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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집에 세운 우상 (왕상 12:25-33)

이스라엘 나라가 이제 분단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절에는 하나의 나라였지만, 르호보암 때에 가서 남쪽 유다 나라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누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감사합니다. 기억이 나셔서.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 여로보암 왕에게는 하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이 무엇일까요?

북쪽 이스라엘 땅과 남쪽 유다로 이렇게 나뉘게 되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북쪽 지방에 있었습니까? 남쪽 지방에 있었습니까? 남쪽 예루살렘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릴 때 희생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바로 남쪽 유다에게로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만 한다는 것. 이 사실이 여로보암 왕의 마음 가운데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북쪽에서만 살면 좋을 텐데,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에 자꾸 왔다 갔다 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빼앗겨 버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열왕기상 12장 27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여로보암의 마음 가운데 이런 염려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런 염려, 이런 우려는 쓸데없는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그런 염려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2번입니까? 그렇죠. 그렇습니다. 염려가 되는 게 당연한 것이죠. 안 보면 마음이 뺏길 일이 없는 거예요. 보지 않으면, 지금 볼 때는 헤어질 때 막 울지만 그런데 안 보면 잊혀지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북쪽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 자기들끼리 행복하고 자기들끼리만 지내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항상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 신앙의 특성상, 구약 시대의 신앙의 특성상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 되기 때문에, 갔다 왔다 하면서 이야기들을 할 거 아닙니까? ‘남쪽 유다는 이렇게 좋더라. 제사 드리러 갔더니 유다는 이렇게 많이 발전했더라.’ 유다 왕 르호보암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 저런 얘기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고 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통치자로서 당연히 누구나 다 염려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른 문제를 진단했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답을 여로보암이 내놓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다 그렇듯이 해답은 잘못된 해답을 제시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항상 이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 같아요.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단을 잘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대부분 문제의 진단을 잘 하고 있어요. ‘우리 가정에 이게 부족하다. 우리에게 이것이 부족하다. 이것이 없다. 이것이 안 된다.’ 문제가 있는 것을 진단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 피부로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 진단을 잘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는 대답은 안타깝게도 해결책으로 내어놓는 게 아니라,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들을 대부분 다 내어놓는다고 하는 게 우리 인생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로보암 왕은 그런 점에 있어서 문제를 잘 진단했지만, 해답을 잘못된 해답을 찾아 놓았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유다의 왕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하는 이런 염려가 생긴다고 한다면, 어떤 대답을 내놓는 게 정상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일 여로보암 왕이라고 한다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마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좋은 왕이 되면 되는 겁니다. 르호보암 왕보다 내가 더 좋은 왕이 되면 되는 거예요. 내가 백성들을 더 잘 섬기고 이 북쪽 이스라엘을 더 행복한 나라로, 더 좋은 나라로 만들면 되는 것이죠. 왕으로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돌봐주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재판으로서 그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 주고, 정말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정말 섬기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제사를 드리러 남쪽 유다로 간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다른 나라에 먹을 것이 더 많은 게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이곳에 정말로 사랑하고 정말로 백성들을 아끼는 좋은 왕이 될 수만 있다고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은 북쪽 이스라엘이 마음이 하나가 되고 행복한 나라, 좋은 나라로 만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여로보암에게 환호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르호보암을 버리고, ‘안 되겠다. 우리는 르호보암과 같이 못 지내겠다’ 하면서 10개의 지파가 여로보암을 따라서 갔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여로보암이 르호보암보다 더 정통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정통성으로 따지면 누가 정통성이 있습니까? 르호보암이 정통성이 있는 거예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라고 하는 적통을 가지고 있는 이 르호보암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더 잘생겼어요? 르호보암이 잘생겼습니까? 여로보암이 잘생겼습니까? 몰라요. 하지만 잘생긴 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키가 큰 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르호보암이 왕이 아니라 독재자처럼 굴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독재자처럼 백성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백성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는 르호보암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여로보암에게로 몰려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여로보암이 내놓는 대답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대답이 제일 좋은 대답이었겠는가? **’내가 더 좋은 왕이 되어서 백성들의 아픔들을 내가 돌보아주고 싸매어주고, 그래서 이 백성들을 더 행복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열정을 가지고 한다고 한다면, 비록 그 과정에서 실제적으로 그렇게 만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진정성 있게 하려고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면,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과 함께 행복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로보암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백성들이 남쪽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겠다.’ 물리적인 방법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땅에도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는 곳을 만들자. 이라고 하는 곳은 저 북쪽 지방에 있는 요단강 상류, 갈릴리 호수 북쪽으로 가는 그곳에 있는 지역이 단이라고 하는 지역이었는데, 그 북쪽 지방에 제단을 하나 만들고 또 베델이라고 하는 남쪽 지역에 두 군데에다가 제단을 만들어서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만들자.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굳이 예루살렘으로 갈 필요가 없고,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 가서 베델에 가까운 사람은 베델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단에 가까운 사람은 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면 좋겠다고 하는 정말 잘못된 정책을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쉬운 일입니다.

지난번에 성지 순례를 가는 가운데, 성지순례를 하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하도 많이 돌아다녀가지고 어디서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 나중에 사진을 봐도 이게 그 사진인지 저 사진인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이 사진이 그때 베델에 있는 그 제단의 위치였다고 생각이 들어요. 사진을 한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보면은 뭔가 이 콘크리트로 바닥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콘크리트가 아니고 돌을 다듬어서 저렇게 제단의 바닥을 세워 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여러 것들을 만들어서 거기에 제단을 만들었는데요. 안타깝게도 그 위에 만들었던 제단은 없어져 버려서, 그래서 그 당시에 만들었을 법한 제단의 모형을 이렇게 철제로 만들어서 제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이나요? 네. 저는 그곳에 가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었던 그것을 생각해 보면서 성지 순례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이런 제단을 베델에도 만들어 놓고 단에도 만들어 놓아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쉬운 것입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아요. 사울 왕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바라보게 될 때, 다윗이라고 하는 걸출한 한 인물의 등장 앞에서 사울 왕은 두려웠습니다. **’내 왕좌가 빼앗길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왕좌가 다윗에게 의해서 나는 물러나게 되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바른 진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상황 가운데 사울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죠? 다윗을 그때부터 죽이려고 달려들 게 아니고 어떻게 해야 돼요? 더 좋은 왕이 돼야 돼요. 더 좋은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더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고, 왜적의 침입에서부터 건져내주는 그런 철저하게 방어를 해야 될 것이고,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그래서 더 좋은 왕이 되어야 했던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그 이유를 자기가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엎드리며 나아갈 때. 그래야 그게 바른 해답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너무나도 안타깝게 사울 왕은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만 적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늘 걱정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부딪히는 게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결론을 내립니다. ‘관계를 끊어버려야 되겠다. 더 이상 상종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주를 위해 봉사하지 않아야 되겠다.’ ‘이런 욕을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뭐 하려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나? 내가 뭐 하려고 이렇게 욕 들어가면서 내가 주를 위해서 헌신하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결론을 마음속에 내리는 것이죠. 그때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제일 먼저 솟아오르는 그 생각에 따라 움직일 게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묵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까?’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음을 닫아버려서 가까이 가지 않고 거리를 두고 사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그런 결단을 통해서 자꾸만 자꾸만 숨어 들어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결단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결단이 어떤 결단이 돼야 됩니까?

‘주님을 닮아가는 결단이 되게 해 주옵소서. 주님께서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처럼, 저희들도 주님의 뜻에 따라 맞는 그런 신실한 결단을 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들의 해답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해답들을 행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여로보암은 단과 베델이라고 하는 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곳에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만들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하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엉뚱한 우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닌 엉뚱한 우상들을 섬기는 일들이 참 많이 있는데요.

늘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속아 넘어간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늘 재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해요.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요.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사실은 돈을 섬기고 있고, 사실은 이데올로기를 섬기고 있고, 사실은 잘못된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있고, 이 세상의 가치를 섬기고 있는 그런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스라엘 민족도 지금 이 곳에서 금송아지 앞에 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마음으로 금송아지 앞에 엎드리고 있었는데, 오늘 우리들의 삶이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똑같은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우상 앞에 엎드리고 있는 그런 경우들이 너무나도 허다하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베델이라고 하는 곳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이죠. 베델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벧’**은 집이라는 얘기고, **’엘’**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그래서 **’벧엘’**은 무슨 집이에요? 하나님의 집이에요. **’벧’**은 집이고, **’레헴’**은 떡인데, 빵인데, **’베들레헴’**은 그러니까 뭐예요? 빵집이에요.

아무튼 그 하나님의 집에 제단을 세웠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죠. 이 베델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곳입니까? 그 옛날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여기도 계시는구나. 이곳에 안 계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여기도 계시는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곳이 벧엘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어느 한 지역에 매여 있는 하나님인 것이라고 그렇게 많이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야곱은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 부모님의 집에 있는데, 나는 그 부모님의 집을 떠나서 저 먼 곳으로 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나는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도 얻지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나는 이제 외롭게 길을 간다’**고 생각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주신 거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겠다”**고 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장소에 매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고 한다면 그곳이 바로 벧엘이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름하였던 것이 벧엘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루살렘이 저 남쪽 유다에 있지만, 북쪽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면 그곳이 벧엘이 되는 거예요.

그곳이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예루살렘이 없다고 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같이 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북쪽에 있든 저 서쪽에 있든 동쪽에 있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더라고 한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왜곡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멀리 떠나간 패착을 두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인 줄로 믿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어떻게 되죠?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잠언서 8장 17절 말씀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하셨는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하나님께서 멀어져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상에게 가까이 가면 우상이 만나주나요? 만나주지 않는 것이죠. 우상이 복을 내려주나요? 복을 내려주지 않는 것이죠. 아무 능력이 없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바른 믿음의 해답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어떤 선택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 그 문제를 보고 ‘안 되겠다. 이 같은 인간들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 하면서 버리신 그런 대답을 내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는 대답을 내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희생과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시는 그 놀라운 선택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 제3남전도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예수 비전의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평생의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복된 인생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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