가 자전을 멈추게 되면 어떻게 되죠? 튕겨 나갈 거 아닙니까? 하지만 튕겨 나가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이 그냥 태양이 머문 것처럼 그렇게 만드시려면 만드실 수도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시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래서 정말 정말 이렇게 여호수아가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연현상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주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 이해하는 방법이 있는데, 실제로 태양이 멈춘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태양빛이 계속 비추게, 환한 대낮이 되게 만들어서 평상시 같으면 6시에 깜깜해지는데 6시가 아니라 7시, 8시가 되어도 빛이 환하게 비추어지는 그런 현상을 통해서 마치 태양이 멈춘 것처럼, 마치 달이 멈춘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환한 대낮이 더 지속이 되어서 그 아모리 민족을 완전히 물리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게 더 맞을까요? 몰라요. 어쨌든 이겼습니다. 어쨌든 이겼습니다. 궁금하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기브온 사람들이 살 수 있었었나, 실제로 그 당시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보다도 우리가 더 주목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당연히 멸망받아야 되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당연히 심판받아야 될 그 기브온 사람들이 어떻게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났으며,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되었는가. 이 부분에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나안 민족들 중에서 그나마 그들은 좀 더 나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다 똑같이 죄인이었어요. 다 똑같이 멸망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멸망당하기 직전에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당할 것을 깨닫고 자비를 구하러 나아온 것이죠. 그게 달랐던 거예요. “우리를 좀 살려 주세요. 우리와 언약을 맺어서, 조약을 맺어서 우리를 살려 달라.”고 그렇게 나왔던 것이 그들을 살린 것이죠.
마치 누구와 같은가.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와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행악자들이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마지막 죽는 그 순간에 주님 앞에 고백하기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 저를 기억해 달라.”고, 그렇게 주님 앞에 부탁하게 될 때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 기브온 사람들은 망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나왔을 때. 하나님의 은총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완벽하고 깨끗해서 아무 죄와 흠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완벽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이 앞에 서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보다 제가 더 거룩하고 깨끗하고 그나마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물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죠. 우리에게 살 길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그 옛날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연합했기 때문에 살아났던 것처럼 우리의 살 길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죠. 우리의 생명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우리는 살아나게 되는 것이고, 어떻게 살아나게 되는가. 완벽하게 살아나는 거예요.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태양아 멈추어라.” 하면서 완벽하게 물리쳐 주고 기브온을 살려 낸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죠. 로마서 6장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제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삶,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부활과 연합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다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건가요? 그게 아니에요. 그 옛날 기브온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과 연합하게 되었을 때 아모리 사람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요한복음 15장 18–19절 말씀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기브온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는 것을 선택하자,
그 땅에 있는 가나안 민족들이 아모리 민족을 중심으로 해서 공격해 오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게 된다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니까 모든 미워하는 것이 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될 미워함이 아닐 때도 있어요. 우리가 잘못해서 그래서 미워하는 것을 그것을 내가 주를 위해서 고난 달랑 한다고 그렇게 잘못 착각하시면 안 돼요. 하지만 내가 주를 따르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주님과 한 패가 되었다고 하는 이유로 이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가 있게 될 텐데, 기브온 민족이 아모리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일들이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이게 잘못인가. 아니구나 하면서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태복음 5장 11–12절 말씀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고난을 당하면 “아, 이게 아닌가 보다.” 하면서 옛날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죠.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무엇과 같은가. 마치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 위를 배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옛날 기브온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쫓아와서 그들을 구원해 준 것처럼, 바닷물에 고립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해경이 달려와 자신의 조끼를 내어 준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길이요, 아모리 민족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던 기브온 민족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가질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주 예수 앞에 나아가 주님과 함께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